# 48. published - 출판된 (5)
48.
***
「거장의 숨결」 1차 정산 금액.
엑셀 파일로 정리된 총금액은 뒷자리 떼고도 1억 천만 원이 넘었다.
관객 수로 따지면 5만 명이 넘는 매출.
현재 21주 연속 매진행렬 중이라 정산받을 금액은 계속 누적되는 중이었다.
‘이래서 계약이 중요하다니까.’
2천만 원을 포기하고 미래를 택한 덕에 벌써 5배가 넘는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난 서미연 감독과 직접 만났다.
“1차 정산 금액은 오늘 오후에 바로 입금될 거예요. 빨리 입금해 드려야 했는데 와... 저희 생각보다 관객 수가 엄청나서 정산하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서미연 감독은 담당 업무가 아니었음에도 끝까지 나와 관련된 일들을 챙겼다.
“저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반응이 나쁘지 않은 가보네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죠. 벌써 21주 연속 매진이니까요. 이대로라면 제 기록도 깨질 거 같은데요?”
서 감독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최근 바짝 얼어붙은 연극계에 보기 드문 흥행 소식이었다.
작품 평가에 대한 내용.
각종 매체의 기사와 서 감독의 인터뷰 중에 있었던 이야기.
크리스토퍼 말로 역을 맡은 이경민을 비롯해 최초 공연에 함께했던 배우들의 근황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더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처음 서 감독을 만났던 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말 감사드려요. 런던에서 작가님을 만난 건 다시 생각해도 행운이었다니까요.”
서 감독이 순간 감상에 젖는다.
“그때,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작가님은 다 아시잖아요. 어찌나 막막하던지 눈앞이 캄캄했었는데...”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유명 작가들을 쫓아다니며 고생하던 서 감독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야...
예나 지금이나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
“참, 반응이 좋아서 다음 달엔 부산 쪽에 한 개 관을 더 추가할 예정이에요. 대표님이 웬일로 엄청 투자하시더라고요.”
서 감독과 달리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잘 되니까 투자를 하는 거야 너무나 당연하니까.
솔직히 김재용 대표의 일 처리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함께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때 계약 때 보여준 모습, 그건 쉽게 변하는 모습이 아니니까.’
성공할수록 위험한 인물이 바로 김 대표의 본모습이었다. 물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지금 굳이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럼 관객이 더 늘겠네요?”
나는 본심과는 다른 평범한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당연하죠. 작가님 주머니는 나날이 두둑해질 테고요.”
그때, 서 감독이 갑자기 나를 바라본다.
“근데 작가님, 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때 계약할 때 말이에요. 왜 갑자기 러닝개런티를 고집하신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거든요.”
“많이 이상했었나요?”
“이상했죠. 연극 쪽에서 러닝 개런티는 유명 배우가 아니고서야 원하지를 않으니까요. 당장 다음 달에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고민인데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하긴, 이 바닥에 떠도는 우스갯소리 중 하나가 ‘처음 통장에 꽂히는 원고료가 전부다’라는 말이니까.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저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뿐이죠.”
“...확신이요?”
“네,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조금은 재수 없을 수 있는 답변.
그러나 서 감독의 반응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하긴, 저도 그랬었죠.”
“서 감독님이요?”
내가 쳐다보자 서 감독이 핏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네, 대본 보자마자 확신했거든요. 이건 무조건 된다, 그리고 이 대본을 쓴 작가님이라면 믿을 수 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까였지만 끝내 대표님을 설득했잖아요.”
직접 나를 만났고,
두 눈으로 내 작품을 봤고,
대본이 수정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
서 감독의 눈빛엔 나를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래.
이 눈빛이었다.
같이 오래 일할 사람의 눈빛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
나는 따뜻한 커피 한잔의 온기를 느끼며 또 다른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먼 계획.
그러나 언젠간 반드시 다가올 미래의 일이었다.
***
12월 첫째 주.
기말고사를 끝으로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종강과 함께 2학기 내 성적은 난생처음 과톱을 찍었다.
덕분에 대학생활 내내 염원이었던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모두 열정을 다한 노력의 결과.
여한이 남지 않게 불태웠던 학기였다.
이제 방학만 지나면 4학년.
성실하게 수업을 들은 덕에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조기 졸업도 할 수 있었다.
뭐 내가 원하면 1년을 채울 수도 있지만 더 이상 학교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1년간 원 없이 공부했던 것도 있었고, 더 머물기에 이곳은 너무 좁았다.
뭐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거추장스러운 교수들 때문이기도 하고.
당선 소식이 학과 내에 퍼진 뒤 교수들의 호출이 이어진다.
“이야. 서준아,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내가 너 입학할 때부터 심상찮다고 생각했잖아.”
이분은 군대 가기 전 내게 전과를 권했던 선생님이었다.
그때 했던 말이, ‘넌 재능이 없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다른 길 찾는 게 어때?’였었지?
그래놓고 다시 불러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었다.
“서준아, 요즘엔 작가들도 학벌이 좋아야 대접받는 거 알지? 어떠냐,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해 보는 건? 너 시에도 일가견이 있던데, 나한테 배워볼 생각 없어? 어?”
이분은 대학원 선배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로 유명한 분이었다.
작년에 낸 시집의 절반 이상이 대학원생 선배들의 고혈이라는 소문 아닌 소문이 도는 중이고.
물론 정말 의외의 사람도 한 명 있었다.
“희곡 쪽으로 제대로 해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라. 한 작품 성공했다고 다음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내가 키워주마.”
2학기 내내 거리를 두던 박성규 학과장마저 넌지시 줄을 댄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고, 작품 들고 찾아갔을 땐 문전 박대하더니,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족속이었다.
아니,
이런 게 진짜 인간의 본성이지.
탐욕스럽고, 오만하며,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의 결정체.
전생의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달라야 했다.
‘두 번 실수할 순 없으니까.’
물론 교수 중에 유일하게 태도가 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바로 송영도 교수였다.
“고생했다. 역시 니가 해낼 줄 알았어.”
송 교수는 커피 한잔을 사주며 담백하게 내 등단을 축하했다.
“이젠 후배님이라고 해야 하나?”
그답지 않은 농담도 나쁘지 않았고.
“참, 시상식 끝나고 시간 어때? 정 회장님께서 식사하자고 하시던데.”
나는 좋다고 답했다.
물론 단순히 축하를 받기 위해서 응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분명하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위해 한번은 만나야 했으니까.’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
오후 2시.
와이즈 출판사 시상식.
본사 6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엄마 괜찮니? 이상하지 않아?”
새 옷을 입은 엄마는 아침부터 누나가 해준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예뻐. 여기서 제일 예쁠걸?”
“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누가 들을까 무섭게.”
말은 그렇게 해도 싫지 않은 눈치.
반면에 누나는 너무 신경 쓴 게 자꾸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야말로 완전 망한 거 같아... 너무 과했나?”
모두 처음 와본 시상식 때문이었다.
나야 두 번째지만.
첫 번째는 교내 백일장 시상식이었다.
그러나 이번 와이즈 출판사 시상식은 같은 시상식의 범주로 넣을 수가 없었다.
국내 3대 순수문학 공모전답게 분위기와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곳곳에 큰 카메라를 든 기자도 보이고, 문학계 저명인사들도 맨 앞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론과 문학계 선후배들 앞에서 정식으로 자격을 인증받는 일종의 축하연.
잠시 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본격적인 식이 거행된다.
시, 수필, 단편소설, 희곡 분야 수상자가 차례로 나와 상금과 상패를 받았다.
다음은 드디어 내 차례였다.
“자, 다음은 장편 소설 부문 시상이 있겠습니다. 대상, 권서준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박수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시선들이 쏟아진다.
오직 나만을 위한 순간.
오롯이 나 홀로 주인공이 되는 자리.
나는 적당히 고양감을 만끽하며 천천히 단상 위에 섰다.
“시상은 와이즈 출판사 대표이자 한국작가협회장이신 정영만 회장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정 회장이 상패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흠.”
일부러 헛기침하더니 이내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건 기대감을 충족시켜준 후배에게 보내는 선배의 격려이자 축하의 메시지였다.
기자들이 들고 있던 카메라에서 동시에 플래시가 터진다.
파박파박 파바박.
불규칙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불빛이 번쩍인다.
사람들의 박수까지 이어지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장면만큼은 똑똑히 내 눈에 들어온다.
짝짝짝.
아들의 시상을 축하하는 엄마의 박수 치는 모습.
엄마는 울고 있었다.
옆에 있는 누나도 마찬가지.
정성 들여 한 화장이 엉망이 됐는데도 두 사람은 고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진심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래.
이게 가족이었다.
눈물범벅인 채로 웃으며 흘리는 눈물.
그동안의 설움을 한 번에 날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
시상식이 끝나고 며칠 뒤.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평일 오후.
나는 연남동 근처 일식집에서 정 회장과 송영도 교수를 만났다.
“자, 한잔 받게.”
따끈하게 데운 정종 한잔이 한 겨울의 추위를 은근히 녹여낸다.
술이 몇 번 돌고 자연스럽게 정 회장이 작품 이야기를 꺼낸다.
“송 교수 자네, 이 친구 작품은 봤나?”
“네, 시상식 다음 날에 봤습니다.”
송 교수는 심사위원이 아니었던 탓에 시상식 후에나 볼 수 있었다.
“어땠나?”
“솔직히 놀랐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작품이더군요.”
정 회장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자네가 발굴한 인재가 큰일을 해냈지.”
“제가 발굴했다기보다는 스스로 드러낸 거죠. 자신의 가치를.”
송 교수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얼굴에 떠오른 건 대견한 미소였다.
“그래, 나도 충격을 받았지 뭔가? 마치 처음 맥베스를 읽었을 때처럼 말이야...”
정 회장은 허공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맥베스를 접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 듯했다.
“자네, 셰익스피어 작품이 왜 지금까지 사랑을 받는지 아니?”
이런 경우 정답은 질문한 쪽이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잠자코 기다리자 정 회장이 입을 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신들린 언어적 감각은 빠질 수가 없지. 아름다우면서 진실을 관통하는 대사, 박진감, 황홀함, 신비로움까지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 절묘한 언어적 기교는 곱씹을수록 감탄이 나오거든.”
정 회장은 실제로 감탄을 섞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순간,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내가 자네 글 속에서 그런 기운을 느꼈다면 믿겠는가?”
육십이 훌쩍 넘은 노작가의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송 교수도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자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봐. 내가 책임지고 출판해줄 테니까.”
정 회장이 장담한다.
와이즈 출판사의 실소유주인 정 회장의 말이라면 틀림이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송 교수도 거든다.
“그래, 이제야말로 네 꿈을 마음껏 펼쳐 봐.”
아끼는 제자를 향해 기회가 찾아오자 적극적으로 권한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 회장이 자연스럽게 다시 시선을 나에게 돌린다.
“자, 이쯤에서 묻고 싶군. 다음은 어떤 작품을 쓸 건가?”
정 회장의 질문에 송 교수도 관심이 동한다.
그들의 시선엔 순수문학에 대한 열정과 후배를 향한 간절한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내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 달랐다.
“미니시리즈를 쓸 겁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달랐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적당히 마신 술기운이 올라온다.
어느새 12월 중순을 넘어 한 해가 가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 전 정 회장과 송 교수의 표정을 떠올렸다.
내 대답을 들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 생각이 가장 중요하니까.’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해 나는 철저히 내가 원하는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자연스럽게 올 한 해 동안 내가 걸어온 길이 떠오른다.
처음 쓴 단편 소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시.
두 편의 웹드라마와 한 편의 희곡.
그리고 등단이라는 허울 좋은 명예까지 선사한 소설까지.
바쁘게 살아온 한 해.
금전적으로 얻은 성과도 만만찮았다.
웹드라마 계약금, 희곡 러닝개런티.
거기에 연극 판권료와 공모전 상금 2천만 원까지 합하면 한 해 동안 2억 원 가까이 벌어들였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과.
그러나 이제부터 진짜가 시작이었다.
‘아직 클라이맥스는 오지도 않았으니까.’
고작 1막이 끝났을 뿐이었다.
이제 2막이 무대 위에 오르고 있었다.
지이잉.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오수정 대리였다.
-작가님, 오 대리입니다. 늦었지만 공모전 수상 축하드립니다.
경쾌한 목소리로 건네는 축하 인사.
그러나 중요한 용건은 그다음이었다.
-첫 미팅, 이제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