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42화 (42/203)

# 42. satisfying - 만족감을 주는 (4)

42.

***

며칠 뒤.

출근한 정은미 피디는 오늘도 노트북을 편 채 한숨을 푹 내쉰다.

며칠 전에 도착한 메일 한 통 때문이었다.

[(주)타이거 스튜디오 인사팀입니다]

정은미 피디님 안녕하십니까.

(주)타이거 스튜디오 인사 담당자 고혜란입니다.

제안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소속 : 타이거 스튜디오 제작팀.

-근무지 : 강남 본사.

-Type : 정직원 (3개월 수습 기간 후 정직원 전환)

-업무 : 드라마 제작 관련.

기타 업계 상위 연봉과 처우, 그리고 복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회신해 주시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갑작스럽게 받은 메일 한 통.

그토록 꿈꾸던 이직 제의 메일이었다.

그것도 국내 최대 규모의 제작사인 타이거 스튜디오의 스카우트 제의.

‘그래, 지금이라도 정리하는 게 맞아...’

그런데 막상 일을 그만두려고 하자 자신도 모르게 주저하게 된다.

더 크고 좋은 회사임에 분명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건이나, 안정적으로 일했던 곳을 박차고 나가려니 두려움이 밀려든다.

특히 무서운 건 그곳에서의 경쟁이었다.

‘그 뛰어난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나 잘할 수 있을까?’

새로운 도전 앞에 모든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 두려움이 워낙 크다 보니 그냥 이대로 소담에서 안주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도 회신하지 못한 메일.

기한은 오늘까지였다.

***

이른 아침.

나는 가볍게 산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신선한 공기.

푸르른 숲길이 주는 상쾌함.

눈부신 햇살처럼 서서히 차오르는 영감.

커피 한 잔과 함께 집필에 대한 욕구가 솟구친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오수정 대리에게 연락이 온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좋은 아침입니다.

막 무르익기 시작한 영감이 흩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굳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통화를 이어갔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오 대리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한 건 용건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 용건은 내가 며칠 전에 요청한 정 피디에 관련된 일일 게 분명했고.

우리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혹시, 정 피디님 쪽에 문제가 생겼나요?”

내 질문에 오 대리의 목소리가 살짝 잠긴다.

-그게 저희 쪽에서 계속 연락을 드리고, 한 차례 미팅까지 했는데... 정 피디님께서 많이 고민하시는 모양이에요.

“혹시 안 하겠다고 했습니까?”

-그건 아닌데... 답장이 없네요. 전화를 드려도 생각해보겠다는 말씀만 하시고...

정 피디는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저희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 테니까요.

오 대리는 몇 번이나 의지를 보이며 통화를 끊었다.

그러나 언뜻 생각해도 정 피디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고?

애초에 그런 성격의 사람이니까.

‘독선적인 소담 대표 밑에서 작품 하나 못하면서도 몇 년을 버틴 사람이야.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직보다는 익숙한 곳에서 안주하기 쉬운 타입이지. 그게 비록 시궁창 같은 곳일지라도.’

그러나 미니시리즈가 꿈인 정 피디에게 소담 프로덕션은 너무 작은 회사였다. 돈만 밝히는 대표 밑에서 꿈을 펼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주저하기엔 시간이 아까운데...’

신중함도 지나치면 오히려 기회를 놓치게 되는 법.

적절한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정은미 피디였다.

***

늦은 오후.

“잘 준비했지? 권 작가,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압박하는 소담 대표 때문에 정 피디는 온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잠시 뒤,

권서준 작가가 찾아왔다.

“어이고, 어서 오세요 작가님.”

소담 대표가 오버하며 권서준을 맞이한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한 정 피디는 마지못해 인사를 할 뿐이었다.

“잘... 지내셨죠? 작가님?”

“네, 덕분에 잘 지냈죠. 근데 어디 편찮으세요? 정 피디님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요?”

역시나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대표가 얼른 끼어든다.

“요즘 정 피디가 좀 바빠서요. 뭐해, 작가님 바쁘신데 얼른 설명해 드리지 않고.”

“...”

정 피디가 머뭇거리자 대표가 펜으로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정 피디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게... 다음 작품을요...”

순간 말문이 막힌다.

아닌 걸 알면서 제안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도 억지로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다.

‘이건 아니잖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째려보고 있던 대표가 얼른 정 피디를 밀어내며 대화에 끼어든다.

“아, 오늘 정 피디가 컨디션이 영 별론가 보네요. 제가 설명해 드리죠.”

대표가 자세를 잡더니 분위기를 잡는다.

“다름이 아니라 분위기 좋을 때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다음 작품이요?”

“네, 작가님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 바로 들어가면 조회 수 확 빨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PPL을 넉넉히 넣으면 원고료도 꽤 챙겨드릴 수 있고요. 자, 이거 한번 보시죠.”

소담 대표는 재빨리 계약서를 내밀었다. 고민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몰아붙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PPL 개수가 많긴 하지만 원교로는 섭섭하지 않으실 겁니다.”

회당 원고료가 무려 800만 원.

사실 소담 대표 입장에선 정말 큰맘 먹은 투자였다.

“와...”

아니나 다를까.

금액을 확인한 권서준의 눈이 커진다.

자연스럽게 소담 대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순간 정 피디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아까 대표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돈 몇 푼 쥐어 주면 환장해서 한다니까? 봐봐, 내 말이 맞나 틀리나?’

대표는 아마 자기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좋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긴,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고민하는 것 역시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과 비슷한 길로 가는 권서준을 바라보는 정 피디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난 권 작가님의 온전한 작품이 보고 싶다고...’

본인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권서준의 새로운 도전을 바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어떡하겠어.

그게 솔직한 심정인걸...

피디로서, 한 명의 시청자로서 갖게 되는 바람이었다.

그때, 이미 결정 났다고 생각했는지 대표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꼰다.

“그럼, 이대로 계약 하시는 거죠?”

흐름상 대답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정 피디의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대표의 술수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나라도 말려야 해.’

참다못해 정 피디가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 입을 떼려 했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그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뇨. 안 할 겁니다.”

“...네?”

소담 대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그러나 권서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차갑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제 웹드라마는 그만할 생각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어서요.”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

정 피디, 그리고 소담 대표의 눈이 동시에 커진다.

“아니, 그래도... 이번 작품만 하고 가시죠? 이미 고정 팬도 있어서 한다고만 하시면 제법 큰돈이 될 수도 있는데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것저것 더 경험해보고 싶은 게 많아서요.”

정중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대표의 얼굴엔 오히려 음흉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 이제야 알겠네. 작가님,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거죠?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그럼 제가 특별히 천만 원까지 올려드리겠습니다.”

말한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저런 해석이 나올 수 있을까.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권서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차가운 말투로 자기 생각을 전한다.

“그동안 이런 식으로만 일하셨나 봐요?”

“...네?”

“말씀하신 PPL이 다 들어가려면 이건 웹드라마가 아니라 종합 광고 수준이에요. 근데 그걸 저보고 하라고요?”

“...”

정곡을 찔린 소담 대표의 말문이 막힌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서준은 차분하게 할 말을 이어간다.

“죄송하지만 작품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곳과 더 이상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당장의 돈보다는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제겐 더 간절하니까요.”

“...”

“뭐, 그 돈이면 하겠다고 할 사람은 많을 테니, 다른 작가 찾아보시는 게 좋겠네요.”

권서준은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일말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

“...”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정 피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언제나 자신이 외치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현실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새롭게 도전하느냐.

어쩌면 권서준의 상황은 정 피디의 상황과 비슷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생각만 하면서 주저했다면, 작가님은 직접 행동하고 도전을 선택했어...’

단호하게 도전을 향해 나아가는 권서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멋있다...’

경력과 나이를 떠나서 그 결단력이 대단해 보였다.

곱씹을수록 권서준이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하게 날아와 가슴을 두드린다.

도전.

성장.

기회.

쿵쿵쿵.

그 둔탁한 두드림은 이내 정 피디의 가슴을 옥죄었던 얼음마저 깨버렸다.

‘그래...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쉽지 않은 길이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것보다 도전을 택하는 게 맞았다.

‘더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서...’

철컥.

그 사이, 시원하게 한 방 날린 권서준이 쿨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저, 저게 미쳤나? 대접해주니까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화가 잔뜩 난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움찔하며 눈치를 봤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왜요, 멋있잖아요. 당장의 이득보다는 더 큰 목표를 위해 과감히 도전하는 모습이.”

“야, 너까지 미쳤어? 왜 이래?”

대표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연스럽게 정 피디를 향한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의 정 피디가 아니었다.

“네, 미쳤나 봐요. 미친 김에 칼춤 한 번 더 춰드릴게요.”

정 피디는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사표요.”

입사한 지 한 달째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미친년은 오늘부로 그만두겠다고요.”

“...”

순간 소담 대표의 입이 떡 벌어진다.

저 표정, 얼마나 보고 싶었던 표정이었는지.

뻥.

순간 정 피디의 귓가엔 사이다 뚜껑 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회당 천만 원.

분명 좋은 조건이었지만, 미니시리즈 시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제안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웹드라마에선 더 이상 아쉬움이 없으니까.’

이미 끝을 본 장르에서 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아직도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너무 많았다.

물론 정 피디도 마찬가지 일터.

나는 일부러 소담 대표에게 말하는 척하며 정 피디를 자극했다.

그리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저, 저기요. 권 작가님!”

나는 허겁지겁 내 뒤를 따라온 정 피디와 함께 근처 카페로 향했다.

정 피디는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말렸는데도 대표가 워낙 막무가내라...”

“아닙니다. 딱 적당할 때 잘 마무리한 거 같아요.”

굳이 그 좁은 물에서 계속 놀 생각이 없었다. 내 말에 정 피디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잘하셨어요. 혹시나 계약하실 생각이면 말리려고 했거든요. 아마 과도한 PPL 때문에 작품만 망가졌을 거예요.”

정 피디는 끝까지 작품에 대해 염려해주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수많은 동료를 만나 협업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역시 기회만 잡으면 좀 더 클 수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내 입장에서도 도움이 될 미래의 포석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선 좀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회사는 그만두신 거죠?”

내 말에 정 피디가 눈을 크게 뜬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 피디님처럼 창의적인 사람과 어울리는 회사는 아니었으니까요. 마침 세 작품 연달아 좋은 성적 거뒀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어요.”

정 피디가 혀를 내두른다.

“하, 정말 작가님 나이가 믿기지 않네요. 누가 보면 저보다 한참 위 연배인 줄 알겠어요.”

물 한 모금을 마신 정 피디가 다시 말을 잇는다.

“여태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죠. 솔직히 권 작가님 작품만 아니었다면 벌써 그만뒀을 거예요.”

정 피디의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감정적인 부분이 많이 해소되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고민이 많았거든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정 피디가 먼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직접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지금, 타이거 스튜디오 이직 문제로 고민이신 거죠?”

내 말에 정 피디가 눈을 크게 뜬다.

“그,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내가 되묻자 정 피디의 눈이 커진다.

“설마... 작가님이 연결해주신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순간 정 피디의 입이 떡 벌어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