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satisfying - 만족감을 주는 (2)
40.
***
성북동에 위치한 한옥.
정영만 회장은 너른 툇마루에 앉은 채 소박하게 차려진 몇 가지 찬을 안주 삼아 탁주를 걸쳤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이 운치를 더했다.
잠시 뒤,
전화를 끊고 돌아온 송 교수가 맞은편에 앉는다.
“서준이도 시간 괜찮다고 했습니다.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네. 자, 한잔하지.”
정 회장이 탁주를 따라주자 송 교수가 고개를 돌려 들이킨다.
텁텁하면서도 구수한 맛에 송 교수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회장님댁에서 마시는 술은 유난히 맛이 좋은 거 같네요.”
“원래 좋은 사람과 마시는 술은 언제나 맛있는 법이지. 지금처럼 말이야.”
정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단번에 사발을 비워낸다. 마치 시골 촌부처럼 정감 가는 미소.
그러나 이내 표정이 진지해진다.
“자네, 그 친구한테 거는 기대가 남다른 모양이야? 듣기로는 주 편집장한테도 얘기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눈빛도, 표정도 조금 전과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송 교수의 태도도 짐짓 진지해진다.
“네, 이전에 서준이 작품을 한번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봤는데, 훌륭하더군. 쉽게 쓴 듯 보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알맹이가 꽉 찬 느낌이었어.”
정 회장의 말에 송 교수도 동의했다.
“부러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못 이룬 꿈을 이룰 수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고요.”
듣고 있던 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처럼 신중한 사람이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천재라고 해도 되겠군.”
의도가 담긴 질문.
그러나 송 교수의 대답엔 주저함이 없었다.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정 회장의 눈빛이 깊어진다. 송 교수는 결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웬만한 일로 확신에 차서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의 대답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나 역시 관심이 가는군. 허나, 솔직히 이 바닥에 천재다, 신성이다, 주목받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지 않은가?”
정 회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의 말대로 심심할 때마다 쏟아지는 게 천재 작가의 등장이라는 타이틀이었으니까.
그러나 대부분은 시원찮았다.
누군가의 제자.
혹은 어느 파벌의 자녀.
언론과 문학계 인사들이 마케팅을 통해 만들어낸 허상이 대부분이었다.
“안타까운 건 진짜 천재는 또 그 불길이 너무 빨리 사그라진다는 거지.”
천재가 살아남기에 이 세상은 적합하지 않았다.
빨리 두각을 드러내면 영감이 쌓이기도 전에 쏟아내느라 소모되기 일쑤였고, 늦게 두각을 나타내면 인맥이 없어 성공하기 힘들었다.
‘작품 자체만으로 성공하기 힘든 게 이 바닥이니까.’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이 쏟아지는 업계에서 곱씹어 봐야 하는 순수 문학은 독자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어느 유명한 작가의 제자다, 어느 유명한 인사가 추천했다 등등 최근 기사에 이름이 오르내려야 간신히 주목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번번이 실망스러운 작품이 쏟아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타 장르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
웬만한 공모전은 이미 곪아버린 상태이기에 실질적으로 작품만 가지고 성공하기엔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물론 난 그런 재능을 가진 작가들을 찾아서 빛을 보게 해주고 싶네.”
가만히 듣고 있던 송 교수가 고개를 든다.
“그게 바로 저였잖아요.”
정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출판사를 차린 이후 가장 잘한 일이기도 하지.”
인맥 하나 없는 송 교수를 발탁한 게 바로 정 회장 자신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이후로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재능이 있는 자는 쉽게 변질했고, 누구도 눈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가 더 기대되는 군.”
빈 수레인지, 속이 꽉 찬 놈인지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술잔을 채우는 정 회장의 손길엔 설렘과 염려가 반반씩 담겨 있었다.
***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나는 며칠째 집 밖에 나가는 시간도 아낀 채 글을 썼다.
그저 내 감각을 잔뜩 끌어낸 채 솟구치는 대로 받아 적은 글이었다.
거칠었지만, 그래서 살아있었다.
특히 할머니와의 추억이 잔잔히 쌓이면서 이야기가 깊어졌다.
글감은 충분히 준비된 상태.
그러나 더 맛깔 나는 작품을 위해 잠시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적당히 숙성될 때까지 머릿속에서, 그리고 가슴 속에서 갈고 닦아야 했다.
이른 아침.
커튼을 치자 햇볕이 방안으로 쏟아진다.
그 뒤로 펼쳐진 숲에선 은은한 여름의 기운이 전해진다.
나는 가뿐히 몸을 일으켜 가벼운 옷차림으로 뒷산을 올랐다.
‘산책을 좀 해야겠어.’
자고로 작가란 쓰지 않는다고 해서 쉬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그 세상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으니까.
모처럼 오른 뒷산.
한여름의 산엔 생기가 가득했다.
바람 사이로 속삭이는 새 소리, 코끝을 간질거리는 알싸한 나무 향기, 그늘 사이로 반짝이는 빛줄기까지.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있어 보물섬과 같았다. 볼수록 새롭고, 바라볼수록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산 중턱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눈을 감는다.
오감을 활짝 열어 이 계절이 주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고요해지는 주변.
나직해지는 감각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들려오는 만물의 소리.
나는 불같이 타올랐던 전날 밤의 열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감정을 정돈한다.
매섭게 타올랐던 글감들이 적당한 온도로 식어간다. 새빨갛던 글감들이 이내 하나둘씩 제 색을 찾아간다.
주제에 맞게,
등장인물에 맞게,
각자의 사연에 맞게,
운명처럼 조각이 착착 들어맞는다.
‘그래, 이 느낌이야...’
내가 창조한 또 하나의 세상.
그 속에서 각자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나를 흐뭇하게 만든다.
“후우...”
나는 차오르는 감동을 차분히 눌러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내려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쓰고 싶었다.
‘참, 그러고 보니 내일이었지.’
정 회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
나는 모처럼의 운동을 즐기며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
말복이 지난 금요일.
나는 오랜만에 송 교수와 만났다.
송 교수는 직접 우리 집까지 나를 태우러 왔다.
“서준아, 너 혹시 정영만 회장님에 대해서 들어봤니?”
“문학계의 피카소로 불리는 분 아닌가요?”
“맞아. 그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애초에 한국 문학 계보에 대해선 꿰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정영만 회장에 대한 내용은 이번에 알게 된 정보였다. 약속에 맞춰 그의 작품과 개인적인 정보에 대해 확인한 상태.
“만나 뵙기 전에 알아두는 건 예의일 거 같아서 좀 찾아봤어요.”
“아, 그랬구나. 잘했다. 미리미리 준비해 두면 대화를 이어가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까.”
송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연한 미소 속에 담긴 건 대견함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정 회장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권위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열아홉 살에 등단하고, 그 이후엔 선보이는 작품마다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 문학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해서 문학계의 피카소로 불리는 천재 작가고...’
지금도 정 회장의 작품은 교과서에 실려 수능에 출제되고 있었다. 몇몇 여론 조사에 의하면 현존 작가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항상 순위권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혹시 정 회장님과 어떻게 아시는 사이신가요?”
“아무것도 없는 나를 도와주신 분이지. 그 덕에 글을 쓸 수 있었고... 내겐 은인과도 같은 분이야.”
말투와 표정에서 특별한 인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인가?
두 거장의 첫 만남이 어땠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아주 재미있겠어.’
창작자와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한 우주를 창조해낸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니까.
서울을 빠져나가는 도로 위.
시대를 아우르는 거장과의 만남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
약속장소는 양평 근교에 위치한 토종닭 전문점이었다.
“정영만이네.”
“처음 뵙겠습니다. 권서준입니다.”
정 회장은 악수하며 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마치 내 내면을 살피려는 듯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그래, 자네 얘기는 송 교수한테 많이 들었어.”
정 회장의 말에 송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경치가 좋은 정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하게 차려진 백숙과 갖은 반찬이 맛깔스럽게 펼쳐져 있다.
“늦더위 몸보신에 이만한 게 없거든.”
백발에 푸근한 인상. 환한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다정다감한 애티튜드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나이를 넘어 영민한 기운을 풍겼다.
‘역시, 한 분야에서 큰 자취를 남긴 사람은 다른 건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깊이 있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백숙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대부분 정 회장과 송 교수의 대화였고, 나는 주로 듣는 처지였다.
시간이 갈수록 대화는 문화, 예술을 넘어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갔다.
“예술은 인간의 현실을 담을 수밖에 없지. 고로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져서는 그 의미를 찾기 어려워.”
전생에도 수많은 예술가들과 숱하게 토론했던 내용이었다.
따지고 보면 크리스토퍼 말로의 답답함도 그랬고.
그런데 그때, 정 회장의 시선이 송 교수가 아닌 나를 향한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쏟아진 정 회장의 질문.
“...”
순간 나보다 더 긴장하는 송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혹시 내가 정 회장 앞에서 실수할까 봐 불안한 거겠지.’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닌 그게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정 회장의 질문은 꽤나 수준이 있었다.
얕은 지식으로 말하면 가벼워 보이고, 어설프게 아는 척했다가는 오히려 비웃음을 살 수 있었다.
빈 수레인지 확인하려는 심산.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주눅이 들 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달랐다.
‘마치 무대 한가운데 선 기분이야.’
나도 모르게 기분이 고양된다. 나를 향한 의심이 짙어질수록 오히려 짜릿함이 배가된다.
그리고, 충분히 관객의 시선이 집중된 지금, 첫 대사를 읊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정제된 호흡과 함께 나지막한 울림이 입 밖으로 전해진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작품은 들뜬 공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다만, 무엇보다 균형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정 회장의 미간이 살짝 모인다.
“균형감이라, 어떤 걸 의미하는 거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의 감성까지 함께 반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찬 목소리에 정 회장이 관심을 보인다.
불필요한 행동은 삼간 채 나는 곧바로 답변을 이어갔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뚜렷하면 자칫 예술성은 사라지고 메시지만 남는 연설문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적절한 예라면 제가 이번에 주인공으로 쓴 크리스토퍼 말로와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들 수 있겠네요.”
듣고 있던 정 회장의 눈빛이 깊어진다. 턱을 쓸어내는 손길에선 거장의 짧은 사색의 시간이 느껴진다.
“자네 말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균형감이 좋았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사실 그 당시엔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이 훨씬 더 인기를 끌었으니까요.”
듣고 있던 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동의할 수밖에 없군.”
정 회장과 나의 결론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결국 문학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대한 메시지와 함께,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감성들이 융합과 분열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문학이 가지는 본연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정 회장이 가만히 나를 보며 수염을 쓸어내린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를 향한 의심이 걷히는 게 눈에 보인다.
“좋군. 확고한 신념이 아주 보기 좋아.”
이내 정 회장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자네, 내 술 한잔 받겠나?”
많은 것들이 생략된 대화였다.
그러나 정 회장의 기분을 읽기엔 충분했다.
행간의 흐름을 읽는 건 내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대답 대신 술잔을 내밀었다.
잔을 받느라 자연스럽게 정 회장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받은 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따끔하면서 구수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 회장도 이내 시원하게 술잔을 비워낸다.
그제야 바짝 올라갔던 송 교수의 어깨도 천천히 내려온다.
‘긴장하실 필요 없다니까.’
긴장한 송 교수의 모습이라.
좀처럼 보기 힘든 상황이라 재미있었다.
한층 더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술기운이 적당히 돌자 자연스럽게 정 회장이 묻는다.
“혹시, 자네 지금 집필 중인 작품이 있나?”
“네, 쓰고 있는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소설이라고?”
정 회장은 조금 놀란 듯 송 교수를 바라본다. 그러나 전혀 그 사실을 몰랐던 송 교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정 회장은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조금 전과 달리 진지해지는 눈빛.
정 회장이 내건 제안은 뜻밖이었다.
“가을에 있을 우리 공모전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