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swagger - 뽐내며 걷다 (3)
32.
***
월요일 오후.
박성규 교수는 초조한 마음에 자꾸만 커피잔을 매만졌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학교에 오자마자 연구실에 들르라고 했는데 권서준은 아직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박 교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서준이니?”
박 교수가 벌떡 일어나며 묻는다.
그 바람에 가지런히 넘긴 2:8 가르마가 흐트러진다.
“네, 교수님.”
“흠, 흠. 들어와라.”
박 교수는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아 머리를 정돈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마시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는 권서준을 바라본다.
“이번에 낸 과제 때문에 불렀다. 보니까 수준이 나쁘지가 않아.”
“하아. 정말요? 다행이네요.”
박 교수의 한 마디에 권서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역시나 어리바리한 학부생일 뿐이었다.
박 교수는 넌지시 입을 뗀다.
“그런데, 전개나 캐릭터에 있어서 조금 아쉬운 점이 눈에 띄더라고. 그래서 내가 좀 도와줄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정말요?”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표정이 밝아진다.
‘자식, 순진하긴.’
박 교수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살짝 꺾었다.
“인마, 뭘 그렇게 놀라? 교수가 학생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선생님께선 외부 일정이 많아서 따로 학부생 과제를 봐주신 적이 없었잖아요?”
“...”
녀석이 갑자기 정곡을 찌른다.
박 교수의 표정이 다소 어색해진다.
“흠, 흠. 내가 좀 바쁘기는 한데, 그래도 넌 특별히 도와주는 거야.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슬쩍 윙크를 건네며 생색도 내본다.
그런데...
정작 녀석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덥석 물어도 시원찮은데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뭐 하는 거야? 빨리 고맙다고 넙죽 인사하지 않고.’
그렇다고 다그칠 순 없었다.
그것만큼 속내를 드러내는 행동도 없으니까.
그러나 지나치게 태연한 권서준의 반응 때문에 오히려 박 교수의 입안이 바싹 말라간다.
그리고 그때,
권서준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관심과 호의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제야 박 교수의 안색이 밝아진다.
그런데 곧이어 반갑지 않은 세 글자가 뒤따라 붙는다.
“그런데, 이미 봐주시기로 해주신 분이 있어서요.”
“...뭐?”
예상치 못한 전개에 한껏 웃던 박 교수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녀석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일어나 연구실 밖으로 나간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에 박 교수는 권서준을 말릴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복도로 향했다.
어떻게든 작품을 잡아야 했다.
다행히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권서준의 모습이 보인다.
“서, 서준아. 권서준!”
박 교수가 다급히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지이잉.
그런데 그 순간, 권서준의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녀석이 기다린 전화인 듯 주저 없이 받는다.
“네, 감독님. 권서준입니다. 네, 도착하셨다고요? 전 지금 연구동 쪽입니다. 네, 네. 그럼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복도를 타고 들리는 통화내용.
권서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가 박 교수의 심기를 건드린다.
‘감독? 지금?’
순간 묘한 불안감이 박 교수의 몸을 휘감는다.
잠시 뒤,
녀석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박 교수가 다급히 물었다.
“서준아, 혹시 조금 전에 누구랑 통화한 거니?”
“아, 좀 전에 말씀드린 제 연극 대본을 봐주신다는 분이요.”
“너 설마, 다른 사람한테도 그 대본을 보여준 거야?”
“네, 관심 있다고 먼저 연락을 주셔서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권서준이 의아한 듯 쳐다본다.
박 교수는 최대한 침착한 척 애를 쓰며 말을 이어간다.
“그, 그러니까 서준아, 다른 게 아니라 너 그거 잘 알아보고 결정해야 해. 괜히 이상한 사람들하고 엮이면 작품만 뺏긴다고. 이 바닥이 얼마나 무서운지 네가 몰라서 그래.”
“흠. 그럴 분은 아닌 거 같던데...”
“인마, 사기꾼이 사기꾼이라고 써 붙이고 다녀? 그러니까 나한테만 말해봐. 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
되묻는 말투가 다급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안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 이, 이 사람은...’
박성규 교수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감각 좋은 연출가이자 공연계에선 내로라하는 유명인이었으니까.
“...혹시 서미연 감독?”
“어? 안녕하세요. 박 교수님.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뒤늦게 박 교수를 알아본 서 감독이 인사를 건넨다.
박 교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서 감독이 여기 있는 걸까?’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서 감독이 권서준에게도 인사를 한다는 점이었다.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못 참고 올라왔어요.”
대화의 뉘앙스가 이미 알고 있는 사이.
불길한 느낌에 다급히 박 교수가 입을 연다.
“두 사람이 혹시, 아는 사이야?”
“물론이죠. 제가 서준 군의 작품에 관심이 있어서 매달리는 중이거든요.”
“...뭐?”
박 교수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권서준을 봐도,
다시 서 감독을 봐도,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진짜라는 표정.
“...”
박 교수는 충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지켜보던 서 감독이 입을 연다.
“근데 두 분은 어떻게 같이 있어요?”
듣고 있던 권서준이 대신 대답한다.
“제 작품을 혹시나 안 좋은 사람들한테 빼앗길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걱정해주셔서요. 상담해주고 계셨어요.”
“아... 역시, 박 교수님 꼼꼼하시네요. 근데, 제가 남의 작품 뺏을 사람은 아니지 않나요?”
분위기상 피할 수 없는 질문.
박 교수가 마지못해 입을 벌린다.
“그거야... 그렇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박 교수의 입 모양이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저희는 할 얘기가 있어서. 권 작가님, 이만 가실까요?”
“네.”
자연스럽게 서 감독이 앞장서자 권서준이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저, 저기...”
박 교수의 손이 한발 늦게 두 사람을 향한다. 그러나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
“하아...”
연구실 복도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박 교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건 마치 다 된 밥에 재를,
아니, 밥솥 자체를 빼앗긴 사람의 표정이었다.
***
우리는 연구동을 나와 교내 카페로 이동했다.
자리에 앉자 서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성규 교수님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원래 아시던 사이였나요?”
“네, 뭐 이 바닥이 좁다 보니 두루두루 다 알게 되거든요.”
뉘앙스가 그리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제 작품을 봐주신다고 하셔서요.”
“아... 아직도 그러시는구나.”
서 감독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예전에도 그런 적 있었어요. 대학원생들 작품에 은근슬쩍 숟가락을 올리는 경우 있잖아요. 공모전 같은 데에 당선되면 상금 바치는 학생들도 있었고요.”
“정말요?”
“네. 등단이나 수상 경력이 간절한 대학원생들에겐 그것조차 기회니까요. 아직도 그러실 줄은 몰랐는데...”
서 감독은 찝찝한 기운을 날려버리려는 듯 아이스커피를 시원하게 들이킨다.
“참, 그보다는 이제 우리 얘기할까요?”
순간적으로 눈빛과 목소리가 달라진다.
역시 업계 전문가다운 처세술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권 작가님의 작품을 꼭 해보고 싶어요. 이미 극단에도 말해놓은 상태고요.”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작가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단순히 학부생으로 대하던 서 작가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그 느낌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나 확인해야 할 건 꼼꼼하게 체크해야 했다.
“무명이나 다름없는 학부생의 작품이라 홍보에 아쉬움이 많을 텐데요. 그 문제는 해결 방안이 있으신가요?”
핵심을 짚은 질문에 서 감독의 눈이 다소 커진다.
“이쪽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네요. 맞아요. 극단에서도 사실 그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요.”
연극 시장이 어려워진 건 오늘내일의 일이 아니었다. 상황이 안 좋다보니 이미 검증된 유명작가의 작품이나 이미 대박 난 작품을 끊임없이 리메이크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신선함은 줄어들고, 관객들은 싫증을 느끼게 된 거지.’
악순환에 악순환이 더해진 상태.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작가님 작품은 오리지널 작품인데도 마치 오래된 명작의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고풍스러우면서도 신선함이 있어요. 저는 그 부분에서 희망을 봤고요.”
나는 서 감독의 말보다 눈빛에 집중했다. 아부와 진심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눈빛에 있으니까.
‘그래서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거지.’
서 감독의 눈빛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추가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집념과 열정이 함께 느껴졌다.
“추가로 계약조건 역시 섭섭하지 않게 가져왔습니다.”
서 감독은 작정한 듯 미리 가지고 온 계약서를 내밀었다. 엄청난 추진력, 나 역시 다소 놀랄 정도였다.
서 감독이 내민 계약서에 찍힌 계약금은 무려 3천만 원이었다.
희곡 공모전의 대상 상금이 100만 원 내외이고, 연극이 영화화될 때 팔리는 판권이 2천만 원 내외라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긴, 이게 한국 연극계의 현실이지.’
공연과 무대를 사랑하는 마음에 갖은 애를 쓰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빈곤의 틀 속에서 처절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문득 그 시절의 아픔이 떠오른다.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웠지만 오로지 무대에 대한 열망으로 버텨냈던 그 시절의 기억이.
“혹시 부족하신 가요?”
내가 생각에 잠기자 서 감독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뇨. 계약금 자체는 마음에 듭니다.”
“그럼... 고민하시는 게 뭐죠?”
“이 정도 금액이면 극단에도 무리가 갈 거 같아서요.”
“...”
정곡을 찔린 듯 서 감독이 순간 숨을 삼킨다. 그리고는 애써 쓴 미소를 짓는다.
“평소 지불하는 비용의 두 배이긴 하죠. 하지만 그만큼 이 희곡을 꼭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물론 그 의지와 열정은 좋았다.
그러나 내 고료 때문에 누군가의 출연료나 적당한 인건비가 삭감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그렇게 작은 극단 아니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단지 대본 하나에 3천만 원을 쓴다는 건 극단이 감당하기에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대신 내 머릿속엔 전혀 다른 방법이 떠오른다.
극단에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 이득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차라리 서로 부담을 덜 겸, 계약 조건을 조금 바꾸는 건 어떨까요?”
“...네? 조건을요?”
“네, 제가 계약금의 절반만 받겠습니다.”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서 감독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대신 러닝 개런티 조항을 넣는 거죠.”
“...”
서 감독의 표정이 순간 굳어진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서 감독이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진심이신가요?”
“물론입니다.”
“...”
갑작스러운 추가 조건에 서 감독은 말까지 아끼며 고민을 이어간다.
그러나 신중한 모습은 오히려 내 입장에서 플러스 요인이었다.
잠시 뒤,
서 감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건 제가 확답을 드릴 수가 없어서... 대표님과 상의해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상의해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눈빛에선 대본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물론이죠.”
“그럼 최대한 빨리 답변 드릴게요.”
서 감독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서둘러 카페를 나갔다.
아마 부리나케 대표를 찾아갈 게 뻔했다.
‘생각보다 고민이 될 거야.’
나는 다소 굳은 서 감독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연극계에서 러닝 개런티는 흔하지 않은 계약 조건이었다.
그나마 배우가 러닝 개런티로 계약하는 경우는 가끔 있었지만, 작가의 경우엔 매우 드문 케이스였다.
‘그만큼 작가와 대본의 가치가 저평가된 게 이 바닥이기도 하고.’
안타까운 현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러닝 개런티를 주장했다.
‘좋은 선례가 필요해.’
다른 사람이 아닌 추후 나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발판이었다.
그 발판을 나 스스로 만들 뿐이었다.
물론 저쪽에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히 박 교수만을 타깃으로 벌인 일이 아니니까.’
대본을 노리는 박 교수를 적당히 떨쳐내면서 동시에 서 감독에게도 은근히 압박을 주기 위함이었다.
‘경쟁자가 많다는 걸 확인했으니 아마도 마음이 급해지겠지.’
이 모든 건 어제 서 감독과 통화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마치 엔딩을 떠올리고 쓴 한편의 연극처럼.
지이잉.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정은미 피디였다.
-작가님, 정 피디입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실까요?
평소보다 훨씬 들 뜬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