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traditional - 전통적인 (1)
49.
***
1시간 전.
뜻밖의 대답을 들은 정영만 회장과 송영도 교수 충격을 받았다.
“미니시리즈를 쓸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드라마를 하겠다는 소린가?”
정 회장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그러나 정작 대답을 한 권서준은 담담할 뿐이었다.
“네, 구체적으로 소재를 정하진 않았지만 그럴 계획입니다. 이제 곧 제작사와 기획 미팅도 시작할 예정이고요.”
“대체 왜...”
답답한 마음에 송 교수가 말하려 하자 정 회장이 손을 들어 막는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자넨 정말 재능이 많아. 웹드라마도, 연극도, 게다가 시와 소설에서까지 그렇게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지. 그래서 그런 고민과 선택을 하는 것도 이해가 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문학이란 말이지, 이 세상에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야. 작가는 있는 세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있어야 할 세상을 보여주는 존재고. 그런 작품을 통해서 대중은 위로를 받고, 그게 바로 순수문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지.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정 회장이 권서준을 바라본다.
“난 그런 의미에서 서준이 네가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해.”
앞서 그 길을 걸어본 선배의 차분한 설득이었다.
“물론 화려해 보이는 상업 작품 쪽에 관심이 갈 수도 있지. 허나 그보다는 순문학 쪽에 네 재능을 쓰길 바라는 게 나와 송 교수의 솔직한 바람이야. 필요하다면 전적으로 지원해줄 수도 있고.”
정 회장은 마지막 멘트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누른다.
그야말로 문학계 거물이 먼저 제안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권서준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돌아오는 한 마디가 예술이었다.
“그럼 저도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아까 제 작품에서 셰익스피어의 가능성을 보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지.”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순문학에 속합니까?”
정 회장이 슬쩍 송 교수를 바라본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앞서 말했다시피 세상을 향해 깊이 있는 질문은 던지는 작품들이니까.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그 깊이와 그 문학성이 현대 문학사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하고.”
대답을 들은 권서준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진다.
진중하면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과연 그 당시에도 그랬을까요?”
“...”
정 회장은 의도를 알 수 없는 권서준의 질문에 말없이 쳐다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권서준이 설명을 이어간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당시 런던에선 셰익스피어보다 정치색을 띤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이 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다못해 그 당시 셰익스피어가 썼던 소네트는 소네티어(sonneteer)라고 불리며 저급한 평가를 받기도 했죠.”
차분한 권서준의 어조에 정 회장과 송 교수가 자연스럽게 주목한다.
“게다가 그 시절 셰익스피어는 오히려 상업 작가에 가까웠습니다. 거창한 예술과 순수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죠. 그에게 있어 글은 생존과 관련된 부분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은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이었고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 회장이 입은 연다.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순문학 쪽이 아니라는 건가?”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순문학이 이 세상에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고, 작가는 있는 세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있어야 할 세상을 보여주는 존재라면...”
잠시 말을 멈춘 권서준이 정 회장을 바라본다.
“굳이 순수문학이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요?”
“...”
순간 정 회장의 말문이 막힌다.
자신이 권서준을 설득하려고 했던 그 논리, 그 흐름을 고스란히 가져온 방법이었다.
자연스럽게 권서준의 눈빛은 더욱 살아난다.
“지금은 낯설지만 전 모든 장르에서 순문학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드라마, 영화, 그리고 소설까지. 작가가 중심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장르에 상관없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거든요.”
“...”
“이 정도면 제 생각이 충분히 전달되었을까요?”
후배를 향해 건넨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답변의 무게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묵직했다.
잠시 뒤,
대답을 마친 권서준이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
권서준이 떠난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꿈에 대한 좌절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젊은 후배가 던진 돌이 큰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정 회장이었다.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허탈한 한숨과 함께 벌어진다.
“하, 틀린 말이 하나도 없군. 따지고 보면 요즘은 노래 가사로도 노벨 문학상을 받는 세상인데 말이야.”
송 교수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에게 그토록 틀에 갇히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가장 심하게 갇혀 있는 사람은 바로 제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 어쩌면 우리야말로 생각의 틀에 갇혀 있었던 거야...”
정 회장은 자조적인 대답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송 교수를 바라본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렇게 깊이가 느껴지는 젊은 친구를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솔직히 그래서... 더 포기가 안 되네요.”
정 회장이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 생각이 같군.”
젊은 후배 작가와의 깊이 있는 대화는 오랜만에 흡족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서,
정 회장은 더욱더 권서준이라는 작가가 탐이 나기 시작했다.
***
며칠 뒤.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아침부터 진영민 CP의 언성이 높아진다.
“아니, 본부장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야,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라. 위에서 정한 건데 난들 어쩌냐?”
“그래도 이건 아니죠. 드라마가 장난입니까? 백억 단위 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 입봉 작가라뇨?”
“야, 목소리 좀 낮춰. 광고할 일 있어?”
본부장이 주변을 살피며 다급히 진영민 CP를 이끌고 복도 끝으로 끌고 간다.
“영민아, 나 좀 살려줘라. 나도 오죽하면 이러겠냐?”
“본부장님, 본부장님이야말로 절 좀 살려주세요. 상반기 라인업 다 망할 지경이라 안 그래도 머리 빠져서 탈모약 먹고 있다고요. 근데 입봉 작가는 선 넘었죠.”
“그래도 웹드라마 쪽에선 이름 좀 날렸다잖아. 대본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더만.”
본부장의 무책임한 설득이 오히려 진 CP의 열불에 휘발유를 끼얹는다.
“웹드라마랑 저희랑 같아요? 솔직히 한 해 동안 수백 편의 드라마가 쏟아지는 게 이 바닥이에요. 최근엔 OTT까지 활성화되면서 말도 안 되게 쏟아진다고요.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에 이름을 남기는 작가는 몇 명이나 되는 줄 아세요?”
“아, 그거야 나도 알지. 몇 명 안 되는 거...”
“그걸 아시는 분이 이러시면 안 되죠? 그 작가들 다 기성 작가들이에요.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하루가 멀다고 나락 가는 게 이 바닥이라고요! 근데 입봉 작가요? 게다가 낙하산이요?”
진 CP의 입에선 벌써부터 한숨만 나온다.
“야, 또 혹시 모르잖아. 조예슬 팀장이 생각 없이 꽂았을 리는 없고, 낙하산치고는 잘 쓸 수도 있잖아. 막말로 우리 선입견일 수도 있고 말이야.”
“본부장님, 이건 선입견이 아니라 십 년 넘게 이 바닥을 구르면서 얻은 종합적인 데이터라고요. 솔직히 본부장님이 한번 말씀해 보세요. 그동안 낙하산 중에 일 잘하는 애가 있었는지. 한 명만 이름 대보시라고요. 네?”
“그거야... 뭐...”
“보세요, 없죠?”
“흠, 흠.”
본부장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맛을 다신다. 이때다 싶은 진 CP가 다급히 말을 잇는다.
“게다가 이번에 채널에서 원하는 건 다른 장르도 아니고 사극이에요. 경력 작가도 쉽게 도전하지 않는 사극이라고요! 그뿐이에요? 요즘 역사 왜곡 문제 때문에 뭐만 하면 시끌시끌한 거 아시잖아요. 고증하나 잘못하면 시청률이고 나발이고, 그냥 방영 중지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밀어붙이시면 안 되죠!”
“나는 이러고 싶겠냐? 위에서 까라니까 까는 거지...”
난처하긴 본부장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진 CP가 결국 팔까지 걷어붙인다.
“대체 이 개뼈다귀 같은 아이디어는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예요? 본부장님이 불편하시면 제가 조예슬 팀장한테 한번 찾아가요?”
“쉿. 누가 들어, 인마. 목소리 좀 낮추라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죠. 하아 진짜.”
“진정 좀 해. 심호흡도 좀 하고. 후, 후. 이렇게. 인마, 따라 하라고!”
본부장이 간신히 다독이지만 진 CP의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본부장이 어깨를 두드리며 타이른다.
“영민아, 조 팀장 막말로 로열패밀리야. 회장님 직계 손녀라고. 나중에 타이거 스튜디오 대표 될 사람인데, 굳이 각을 세워서 불편해질 필요 없잖아. 안 그래?”
조곤조곤 타이르지만 진 CP는 고개를 젓는다.
“조 팀장이 대표될 사람인지 아닌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전 다만 제가 담당하는 작품이 망하는 꼴은 못 봐요. 영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든 다 쫓아내고 작품 브레이크 걸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야, 진영민!”
“솔직히 말할게요. 전 낙하산 치고 일 잘하는 놈을 못 봤어요. 왜냐고요? 애초에 능력 있는 놈이 왜 낙하산을 타요? 지 능력으로 인정받으면서 기어 올라오지.”
“...”
짬밥이 느껴지는 진 CP의 말에 본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기획제작 7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풍전야나 다름이 없었다.
***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
나는 이른 아침부터 뒷산을 올랐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오히려 그 느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뜨거운 입김에 눈썹에 물기가 맺힌다.
그런데도 오히려 격하게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드러나는 정상.
세상이 온통 순백으로 덮여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순결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이번 주군.’
미니시리즈 첫 회의가 예정되어있는 날이었다. 미팅을 위해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생각해두긴 했지만 아직 확정 짓지는 않았다.
‘미니시리즈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작가와 감독, 그리고 제작사의 생각이 같아야 해.’
같은 그림을 그려야 가장 완벽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소설과 달리 팀워크가 중요한 장르이기도 하고.
입봉 작가에, 입봉작가가 직접 고른 신입 피디까지. 나에 대한 반감이 있을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최대한 완만하게 접근하는 게 좋았다.
결국 실무자들, 그러니까 담당 CP와의 회의를 통해 좋은 그림을 그려야 했다.
늦은 오후.
산에서 내려온 뒤 나는 집 근처에서 오수정 대리를 만났다.
“드디어 첫 미팅이네요. 혹시 생각해두신 설정은 있으신가요?”
“몇 가지 있긴 한데, 일단 만나서 의논해 볼 생각입니다. 미니시리즈라는 게 혼자 작업하는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그게 나을 거 같아서요.”
내 말에 오 대리가 놀란 듯 웃는다.
“어머, 작가님은 어떻게 그렇게 이 업계를 잘 아세요? 미니시리즈 처음 하는 거 맞으세요?”
“웹드라마를 경험해본 덕에 감을 잡을 수 있었죠.”
“아, 그렇군요. 역시 뭐든 경험이 진짜 중요한 거 같아요. 사실 대부분 입봉 작가님들은 의욕이 넘쳐서 막 혼자 앞서가실 때가 많거든요.”
어떤 상황인지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작가가 의욕만 앞서서 장르의 특성과 팀워크를 놓치는 경우였다.
“혹시 타이거 스튜디오 쪽에서 원하는 장르가 있나요?”
나는 자연스럽게 제작사 쪽 의견을 물었다. 어느 정도 니즈를 알고 가면 시간 낭비도 줄일 수도 있었기에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흠.”
오 대리가 고민한다.
역시나 이미 얘기가 오간 장르가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오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솔직히 회사에선 사극을 원하는 거 같아요.”
“사극이요?”
“네, 최근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한 번 빠져들면 그보다 더 몰입감 좋은 장르도 없으니까요.”
그러다 슬쩍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근데 작가님... 혹시, 사극도 괜찮으신가요?”
한없이 걱정스러운 표정.
오 대리의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사극이야말로 어려운 장르 중 하나였으니까.
방대한 자료 조사, 철저한 고증, 게다가 이해타산에 맞춰 움직이는 다양한 캐릭터까지. 입봉 작가가 도전하기엔 문턱이 매우 높은 장르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네, 자신 있습니다.”
내 대답에 오 대리의 얼굴이 환해진다.
“정말요? 아, 진짜 다행이네요. 사실 그것 때문에 오면서 계속 맘 졸였거든요.”
나야말로 다행이었다.
왜냐고?
나는 이미 8편이 넘는 사극을 쓴 경험이 있으니까. 그것도 하나같이 역사적인 영국의 정치사를 고스란히 담은 명작들이었지.
오 대리의 우려와 달리 사극은 내게 그 어느 장르보다 친숙한 장르였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동한다.
‘이번엔 또 얼마나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