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41화 (41/203)

# 41. satisfying - 만족감을 주는 (3)

41.

***

술자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정영만 회장의 내일 오전 일정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아, 내가 내일 아침 일찍 어머니 병문안을 가야 해서 먼저 일어나야겠네. 이거 흥을 깨서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나야말로 오랜만에 기분이 좋군.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정말 아쉬워.”

거칠고 두툼한 손.

한평생 문학에 몸 바친 거장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악수를 통해 전해지는 건 그의 말대로 진한 아쉬움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정 회장과 나눈 대화를 되뇌었다.

‘가을에 있을 우리 공모전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건 어떤가?’

정 회장이 말하는 공모전은 와이즈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이었다.

수상과 동시에 문예지에 글이 실려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모전이기도 했고.

물론 등단과 함께 상금까지 수여 되기 때문에 해볼 만한 공모전이었다.

‘마침 내 머릿속엔 숙성이 끝나가는 글감이 넘치고 있었고.’

여러모로 좋은 기회.

자연스럽게 다음 목표가 그려진다.

***

늦은 밤.

강남에 위치한 유흥주점.

이곳에서는 또 다른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 선배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래, 그래. 한잔 따라봐라. 마음껏 마셔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거들먹거리며 후배의 술잔을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소담 대표.

최근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의 흥행으로 인해 소담 대표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하루가 멀다고 업계 선후배들이 술자리로 부르는 탓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이제야 대박 작품이 나오네요.”

“누누이 말했잖아. 내가 언젠가는 터트릴 사람이라고.”

소담 대표가 시원하게 술잔을 들이킨다. 기분 좋게 마시던 후배가 슬쩍 대표를 보며 묻는다.

“근데, 그 권서준 작가 말이에요. 괜찮아요? 요즘 연극 쪽에서 핫하던데요?”

“연극?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모르셨구나. 이거 한번 보세요.”

후배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 기사를 보여준다.

읽어 내려가던 소담 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연극으로 만나는 천재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 평론가 사이에서 화제.]

[거장의 숨결, 흥행 신화 이어가나?]

[혜성처럼 등장한 희곡작가 권서준...]

“희곡 도전해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잘 됐나 보네?”

아직 초반이라 더 지켜봐야겠지만 평론가와 시사회 평가가 상상 이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몸값이 더 비싸지지 않을까요?”

“...”

소담 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후배의 말대였다.

이렇게 계속 승승장구한다면 재계약이 쉽지 않았다.

왜냐고?

웹드라마의 제작비 구조상 작가에게 줄 수 있는 원고료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작가들은 더 큰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영화나 미니로 빠지겠지.’

갑자기 술맛이 확 떨어진다.

그러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이대로 놓치고 싶진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재계약해야 해.’

연극이 더 흥행하기 전에 적절하게 돈을 던져주고 최소한 한 작품은 더 해야 했다.

어차피 소담 대표 입장에선 몇 백 더 쥐여 준다고 손해 볼 게 없었다. 더 준만큼 PPL을 잔뜩 끌어와 수익을 내면 되니까.

‘물론 그렇게 하면 작품은 망가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장사꾼은 이윤만 많이 남기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권서준 그 자식, 내가 키운 거잖아. 내가 알아본 거고. 이 정도는 해줘야 은혜를 갚는 거지.’

정 피디의 업적이었지만, 소담 대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응당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적당히 돈 쥐여 주고 뽑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뽑아먹는 거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보낼 수밖에 없다면, 한 번쯤 그 배를 갈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

‘등단이라.’

목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등단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아니, 꽤나 이득이지.’

작가로 공인받는 기회라 여러모로 편한 부분이 많았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마침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는 점이었다.

제 발로 찾아온 기회.

내 입장에선 꽤나 기쁜 소식이었다.

물론 기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조회 수는 끝을 모르고 쭉쭉 올라갔다.

6개 에피소드의 총 조회 수는 무려 4천만을 넘은 상태.

해외에서까지 조회 수가 폭발한 덕분이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성적은 여러 가지 진기록을 낳았다.

역대 웹드라마 중 최단기간 4천만 뷰 달성.

자연스럽게 후속 작품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웹드라마 전문 프로덕션 예진의 손주환 팀장입니다.

-(주)글로벌 엔터테인먼트의 책임 피디 이지훈입니다. 다음 웹드라마로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어 이렇게 연락 드렸습니다.

메일함과 문자에 낯선 이름과 연락처들이 쌓여간다. 그러나 나는 굳이 확인하거나 답장하지 않았다.

웹드라마로 할 수 있는 건 다 이룬 상태.

대본의 퀄리티, 성적에 대한 부분까지 모두 만족스러웠다.

계속하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야 하겠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목표가 아니었다.

‘성적보단 내 만족이 우선이니까.’

정상을 밟아봤기에 아쉬움도 없었다.

다만,

한 통의 문자만큼은 내 관심을 끌었다.

[안녕하세요.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팀 오수정 대리입니다.]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온 연락.

게다가 기획팀이라면 조예슬이 팀장으로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연극 판권과 관련된 논의라면 오늘 극단 측과 이미 진행 중일 텐데...

다른 용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차기작에 대한 내용이겠지.’

자연스럽게 동한 호기심에 나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 작가님, 여깁니다.”

나를 알아본 오수정 대리가 손을 흔든다.

이십 대 후반쯤 됐을까.

귀밑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와 목소리가 더없이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짧은 인사와 함께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거죠?”

“저희가 연락을 드린 이유는 작가님의 차기작을 함께하고 싶어서입니다.”

오 대리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시원한 성격을 통해 평소 오 대리의 일 처리 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작가를 피곤하게 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작가님의 웹드라마 두 편을 봤는데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아, 연극도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미니시리즈 쪽 진출 생각이 없으신지 궁금해서요.”

미니시리즈.

내 주특기나 다름없는 대본이 중심인 분야라 평소에도 흥미가 있었다.

‘애초에 웹드라마로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원고료 역시 웹드라마 시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고.’

그러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지금 당장은 소설이 중요하기도 했고, 미니시리즈 자체가 덩어리가 큰 만큼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좀 힘들 것 같네요. 집필 중인 작품이 있어서요.”

나는 일부러 슬쩍 난처함을 표했다.

순간 오 대리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혹시, 희곡인가요?”

“아니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마침 좋은 글감이 있어서요.”

“아... 그럼 혹시 언제쯤 작업이 끝나실까요?”

“아마 석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와이즈 출판사의 공모전이 정확히 백일 뒤라 대충 그 정도의 시간을 들일 생각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오 대리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희도 내년 하반기 라인업을 구하는 중이라 아직 여유가 좀 있거든요.”

그렇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소설 끝나고 시기도 얼추 맞을 것 같고.

게다가 이왕 미니시리즈를 할 거면 거대 제작사와 하는 게 여러모로 나에게 유리했다.

‘작은 제작사랑 했을 때의 불편함은 소담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철저하게 내 위주로 돌아가는 일정에 관심이 동한다.

일부로 슬쩍 관심 있는 표정을 드러내자 오 대리가 열의 찬 얼굴로 설명을 이어간다.

“작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 쪽에서 최대한 조건을 맞춰드리겠습니다. 기성 작가 수준의 원고료와 함께 작품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드릴 예정이고요.”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조건이었다.

기성 작가 수준이라면 웹드라마 원고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금액.

대본 역시 걱정할 게 없었다.

몇 작품만 분석해보면 충분히 양질의 대본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다만,

한 가지 걱정도 함께 떠오른다.

바로 함께 호흡을 맞출 감독 문제였다.

타이거 스튜디오가 큰 회사인 만큼 이름 있는 피디들이 즐비했다. 아마 이렇게 직접 작가를 섭외할 정도면 네임드 피디를 붙이려 할 게 분명하고. 그러나 그건 내게 오히려 리스크였다.

‘신인 작가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들을 네임드 피디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쓸데없이 간섭하고, 칼질하는 걸 가만두고 볼 수도 없고.’

대본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연출이었다.

‘감독이 중요해. 작품에 진심이고, 내 말을 가장 신뢰하고,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라면 시너지도 좋고, 리스크를 많이 줄일 수도 있었다.

나는 즉시 협상 모드로 들어갔다.

상체를 살짝 숙인 채 목소리 톤을 낮췄다.

“좋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뭐든 맞춰주신다고 했죠?”

오 대리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진다.

“물론이죠. 이미 윗선에서도 승인받은 내용이라 편히 말씀해주세요.”

아마 윗선이라면 조예슬이겠지.

그렇다면 조금 무리가 되는 요청도 해봄 직했다.

“그럼 같이 일할 감독을 제가 고를 수 있게 해주세요.”

“음. 물론 가능합니다. 혹시 원하시는 감독님이 있으신가요?”

“네, 다만 타이거 스튜디오 소속은 아닙니다.”

“...”

오 대리는 섣부른 대답 대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 신중히 처리하는 모습. 이런 실무자의 책임감 있는 모습은 작가 입장에선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었다.

잠시 뒤,

오 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되묻는다.

“제 선에서 지금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해 섭외해보겠습니다. 혹시 어느 분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 내밀었다.

이름을 확인한 오 대리의 눈이 순간 커진다.

“저, 정말로 이분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뒤.

소담 프로덕션 회의실.

사무실은 오늘따라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정은미 피디와 소담 대표의 갈등 때문이었다.

“대표님, 이렇게 많은 PPL을 어떻게 한 작품에 넣어요?”

“걱정하지 마. 권 작가는 돈 몇 푼만 더 주면 할 테니까.”

“아니라니까요. 권 작가님, 그런 분 아니라고요.”

정 피디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런데도 소담 대표는 자꾸만 몰아붙일 뿐이었다.

“야, 내가 이 바닥에서 몇 년이냐? 수도 없이 많은 작가를 만나봤지만 돈 싫어하는 작가, 돈 더 준다는데 안 하겠다는 작가 본 적이 없다고. 고고한 척해도 결국 돈 앞에선 장사 없다니까?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아니라고요. 권 작가님은 다르다니까요?”

“참나, 다르긴 뭐가 달라? 솔직히 그동안 돈 많이 주니까 한 거지, 무슨 웹드라마 찍으면서 예술 할 생각이었겠어? 다른 쪽에서 찔러 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꼬셔야 한다니까?”

정 피디가 숨을 고르며 입을 연다.

“대표님, 솔직히 이렇게 막무가내로 PPL 넣으면 작품 망가진다고요. 이제 막 이름 알린 권 작가님 입장에선 큰 오점이 남는 건데, 왜 이렇게 무리하시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라고. 우린 권 작가 설득해서 최대한 이익만 많이 내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해?”

“하... 대표님...”

순간 말문이 막힌다.

돈으로 찍어 누르려는 대표의 말에 정 피디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하아, 아무튼 전 설득 못 해요. PPL 떡칠하면 작품 망할 거 뻔히 아는데 그걸 어떻게 하자고 해요?”

완강한 정 피디의 반응에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야, 이 바닥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무조건 되게 해야지? 군소리 말고 이번 주 중으로 권 작가 불러서 잘 설득해. 알았어?”

대표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는 휙 자리를 떠버린다. 홀로 남은 정 피디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내가 그만두든지 해야지.’

그러나 쉽지 않았다.

웹드라마를 몇 편 성공하긴 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엔 아직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기엔 현실적인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미치겠네, 정말...’

끝이 없는 고민에 정 피디의 한숨만 깊어진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정 피디 앞으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누구지?’

휴대폰을 꺼내 발신 기관을 확인한 정 피디의 눈이 커진다.

[(주)타이거 스튜디오 인사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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