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7화 (17/203)

# 17. fair play - 정정당당한 승부 (4)

17.

***

늦은 밤.

교수 연구동.

고요한 복도를 깨우는 걸음이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송진호였다. 바짝 굳은 얼굴의 송진호는 이내 한 연구실 앞에 멈췄다.

[송영도 교수 연구실]

현판을 확인한 송진호가 이내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후우.”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간신히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어두운 복도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네.”

안에서 송영도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명만 켜있는 어두운 연구실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와보는 곳.

송진호에겐 낯선 장소였다.

“...”

하던 일을 마친 송 교수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송진호의 얼굴을 확인한 송 교수의 얼굴이 살짝 식는다.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표정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였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메일이나 문자라는 수단이 있을 텐데?”

“직접 듣고 싶어서요.”

송 교수가 그제야 펜을 내려놓는다.

“그래, 묻고 싶은 게 뭐지?”

“왜 갑자기 백일장으로 뽑으신다는 거죠?”

“그게 문제가 되나?”

“저였잖아요. 제가 확실했잖아요.”

송 교수의 눈빛이 싸늘해진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을까?”

“그, 그거야...”

“나는 단 한 번도 누구를 데려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내가 착각한 걸까?”

“...그건 아니지만... 저 이상으로 결과물을 낸 사람이 없잖아요.”

잠시 바라보던 송 교수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학과 성적, 과제로 인한 평판, 신춘문예 등단까지. 네가 우수한 학생이긴 해.”

“그런데 왜...”

“그러나.”

송 교수가 송진호의 말을 매섭게 자른다.

“그게, 네 작품이 훌륭하다거나, 네가 훌륭한 작가라는 걸 입증하는 건 아니야.”

단호한 말에 송진호의 턱 근육이 꿈틀거린다.

“대체 얼마나 더 이뤄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거죠?”

“인정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거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

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차가운 말투.

송진호는 입술을 지그시 문 채 울컥거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런 송진호를 향해 송 교수는 매몰차게 말을 잇는다.

“답이 됐으면 그만 돌아가. 난 오늘까지 끝마쳐야 할 원고가 있어서.”

냉정한 축객령과 함께 송 교수의 시선이 원고로 향한다. 그 차가운 태도에 송진호의 눈에서 순간 푸른 불꽃이 일어났다.

“아버진 항상 그런 식이네요.”

“...”

원고를 쓰던 송 교수가 순간 멈칫거렸다.

“대체 제가 얼마나 더 잘해야 인정해주실 거죠? 만일 제가 아버지 자식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차갑게 대하셨을까요?”

그제야 송 교수가 고개를 든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차가워진 눈빛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더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거야. 그런데 매번 실망스러우니, 나 역시 곤혹스럽구나.”

“...”

충격을 받은 송진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원하는 건 아들이 아닌 학생이야. 누구보다 글을 잘 쓰는 학생, 넌 아직 그 학생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했을 뿐이고.”

“...”

“그만 가거라. 보는 눈이 많아.”

송 교수의 시선이 다시 한번 원고지로 옮겨진다.

“...”

결국 송진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연구실을 나오고 말았다.

‘아버진... 여전하시네요.’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이혼으로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자란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작품을 보며 작가라는 꿈을 키웠고, 인정받길 원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인정한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바로 권서준이었다.

‘아버지의 기준에 권서준이 더 가깝다는 뜻인 거죠? 그러나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제가 보여드리죠.’

우둑.

힘주어 문 어금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굳은 표정의 송진호는 이내 몸을 돌려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백일장 당일이 되었다.

***

백일장이 열리는 소강당 앞.

나는 미리 도착해 장현웅을 기다렸다.

“서준아!”

초조한 얼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영락없이 밤잠을 설친 모습이었다.

“아직 안 늦었지?”

“어. 시간은 충분해. 근데, 왜 이렇게 긴장한 거야?”

“그게... 하아, 나 어떡하냐? 잘 할 수 있을까?”

장현웅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연신 숨을 골랐다. 그런데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지 울상을 지었다.

첫 도전이라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다가 그동안 배웠던 걸 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긴장이란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요인이니까.’

순간 여왕 폐하가 참석한 연극무대에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를 했던 한 배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땐 정말 지옥 불이 내 가슴에 피어난 줄 알았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실수하는 사례는 숱하게 봐왔다.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스터디 과정을 한 번 되짚어주는 게 필요했다. 다행히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내가 했던 말만 기억해. 시는 결국 이미지야. 네가 제대로 연상하지 못하면 좋은 시는 나올 수 없어.”

“그건 아는데...”

“알면 됐어. 다른 건 걱정하지 마. 예를 들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제가 추가돼도 당황하지 말라고. 스터디만 기억해. 알겠어?”

“...”

녀석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후우. 시는 이미지, 연상, 그림, 오케이. 입력했어.”

깊은 호흡과 함께 표정이 차분해진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었다.

“자, 들어가자.”

이제 시작이었다.

<제42회 이옥 백일장>

커다란 현수막이 정면에 걸려있고,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송영도 교수와 함께 학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 때문일까.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꽤 많은 학생이 백일장에 도전했다.

‘타과 학생까지 하면 거의 200명 정도 되겠는데?’

사람은 많았지만 분위기는 차분했다.

“너 글 좀 써왔어?”

“그냥 시제에 맞춰서 몇 개 써놓긴 했지. 넌? 준비 좀 했어?”

“아니. 난 거의 못 했지.”

백일장 때마다 보는 은근한 기 싸움.

자신의 패를 보여주지 않은 채 상대의 패를 관찰하려 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지만 모두가 동일한 목표를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전쟁터와 다름이 없었다.

몇몇 애들은 청심환을 먹기도 하고,

긴장한 애들은 손에 핫팩을 쥐기도 한다.

어수선하면서도 차분한 게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

나는 필기도구를 꺼낸 채 고요히 백일장 순서를 기다렸다.

그때,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송진호였다.

“너도 백일장 참가하는구나?”

친근하게 묻지만 말속에서 가시가 느껴진다.

“마치 참가하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리네?”

보란 듯이 되받아치자 녀석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럴 리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참여 가능한 백일장인데. 건필하라고.”

그러나 이내 몸을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린다. 조금 전과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지난번 글은 인정해. 정말 잘 썼어. 하지만 이번 백일장은 다를 거야.”

“과연 그럴까?”

내 도발에 송진호는 웃음으로 답했다. 속이야 부글부글 끓겠지만 그래도 제법 심지가 깊은 놈이었다.

“페어플레이 하자고.”

“페어플레이, 그거 좋지.”

페어 플레이(fair play).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였다.

400년 전엔 없었던 단어.

바로 내가 창조한 단어였으니까.

***

“백일장을 곧 시작합니다. 휴대폰은 미리미리 꺼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진행 요원의 안내 음성이 들린다.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백일장이 시작되었다.

주어진 시간은 총 두 시간.

그 안에 시 한 편을 완성해야 했다.

‣ 부문 : 운문(시, 시조)

‣ 주제 : 길, 노래.

이미 알려진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줄이 더 추가된다.

사전에 공지된 대로 추가된 시제였다.

‣ 추가 시제 : 외계인.

미리 준비해 온 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시제.

“이, 이게 뭐야...”

낮게 읊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쉿, 조용히 하세요.”

진행요원의 주의에 따라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러나 술렁거리는 기운은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진다.

단체로 찾아온 혼돈 그 자체.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 단 두 사람만 표정이 달랐다.

***

당황한 것은 송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 당일 추가 시제 있을 수 있음.

굳이 써놓은 공지를 보고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생뚱맞잖아...’

길과 노래.

거기에 외계인이라니.

미리 준비해 온 시의 심상이 완전히 깨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시제를 내는 거야.’

짜증이 솟구쳤다.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권서준은 평온해 보였다.

‘뭐지, 이런 시제가 나올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건가?’

태연한 녀석의 표정이 오히려 송진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으득.

이를 악물었다.

죽어도 권서준에게 질 수는 없었다.

존재 자체가 송진호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후우.”

송진호는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머릿속으로는 평생토록 읽어온 수많은 대문호의 작품을 떠올렸다.

‘그들 누구도 외계인에 대해 다룬 사람은 없어. 다만, 다른 세계의 인물을 다룬 글은 몇몇이 있었지...’

송진호는 그들에게서 받은 영감을 떠올렸다. 그 덕에 간신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느낌이 아닐까?’

송진호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조금은 다급한 손놀림이었다.

***

‘백일장에서 가장 중요한 심사 포인트는 바로 시제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지 여부야.’

내가 그림 작업을 통해 장현웅에게 알려 주려 했던 것도 일종의 시제 형상화 작업이었다.

그림을 통해 시제 형상화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리했고, 중간중간 피드백을 진행하면서 그 메커니즘을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이후엔 혼자 연습할 시간까지 줘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상태.

아니나 다를까 힐끗 본 장현웅의 표정이 밝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젠 내 작품에 집중할 차례였다.

외계인.

이전 두 시제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시로써 소화하기 쉽지 않은 시제였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그림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추억이라고 해야 할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초등학교 때, 거센 폭우를 뚫고 집으로 향하던 길.

‘서준아, 겁먹지 않아도 돼. 아빠가 있잖아.’

겁에 질린 나를 품에 안은 채 아버지는 콧노래를 불러주셨다.

흥얼거리는 리듬과 함께 아버지의 약속이 내 귓가에 맴돈다.

나는 볼펜을 꺼내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려도 되지만 아날로그적인 감각은 심상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심상에 젖어 든다.

비 냄새.

촉촉한 물기.

까칠한 수염.

그 틈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까지.

그날의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자연스럽게 창작 욕구가 솟구친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 욕망을 밀어낸다.

‘아직은 아니야.’

보다 쉽고,

보다 선명하고,

보다 감각적인 시어가 필요했다.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담았다.

날카롭고, 한없이 거친 표현들.

제멋대로 날뛰어 삐죽삐죽 튀어나온 위험한 것들.

나는 그것들을 품은 채 갈고, 또 갈았다.

그 무엇도 해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는 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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