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비무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무림맹은 축제 분위기였다.
하루의 비무가 끝나면 주루마다 사람들이 모여 다음 승자가 누가 될까 예상하며 격론을 벌였다.
무림맹 후기지수 비무는 십 인을 선발하는 것을 끝으로 더 승부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를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십 인을 선발한 저녁에 맹주 형일천이 이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는 마천과 흑천의 후기지수 십 인도 초대되었다.
다음 날부터 무림맹과 마천, 흑천 후기지수 간의 비무가 열리는 만큼 서로를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이었으나 연회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다. 맹주 형일천을 비롯하여 소마와 피전격 등 수장들이 함께 하고 있으니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피전격이 무한에게 물었다.
“왜 최종 우승자를 가리지 않지? 궁금하잖아. 저놈들 중 누가 최강자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알아서 뭐하겠습니까?”
“무인은 오로지 최고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부를 가리지 않는다면 최고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지 않느냐?”
“마천과 흑천이 보는 앞에서 맹의 전력을 노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한의 말에 피전격이 멍해져서 잠시 보다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런 이유라면 나는 참관하지 않을 테니 승부를 가려라.”
호승심이 강한 피전격은 승부를 내지 않은 게 못내 불만이었다. 무한의 농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지하게 승부를 가리라고 채근했다.
무한이 흑천의 후기지수 십 인을 보며 말했다.
“저들은 승부를 가렸소?”
“당연히. 지금 앉아 있는 순서가 바로 서열이다. 강자 순으로 앉았지.”
흑천 후기지수 가장 상석에 앉은 이는 스물 가량 되어 보이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명일환이라는 녀석이지. 이번 연합 비무대회에서 저 녀석이 최종 우승할 것이야.”
피전격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올리며 명일환을 보았다.
“천주의 제자요?”
“제법 무재가 있어 좀 가르치긴 했다.”
피전격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을 독촉했다.
“그런데 왜 대답을 피하는 것이냐?”
피전격이 끝내 이유를 묻자 무한이 말했다.
“흑천과 맹 후기지수들이 앉아 있는 자리 분위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흑천 후기지수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서열이 딱 정리되어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마천 역시 서열 정리가 되어 있는지 흑천과 마찬가지로 경직된 분위기였다.
반면, 맹 후기지수 십 인이 앉은 자리는 서로 격의 없이 환담이 오갔다.
“흥, 단합을 위해서 그랬다는 거로군. 잘못 생각한 것이다. 서열이 잡히지 않는 조직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역시 너희 정파는 나약한 생각에 빠져 있군.”
“흑천으로서는 좋은 일이지요.”
“그러다 잡아먹힌다.”
피전격이 흥미를 잃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열 명을 선발하는 것까지 비무를 치르자는 건 무한의 건의였다. 무한은 피전격에게 그 이유를 굳이 세세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비무대회에서 승자를 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사자들도, 보는 관객들도 승부를 원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지.’
무한이 그런 생각을 하며 맹의 다른 후기지수들과 어깨를 두드리며 웃고 떠드는 강문평을 보았다.
***
이튿날부터 맹 후기지수 십 인과 마천, 흑천 후기지수 간의 비무가 열렸다.
천무당주 우곽이 최종 네 명의 승자를 선발하는 것까지만 진행하겠다고 하자 관객석에서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피전격이 화를 냈다.
“승부를 피하는 것이냐? 흑천이 최정상에 서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속셈 아니냐?”
소마도 의아하여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무림맹에서 흑천이나 마천에서 최종 승자가 나오는 것을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한이 뻔뻔한 얼굴로 순순히 자기 말을 인정하자 피전격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버럭 화를 냈다.
“인정할 수 없다. 승부를 가려야 해.”
“피 천주, 여기는 무림맹입니다. 맹의 뜻을 존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정 아쉽다면 나중에 흑수애에서 한 번 더 하지요.”
“흥! 좋다. 내년에 흑수애로 열 명을 보내라.”
“내년은 너무 이릅니다. 매년 비무대회를 치를 수는 없으니 오 년에 한 번이 어떻습니까? 아예 무림맹과 흑수애를 오가며 한 번씩 치르기로 하지요.”
무한과 피전격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으나 이 자리에서 그 대화를 듣지 못할 사람은 없다.
장로들이 두 사람의 대화에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한이 피전격과 이런 논의를 하는 건 월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맹주 형일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걸 보자 이미 두 사람이 합의를 봤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소마가 끼어들었다.
“흑천과 무림맹 만의 비무대회는 의미가 없지. 우리가 빠지면 진정한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아니니까.”
마천까지 가세하자 피전격이 후끈 달아오른 듯했다.
“좋아, 좋아. 오 년 후 흑수애로 와라. 흑도의 호쾌함을 보여주지. 그때 천하제일수(天下第一秀)를 가리자.”
“다음 오 년 후에는 천산으로 와라. 천산의 위엄을 보여주지.”
소마가 짤막하게 말하자 맹주 형일천이 나섰다.
“그러면 매 오 년마다 돌아가면서 후기지수 비무대회를 개최하는 걸로 합시다!”
“좋소!”
세 세력의 수장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는 호쾌함을 보였다.
맹주 형일천이 무한을 보았다.
이제 됐냐는 시선에 무한이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벽을 허무는 것.
그 시작은 서로 교류하는 것이다.
***
무림맹 십 인의 후기지수와 마천, 흑천 후기지수들 간의 비무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사실 전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대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축하 사절단으로 와서 비무를 하지만 자칫 사이가 틀어지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대다.
그러니 출전자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특히 대파의 제자들은 사문의 명예까지 달려 있으니 전의를 불태웠다.
예상대로 첫 비무부터 격렬했다.
콰쾅!
처음부터 검과 도에 실린 강기가 부딪히며 벽력이 떨어진 듯한 굉음이 터졌다.
서로 전력을 다한 만큼 순식간에 승부가 갈리기도 했다.
소림의 영승 법성은 막강한 내공으로 밀어붙였고, 무당의 제자 장무는 태청검법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화산의 매화검법과 종남의 삼십육검도 유감없이 펼쳐지며 대파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 외 정파 후기지수들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흑천이나 마천의 후기지수들 역시 강했다.
특히 피전격이 직접 지도했다는 명일환의 묵룡신공은 거의 구성의 경지에 달해 적수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마천 후기지수 중 가장 뛰어나다는 역무군 역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사흘에 걸친 비무 결과, 네 명의 승자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흑천 명일환, 마천 역무군, 그리고 소림의 법성과 신도문의 제자 광도가 사인에 들며 마천과 흑천, 대파와 독행무인 골고루 한 명씩 남았다.
“승부를 가려라!”
“최종 승자를 선발하라!”
관객들이 연신 최종 비무를 요구했으나 이번에는 피전격마저 함구했다.
흑천 명일환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역무군이나 법성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도 명일환이 패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천무당주 우곽이 승부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하며 진중하게 외쳤다.
“이번 비무대회는 친교를 나누는 자리요. 눈요기가 아니란 말이오.”
단호한 외침에 관객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다만 그간의 비무를 가지고 예상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에도 무림맹 곳곳의 주루에서 격론이 오갔다. 심지어 서로 주장을 하다 칼을 뽑는 바람에 맹의 순찰대가 저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맹주 형일천까지 아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도 천상 무인이기에 승부를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무한의 뜻을 존중하였다.
최종 사인의 후기지수 선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형일천이 피전격에게 말했다.
“흑수애에서는 최종 승부를 보는 거요?”
“당연히!”
피전격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흑천이 반드시 최종 우승을 할 것이다.”
피전격의 표정을 보니 지금부터 기재를 골라 가혹한 수련을 시킬 생각임이 분명했다.
“어림없는 소리.”
소마가 코웃음을 쳤다.
“마천의 무공이 얼마나 깊은지 중원은 모르고 있지. 흑수애 비무대회에서 그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우승자들이 왜 오지 않는 거지? 심무한도 보이지 않고.”
피전격의 물음에 형일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잠시 후.
무한과 네 명의 승자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후기지수들의 모습이 엉망이다.
‘겨뤘구나!’
승자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두가 그들이 따로 비무를 했음을 알아챘다.
그런데 후기지수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우울했다.
‘승부를 가리지 못한 건가?’
소마와 피전격은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그랬다가 ‘졌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야말로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날 연회가 끝나고 형일천이 무한에게 물었다.
“누가 이겼나?”
“그들 간의 비무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비무대회가 끝나고 네 명의 승자가 무한을 찾아가 승자를 가리고 싶다며 심판을 봐줄 것을 요청했다는 걸 아는 형일천이다.
“제게 다 졌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말하다 말고 형일천이 무한을 보았다.
“설마 네 명 모두와 싸운 건 아니겠지?”
후기지수들의 무위는 놀라워서 형일천도 네 명의 합공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무한이 웃기만 하였다.
그런 무한을 보는 네 명의 승자들은 심사가 복잡했다.
소림의 영승 법성은 눈을 감고 무한의 말을 복기하였다.
- 승부를 가리고 싶다고? 고만고만한 상대와 가린 승부가 뭐 그리 중요하지?
네 명이 천하제일수를 가리고 싶다고 하자 무한이 한 말이다.
그러면서 합공을 하라고 했다.
그들 또한 무한이 당금 천하제일인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네 명 모두 합공을 하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따지고 보면 무한과 그들은 동년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네 명이 기를 쓰고 합공을 했으나 무한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결국 모두 나가떨어지자 무한이 말했다.
- 하늘 위에 하늘이 있지. 눈앞의 상대를 보지 말고 하늘을 봐라. 가야할 길이 보일 것이다.
무한의 일침에 법성은 깨달은 바가 컸다.
‘진정한 하늘이 위에 있음을 모르고 호승심에 눈이 멀어 눈앞의 상대에 연연하다니…….’
그는 소림으로 돌아가면 면벽 수련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
후기지수 비무대회를 마치고 맹주 선출 비무대회까지 사흘의 여유를 두었다.
무한의 무위를 아는 대파와 세가는 출전자를 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출전할 사람도 없었다.
전대 마천주가 천하제일 비무행을 한다며 각파의 최고수들을 찾아 생사결을 벌였다. 그 와중에 문파의 최고수들이 모두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그런 마천주를 꺾은 무한이다. 감히 요행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중원은 넓고 사람은 많았으며, 호기에 넘친 무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맹주 선출 비무대회에 참가한 이가 무려 수십 명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비무대회에 출전했다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이도 있었다.
비무대회 첫날.
형소가 무수한 출전자를 보다 무한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출전 기준을 세워야겠어. 이거야 원,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출전하다니. 그냥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