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swagger - 뽐내며 걷다 (2)
31.
***
지이잉.
지이잉.
복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얀 종이를 토해낸다.
그 앞엔 이미 출력된 대본 한 부를 들고 있는 서미연 감독이 서 있었다.
그녀가 읽는 건 바로 권서준의 희곡.
읽어 내려가던 서미연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진다.
일반 문학이 글자를 매개로 독자와 직접 만난다면 희곡은 전혀 성격이 달랐다.
‘공연을 목적으로 한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이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어.’
그 때문에 희곡을 쓸 땐 애초에 연극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함께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에 대한 고려가 함께 수반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완벽하잖아?’
물리적 제약이 높은 한정된 무대 위에서 펼치는 상상력의 수준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특히 제한된 상황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세계 전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은 감탄만 나왔다.
자연스럽게 연출가인 서미연의 머릿속엔 이미 그 세계가 완벽하게 그려진 상태.
‘이건 아무리 봐도 학부생 수준이 아니라고...’
자신이 직접 영국으로 날아가 섭외하려고 했던 작가들보다도 오히려 한수 위의 실력이었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해.’
서미연 감독은 마음을 굳힌 채 대본 뭉치를 들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자, 다들 모인 거야?”
주요 스태프와 주연 배우들이 모인 자리.
서미연을 보자마자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니, 좋은 작품 얻어오라고 했더니 웬 무명작가 작품을 가져오면 어떡해요?”
극단 소속 배우인 이경민 배우가 말한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나도 문창과 학부생 작품을 들고 회의할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배우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작품 하나 잘못 선택했다가는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을 테니까.
안 그래도 안방극장을 노리고 있는 이경민이라 그 부담감이 더욱 큰 상태였다.
“자, 자. 다들 진정하고 나 믿고 한 번 봐봐요. 일단 보고 말하자고요.”
결과물이 출중한데 굳이 말로 기 싸움할 필요가 없었다. 서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복사한 대본을 나눠줬다.
“하아...”
이경민이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대본을 든다. 뒤를 이어 스태프들도 대본을 든다.
“응?”
순간 이경민이 눈을 깜빡이더니 상체를 숙인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
“...”
어느 순간부터 회의실 안이 고요해진다.
배우, 스태프, 딴죽 걸던 이경민까지 어느새 작품에 빠져든 모습.
문득, 자신이 송 교수 앞에서 희곡을 읽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내 모습도 이랬을까?’
왜 송 교수가 그런 미소를 지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미 답은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서미연은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와 휴대폰을 꺼냈다.
수신자는 당연히 권서준이었다.
***
나른한 일요일 오후.
과제를 마친 뒤 나는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며 기지개를 켰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됐네.’
창밖으로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잡은 장현웅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지이잉.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서미연 감독이었다.
-안녕하세요. 서미연 감독이에요. 저 기억하시죠?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어느 정도 기다렸던 것도 사실이고.
“물론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보내주신 희곡 말이에요.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캐릭터와 위트 있는 전개는 그야말로 감탄만 나오더라고요.
런던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반응이었다. 그때 어조가 경쾌했다면 지금은 한없이 공손한 모습이었다.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음. 그래서 그런데 혹시 오늘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희곡과 관련해서 의논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차분한 어투였다.
그러나 나는 지난번과 달라진 서 감독의 호흡 템포가 느껴진다.
다소 초조한 듯 미세하게 빨라진 호흡.
덕분에 안달 난 감정이 고스란히 읽힌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이미 칼자루는 내가 쥔 상황.
그렇다면 굳이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하게 약속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죄송한데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언제가 괜찮을까요?
“음.”
나는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원래 대화라는 건 적절한 여백이 있을 때 텐션을 높이는 법이니까. 물론 희곡 속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주말엔 과제가 좀 많아서요.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
휴대폰 너머로 찰나의 침묵이 흐른다.
그건 아쉬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물론이죠. 다만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은 제 마음만 좀 헤아려 주세요.
서미연은 나를 재촉하지 않고 기분 좋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역시 위트가 있네.’
사람을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배우, 스태프, 작가까지 다뤄야 하는 총괄디렉터로써의 강점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괜히 42주 연속 매진을 기록한 연출가가 아니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 작품을 탐낸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고양감이 차오른다.
“후우.”
자연스럽게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
해가 지기 시작한 서재 안.
박성규 교수는 손에 들린 원고를 좀처럼 놓지 못했다.
권서준이 제출한 70장 분량의 희곡.
학생 대부분 과제가 30장 내외인 데 비해 훨씬 더 긴 작품이었다.
애초에 분량 제한은 없었기에 평가하는데 문제 될 건 없었다.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 희곡이 가진 퀄리티였다.
박 교수는 책상에 올려놓은 발을 내리며 다시 한번 원고를 살폈다.
‘이건 진짜 물건이야. 당장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작품을 몇 번이나 읽은 끝에 내린 확신이었다.
적절한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올리기만 하면 대박은 보장할 수 있었다.
‘흥행이야 배우랑 연출까지 잘 만나야겠지만, 희곡 자체만으로도 최소 작품성은 인정받을 수 있어.’
자신의 작품이라고 밝히고 싶을 정도의 수준.
그러나 애석하게도 엄연히 주인은 따로 있었다.
‘하아, 이게 대학원생이면 어떻게든 해볼 텐데... 오히려 학부생이라서 조심스럽네.’
대학원생들이야 교수 말에 절대복종이지만, 학부생의 경우 교수의 힘이 상대적으로 덜 닿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성적으로 압박하기엔 자극이 약하고...’
그렇다고 이 귀한 작품을 어리바리한 학부생이 독차지하게 두기엔 아쉬웠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는데, 순간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오른다.
‘그래! 적절하게 코멘트를 해주는 척하면서 공동 저자로 같이 이름을 올리는 거야. 솔직히 학부생 입장에서도 그게 좋은 거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작가의 작품보다는 그래도 저명한 교수의 이름이 함께 올라오면 주목받기에도 훨씬 쉬운 법.
누가 뭐래도 적어도 박 교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어느새 박 교수의 얼굴에 교활한 미소가 떠오른다.
***
나는 집 근처 카페에서 장현웅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나를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뭐해?”
“어, 어? 벌써 왔어?”
내가 묻자 황급히 그림을 감춘다.
“뭔데 숨기는 거야?”
“아, 이거... 웹소설 표지.”
“표지?”
“어. 커뮤니티에서 로맨스나, 판타지 작품에 쓸 표지를 구할 때가 있는데, 가끔 알바할 겸 그리거든. 생각보다 꽤 쏠쏠하다고.”
상반신, 전신, 배경 포함 등등.
등장인물의 수에 따라 가격도 꽤 좋았다.
‘게다가 장르 불문하고 그림체도 다채롭네.’
역시 글보다는 그림 쪽에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영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건넸다.
“자, 이거나 받아.”
해리포터 그림책이었다.
20주년 개정판 양장본으로 꽤 고가의 선물이었다.
“...뭐야, 이거?”
“뭐긴, 선물이지.”
선물을 바라보는 장현웅의 입이 떡 벌어진다.
“권서준이 이런 센스를 발휘한다고? 너 진짜 변했다...”
장현웅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책을 펼쳐본다.
“응? 근데, 그림책이네?”
되묻는 장현웅을 보며 나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낮췄다.
“너 아직 그림 포기 안 했잖아.”
“...어?”
장현웅이 놀란 듯 고개를 든다.
“웹툰 그리고 싶은데 스토리를 보강하고 싶어서 문창과 왔다며.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계속 연습하는 거고.”
“...”
감동 받은 장현웅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하아. 맞지. 근데... 할수록 더욱 벽 느끼는 중이야. 글 잘 쓰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장현웅의 고민은 당연했다.
글이라는 게 도전하기 쉽지만 결과를 내기엔 너무나 어려운 분야니까.
게다가 냉혹하게 말하자면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고맙다. 그래도 내 맘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네. 우리 부모님은 당장 접으라고 난리인데...”
벌써 여러 차례 실패를 맛본 터라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더 바닥을 치기 전에 적절한 자극이 필요했다.
“단점을 메울 생각 말고, 차라리 장점을 더 계발하는 건 어때?”
“장점? 내가 장점이랄 게 있어야지...”
“그림말이야. 솔직히 너 그림만큼은 자신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림만 잘 그린다고 웹툰이 잘 되진 않더라고. 답답한 마음에 스토리 작가랑 같이 작업해본 적도 있는데, 오히려 생각이 달라서 얼마나 고생했다고...”
녀석의 표정이 착잡해진다.
“일단 계속 그리고 있어 봐.”
“왜?”
“또 알아? 나중에 좋은 스토리 생기면 내가 줄지?”
순간 녀석의 눈이 커진다.
“저, 정말? 정말로 나랑 같이 작품 해준다고?”
“그러니까 제대로 연습하고 있어. 퀄리티 떨어지면 안 할 거니까.”
“그, 그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봐봐, 봐봐.”
장현웅은 가방에서 연습 노트를 꺼내 보여준다. 하나같이 인물과 배경으로 가득 차 있는 연습장.
누가 노력파 아니랄까 봐 대단한 집념이었다. 물론 내가 가장 선호하는 기질이기도 하고.
“암튼 말이라도 고맙다. 아, 선물도.”
장현웅은 감동 받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그림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든다.
“참, 너 박성규 교수님 과제는 낸 거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대박, 영국에서 그 과제까지 한 거야?”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장현웅은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두른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린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박성규 교수였다.
-서준이냐?
잔뜩 힘을 준 박 교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선생님.”
-흠, 별 건 아니고 월요일에 학교 오면 연구실에 좀 들려라. 과제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서.
갑작스러운 호출.
그러나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장현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야? 박성규 선생님이 웬일이래? 학부생에게 직접 전화도 하시고?”
장현웅이 놀랄 만도 했다.
박 교수는 학부생에게 관심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최영 장군님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셨다면, 박 교수는 학부생 보기를 돌같이 여기시는 분이었지.’
그래서 별명도 박영 장군이었다.
학부생 과제엔 제대로 된 코멘트도 없었다. 늘 외부 행사와 정부 지원금 프로젝트에만 혈안이 된 사람이었다.
결국 돈과 명예가 아니면 관심이 없는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를 부른다고?
그것도 내가 희곡 과제를 제출한 뒤에?
자연스럽게 왜 연락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희곡이 탐나는 거겠지.’
구린 냄새가 난다.
숟가락을 얹으려는 고약한 심보가 벌써부터 눈에 보인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평범한 학부생을 생각했다면 당신은 상대를 아주 잘못 고른걸.
순간 내 머릿속엔 아주 재미난 상황이 떠오른다.
지금 내 대본을 탐내는 건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서로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주 재미있겠는데?’
벌써부터 박 교수의 표정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