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swagger - 뽐내며 걷다 (4)
33.
***
내 두 번째 웹드라마 작품.
제목 :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콘셉트 : 꿈같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악몽 같던 전 남친들이 한 번에 몰려온다.
줄거리는 간단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세 번이 전부인 삼수생 수아의 이야기.
첫 번째는 중3 때 사귄 짝꿍.
두 번째는 고2 때 만난 연하남.
세 번째는 재수생 때 만난 교회 오빠.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흑역사를 찍으며 이별하게 된 세 남자와의 기억.
‘내가 앞으로 연애하나 봐라!’
이별의 아픔을 딛고 삼수 끝에 드디어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다.
이젠 고생 끝 행복 시작.
기가 막힌 캠퍼스 생활이 시작될 거라 기대했는데...
이게 웬걸?
“어? 조수아?”
한 학번 과 선배는 동갑내기 전 남친이고.
“어? 수아 누나?”
새터 때 나란히 줄을 선 동기는 두 살 어린 전 남친이고.
게다가...
“너, 수아 아니니?”
대학원생이자 학과 조교는 교회 오빠.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미치겠다.
게다가 하나같이 왜 이렇게 멋있어 진 건데?
삼수하느라 찌든 자신과는 너무 비교 되는 전 남친들.
그런데, 그 전 남친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 모두 다시 수아에게 대쉬하기 시작한다.
과연,
수아의 캠퍼스 생활은 무탈할까?
소동극(騷動劇) 형식을 빌은 웹드라마 작품.
캐릭터도, 템포도, 하다못해 조연까지 맛깔스럽게 살린 웹드라마에 최적화된 대본이었다.
‘모든 게 깔끔했어.’
오죽했으면 소담 프로덕션에서도 한 번에 통과가 됐을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대본이 잘 나왔다고 웹드라마까지 잘 나오는 건 아니었다.
배우, 연출, 대본, 그 셋 중 하나가 해결됐을 뿐이지.
그러나 다행히 들뜬 정은미 피디의 목소리를 들으니 촬영은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작가님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막판 촬영과 편집으로 바꿀 텐데도 정은미 피디는 학교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늦은 오후.
수업을 마친 나는 학교 앞 카페로 향했다.
“여깁니다, 권 작가님!”
정 피디가 벌떡 일어나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일주일 내내 이어진 밤샘 촬영에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상태. 마주보기가 딱할 정도였다.
“제가 피디님 쪽으로 가도 되는데요.”
“아이고, 우리 귀한 작가님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죠. 제가 와야죠.”
성공이란 참 좋았다.
이렇게 대우가 달라지다니.
“촬영은 어떤가요? 잘 돼 가나요?”
“물론이죠. 대본이 좋으니까 아주 착착 진행되고 있어요. 이제 내일모레면 마무리될 것 같아요.”
정 피디의 얼굴엔 미소가 돌았다.
“요즘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니까요. 이 맛에 피디 하나 싶을 정도예요.”
피곤함조차 이기는 직업 만족도가 눈에 보인다.
“아 참, 이거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
정 피디는 두 손에 가득 들고 온 쇼핑백 세 개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이번에 제주도 촬영이 있었는데, 간 김에 작가님 선물도 좀 사 왔거든요.”
제주도 명품 소고기 흑우에, 흑돈, 게다가 천혜향과 각종 해산물 세트가 즐비했다.
“사양은 사양하겠습니다. 제 마음이니 꼭 받아주세요.”
나는 여기까지 직접 들고 온 정 피디의 정성을 생각해서 받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네요.”
“제가 더 감사하죠. 따지고 보면 다 잘 봐달라는 뇌물이니까요.”
피식 웃는 미소에서 아부가 아닌 진심이 느껴진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정 피디의 휴대폰이 울린다.
정 피디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좀 이따가 들어갈 거야.”
평탄한 대화.
그런데 갑자기 억양이 올라간다.
“뭐?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대표님이 갑자기 넣으신 거라고? 하아, 미치겠네. 일단 알았어.”
전화를 끊은 정 피디가 한숨을 내쉰다.
조금 전과 달리 표정이 심각해진다.
“무슨 일이죠?”
“아, 아닙니다. 그냥 작은 문제가 좀 생겨서...”
애써 웃었지만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씀해보세요. 무슨 문제죠?”
“하아, 그러니까 그게...”
몇 번이나 고민하던 정 피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희 대표님이 제주도에 있는 썬비치 리조트 PPL을 받은 게 있는데... 그걸 마케팅 직원이 누락했나 봐요. 근데 이미 로케이션 촬영은 다 끝낸 상태라... 하아.”
제작사 측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스케줄 잡기엔 시간이 부족할 거 같아서요. 솔직히 당장 배우들 스케줄 맞추는 것도 힘들고요. 위약금만 1억 원이라는데... 시간도 없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시간, 대본 수정, 일정.
모든 게 문제였다.
아직 다른 촬영도 남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제주도 촬영을 고집했다가는 남은 촬영 스케줄이 밀릴 수도 있었다.
창백해지는 정 피디의 표정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괜히 정 피디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다가 작품이 산으로 갈 수 있으니까.
작품이 산으로 간다는 건 결국 내 작품이 타격을 입는다는 소리였다.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도전이 오히려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었다.
‘다 된 밥에 재 뿌릴 순 없지.’
다행히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제가 한 번 대본을 수정해볼게요.”
잠시 화색이 돌던 정 피디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된다.
“그건 정말 감사한 데... 촬영 일정이 문제라서요. 당장 제주도를 갈 수도 없고...”
“뭐 꼭 가야만 홍보가 되는 건 아니죠.”
“...네? 그게 무슨...”
“한 번 믿어보세요. 아마, 씬 몇 개만 추가하면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
정 피디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껌뻑였다.
***
딱딱딱딱.
사무실에 돌아온 정 피디는 손에 쥔 볼펜을 튕겼다.
‘대체 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지?’
아무리 고민해도 권서준 작가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사무실에 돌아온 소담 대표가 정 피디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정 피디, 어떻게 된 거야? 제주도 로케이션은?”
“하아. 일단 기다려보세요. 작가님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으니까.”
“방법은 무슨 방법? 당장 가도 시원찮을 판에! 이거 위약금이 얼만 줄 알아? 자그마치 1억이라고!”
그걸 아니까 이렇게 고민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왜 본인이 실수하고 남 탓하는 건데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목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정 피디가 나직하게 대답한다.
“일단 대본 수정을 기다려보자고요.”
“수정이 무슨 의미야? 그냥 당장 가서 찍으라고!”
“일정이 안 되잖아요, 일정이. 주연 배우들 다 스케줄 있다고 하는데 어떡해요? 게다가 찍으면 뭐 해요? 편집할 시간도 없는데?”
“그럼, 어쩌자고? 이대로 1억 날리자고?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또, 또 남 탓.
꾹꾹 눌러 담은 화가 결국 터져 나온다.
“아니 지금 제 탓하시는 거예요? 애초에 대표님이 실수하신 걸 왜 제 탓하는 건데요? 제가 뭐 잘 못 했어요?”
정 피디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큰소리치던 대표가 슬쩍 눈치를 본다.
“아, 아니, 내가 또 언제 정 피디 탓을 했어. 그냥 답답하니까 하는 소리지... 하아.”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주무른다.
정 피디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두 사람에겐 답이 없었다.
지이잉.
그리고 잠시 뒤,
이메일 한 통이 도착한다.
‘왔다...’
[수정대본입니다.]
보낸 사람은 권서준 작가였다.
대체 어떻게 해결한다는 걸까?
촬영지도 안 가고 홍보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수많은 의구심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데...
수정 대본을 보자마자 정 피디의 얼굴이 활짝 갠다.
뭐야,
이런 방법이 있었다고?
“권 작가님은.... 진짜 천재다....”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 막내야! 촬영 나가자!”
“뭐, 뭔데? 해결책이 뭔데?”
“아, 비켜 봐요.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정 피디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었다.
해결책을 찾은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
이틀 뒤.
썬비치 리조트 강남 본사 홍보팀.
팀장은 출근과 동시에 업무부터 확인한다.
“가편집본 도착했어?”
담당 직원이 재빨리 대답한다.
“네, 좀 전에 받았습니다. 근데 조금 이상한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제가 대충 확인했는데... 저희 리조트가 한 번도 안 나오는데요?”
“뭐라고? 그럴 리가?”
팀장은 서둘러 영상을 확인했다.
빠르게 돌려보니 직원의 말대로 썬비치 리조트의 외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홍보팀장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떻게 된 건지 문의할까요?”
이건 문의 정도로 처리될 일이 아니었다.
다시 촬영하든, 위약금을 물리게 하든 강경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쪽에선 뭐래?”
“그게... 영상에 나오진 않지만 충분히 홍보 효과는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수정된 대본 체크해 보시면 아실 거라고...”
“수정 대본?”
그런데 그 순간,
홍보팀장의 눈에 추가된 씬이 들어온다.
원래 대본에는 없던 장면.
소담 측의 말대로 수정을 했다는 뜻이었다.
“혹시, 수정 대본도 함께 왔어?”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직원이 출력한 대본을 내민다.
가만히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팀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 23. 캠퍼스 뒷산 / N
학과 모임 후 술 취한 수아를 부축하면서 내려오는 진욱.
“아, 썬비치... 썬비치 가야 하는데...”
술 취한 수아가 주정을 부리자 진욱의 어금니를 지그시 문다.
“조용히 해라. 사람들 쳐다보니까. 누가 이렇게 취하도록 술 먹으래?”
그러나 인사불성인 수아는 손을 휘적거리며 진욱을 밀어낸다.
“놔, 놔! 나 썬비치 가야 한다고 이 멍청아...”
“아, 진짜! 대체 썬비치가 뭔데?”
화를 내는 진욱.
술 취한 수아는 그대로 벤치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취중 진담을 털어놓는다.
“수능 끝나면 너랑 가려고 했던 곳... 내 생애에 첫 여행이었는데...”
“나랑, 여행...? 무슨 여행?”
“아... 내 썬비치... 예약도 다 했었는데...”
아쉬워하는 말투 함께 감은 수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충격을 받은 진욱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그때,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하나가 떠오른다.
“설마...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그날?”
순간 진욱의 표정이 굳어진다.
대본을 읽던 홍보팀장의 눈빛이 깊어진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더욱 예리하게 빛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다니...’
수정된 대본을 보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공 수아와 전 남친들의 추억이 있는 씬 곳곳에 썬비치 리조트에 대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심어 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꽤 임팩트 있는 장면마다 자연스럽게 넣은 탓에 PPL 느낌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키워드처럼 여겨지는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보지도 않았는데 자꾸 썬비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남아...’
다시 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화할까요?”
상황을 모르는 직원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홍보팀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홍보는 제대로 될 거 같으니까.”
“...네?”
의아해하는 직원의 반응은 당연했다.
리조트 장면이 하나 없는데 홍보가 된다니 의아한 게 당연.
홍보팀장은 차분히 대본을 내려놓았다.
“영상으로 나오지 않지만 작품 속에서 주기적으로 썬비치 리조트가 계속 언급돼.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씬에선 특히 임팩트 있게 언급되고.”
세 남자친구 중 누구와도 가보지 못한 리조트.
그건 수아의 꿈이자 로망을 상징했다.
“게다가 엔딩에서 들뜬 표정으로 썬비치를 찾는 여주인공 때문에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각인이 되네. 그림 하나 없이 이렇게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게 쉬운 방법은 아닌데...”
썬비치.
그곳은 얼마나 멋있는 곳일까.
자연스럽게 시청자로 하여금 그 리조트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보지 못해서 더 궁금하고, 더 멋진 곳이라고 상상하게 만드는 연출.
시청자들의 뛰어난 상상력을 이용한 훌륭한 홍보였다.
‘자연스럽게 몰디브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말이지...’
어설프게 흐릿한 배경으로 나오는 것보다 몇 배는 효과가 좋아 보였다.
그 순간, 고개를 끄덕이던 홍보팀장의 눈빛이 또 한 번 빛이 난다.
“만일 웹드라마 흥행하면 바로 카피 붙여서 홍보해. 주인공 수아가 남친과 그토록 가고 싶었던 썬비치라고.”
주 시청자인 2, 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업무 지시를 마친 홍보팀장은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작품뿐만 아니라 PPL 업체의 마케팅 전략까지 스케치해주는 실력이 평범한 작가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이 작가... 대체 누구지?’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긴다.
단순히 업무를 뛰어넘은 시청자로서의 기대감이었다.
***
며칠 뒤.
정 피디가 환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작가님! 작가님 말씀대로 바로 오케이 떨어졌습니다.”
내 예상대로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 담당자라면 내 의도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해결책을 내신 거죠? 정말 감탄만 나오네요.”
정 피디가 연신 혀를 내두른다.
나는 그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있었다.
문제를 풀었으니 남은 건 성적표였다.
“이번 작품, 성적은 어느 정도 예상하시나요?”
나는 본론적인 부분을 짚었다.
내가 가장 관심 두는 부분이기도 하고.
물론 제작자로써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 있었다.
그런데,
정 피디의 눈빛은 오히려 영롱하게 반짝인다.
며칠 동안 밤샘 편집 작업을 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생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 피디의 대답이 이어진다.
“그야 당연히, 역대급이죠.”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그래.
그건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내 두 번째 웹드라마 작품인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