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무한은 마뇌에게 벽을 세우지 않을 거라고 했다.
마뇌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소마에게 무림맹주 선출 비무대회에 사절단을 보낼 것을 건의하였고, 소마는 이를 흥미롭게 여겨 받아들였다.
“녀석이 불렀다면 가야지.”
무한은 소마가 사절단을 보낸다는 소식을 피전격에게 흘렸다.
굳이 설득할 것도 없이 피전격이 비무대회 참관 통보를 해왔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오겠다고 했다.
“전쟁 중에도 명절 때면 서로 떡을 나눠먹었다는 고사가 있다. 무림맹주가 선출되면 숙적일 텐데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나?”
심지어 흑도의 후기지수를 선보이겠다며 후기지수 비무대회에도 참가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소식을 굳이 마천에 알려 자랑했다.
그러자 소마가 직접 후기지수를 선발하여 사절단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막은 아는 이가 몇 안 된다. 그러니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청이 어수선해지자 맹주 형일천이 일어서서 말했다.
“마천과 흑천의 후기지수가 비무에 참가한다니 반드시 이겨 중원 정도의 힘을 보여주어야 하오.”
그러자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절대 질 수 없다!
특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 장로들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일이 이미 벌어진 이상, 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 자파의 명성을 떨쳐야 한다.
회의가 끝나자 대파와 세가의 장로들이 속속 대청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후기지수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제자들의 수준을 높여달라는 밀지가 각파의 본산으로 전해졌다.
***
흑의무복을 입은 백여 명이 성밖마을로 들어섰다.
거대한 마차를 호위하고 들어오는 흑천도들은 한껏 기세를 뿜었다.
성밖마을 대로에 사람들이 나와 흑천 무리가 들어오는 걸 구경했다.
“살다 살다 이런 광경도 보는구나. 흑천도들이 무림맹에 들어오다니.”
“마천도 온다잖아. 천지가 개벽할 일이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사이로 흑천도들이 나아갔다.
무림맹 내성 정문이 활짝 열렸고, 양쪽으로 무력대가 도열하여 흑천도를 맞았다.
마차가 정문을 지나 광장에 이르러 멈췄다.
마차 문이 열리고 피전격이 내려섰다.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여기가 천하방이었구나. 내 손으로 무너뜨렸어야 했는데.”
오만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자 마중 나왔던 무림맹 사람들이 불쾌한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무한이 앞으로 나서서 웃으며 말했다.
“이미 사라진 천하방을 아쉬워하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군요.”
그러면서 피전격의 뒤에 선 흑천의 후기지수들을 보았다.
“흑수애에서 이런 인재들을 키우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예기를 풀풀 날리는 흑천의 후기지수들이 무한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과 연배가 비슷하나 이미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니 호승심이 일어난 것이다.
피전격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제법 쓸 만한 놈들이지. 정파의 화초들과는 다른 놈들이야. 무척 거칠다고. 비무에 나오는 놈들은 단단히 준비해야 할 거야.”
무한이 직접 그들을 객사로 안내하였다.
그날 무림맹에서는 피전격의 거만한 행동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튿날, 마천도가 입성하였다.
마천의 사절단은 오십여 명이었다. 소마 역시 거대한 마차를 타고 내성 광장까지 들어왔다.
소마 또한 주위를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으나 피전격과 달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날도 무한이 직접 나와 소마를 객사로 안내하였다.
흑천과 마천이 내성 객사에 들자 맹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맹주 형일천은 소마가 당도하자 마천과 흑천의 천주를 환영하는 연회를 열었다.
연회장에는 형일천과 소마, 피전격을 비롯한 마천의 수뇌부들이 참석하였다. 맹에서는 총군사 제갈주승과 장로들까지 참석하였다.
성대한 연회였으나 분위기는 자못 무거웠다.
소마가 이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맹주 선출대회에 초청받아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 없어 가져온 게 좀 있소.”
마천도들이 커다란 궤짝을 셋이나 지고 와서 내려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궤짝으로 향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천산 서고에 왜 이런 게 굴러다니는지 모르겠더구려.”
마천도들이 궤짝을 열었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소림의 방수대사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대력금강부동신법? 아니, 이건 항마지?”
궤짝에는 무수한 비급이 담겨 있었다. 가장 위에 놓인 건 소림에서 실전된 비공이었다.
소마는 왜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고 눙쳤지만, 이는 과거 마교 시절부터 수백 년에 걸쳐 중원에서 강탈한 각파의 비급들이었다.
제갈주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마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마천의 성의에 감사드리오.”
그러고는 제갈주승이 비급 하나 하나를 꺼내 이 자리에 있는 문파의 후인을 호명하였다.
연회장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심지어 그냥 실전된 줄 알았던 비급을 되찾은 문파의 장로는 비급을 받아들고 어안이 벙벙하여 웃기만 하였다.
거기에는 일선문의 비급도 있었다.
천하방을 떠났다가 무한이 무림맹에 입맹하자 돌아온 우곽은 맹에서 천무당주를 맡고 있었다. 그는 비급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담철조와 공곤이 복원한 일선문의 무공이 예전보다 훨씬 뛰어났으나 그래도 사문의 무공을 되찾았다는 감격에 사부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이 자리에 없는 문파는 군사부에서 책임지고 전달할 것이고, 명맥이 끊긴 문파는 연고자가 나타날 때까지 맹에서 보관하겠소.”
제갈주승이 바로 현장에서 비급을 나눠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 차례 비급 잔치가 열리자 연회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를 본 피전격이 질 수 없다는 듯 일어나 외쳤다.
“중원 흑도를 대표하여 무림맹주 선출대회를 참관하게 되었소. 그냥 올 수 없기에 조촐한 성의를 보일까 하여 가져왔소.”
그러자 흑도들이 역시 커다란 궤짝을 지고 왔다.
사람들이 이번에는 뭘까 기대에 찬 시선으로 궤짝을 보았다. 마천의 궤짝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피전격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열어라.”
흑도들이 일제히 궤짝을 열자 이번에는 무당의 장로 청해가 화들짝 놀라 튀어나갔다.
“청명검!”
궤짝에는 무수한 검들이 들어 있었는데 과거 정마대전 당시 사라진 무당의 보검이 바로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흑천에서 가져온 예물은 여러 문파의 신물이나 병장기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피전격을 향했다. 이걸 다 훔쳐갔었다니… 역시 흑도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피전격이 정색을 하고 헛기침을 하였다.
“어험, 이건 과거 정마대전 당시 흑천에서 수습한 것들이오. 그때 우리가 저기 저 소마의 마천과 함께 싸웠잖소? 돌려주려고 했는데 정파 당신들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사이가 좀 그렇지 않았소? 순전히 당신들의 잘못이란 걸 알아두구려.”
낯짝도 두꺼운 피전격이었다.
***
무한이 군사부를 나와 비무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사형!”
강문평이 무한을 보자 달려왔다.
하기주와 악가박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번에 저도 출전합니다. 알고 계시죠?”
강문평도 어느새 성년이 되었다. 키가 훌쩍 크고 균형 잡힌 몸이 제법 무인의 태가 났다.
“자신은 있냐?”
“걱정 마세요. 비무 최우승자는 제가 될 겁니다.”
무한은 웃기만 했다.
마천과 흑천이 참가하면서 이번 후기지수 비무대회에 대한 관심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구파일방에서는 자파에서 비무를 거쳐 최종 우승한 승자를 보냈다는 후문이 돌고 있다.
“가자.”
무한이 비무대회장으로 향했다.
비무대회는 외성 광장에서 열렸다. 성내에서 가장 너른 곳이다.
북쪽 중앙에 무림맹 주요 인사들이 앉았고, 왼쪽에 흑천, 오른쪽에 마천의 사절단이 앉았다.
동쪽과 서쪽에는 비무대회를 관전하기 위해 온 무림 인사들로 빽빽하게 들어찼고 남쪽에는 참가자들이 대기하였다.
오시를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에 한 사람이 올라섰다.
이제는 무림맹 천무당주가 된 우곽이었다. 천무당은 무림맹 무인들의 수련을 맡은 곳이다.
절정 이하의 맹원들은 일 년에 한 달간 천무당에 들어와 수련을 해야 한다. 무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형일천이 뜻이 담긴 조직이 천무당이다.
“후기지수 비무대회를 시작하겠소. 앞으로 열흘 간 치러지는 비무는…….”
우곽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이어 동서남북으로 나뉜 비무대에서 곧바로 비무가 진행되었다.
마천과 흑천이 참가하며 팽배했던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장내는 환호와 탄식,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형소가 무한에게 속삭였다.
“어때? 기가 막힌 한 수였지?”
후기지수 비무대회는 형소의 생각이었다.
“그렇긴 한데, 어째 대파와 세가에게 밑자락을 깔아준 것 같다.”
확실히 대파와 세가 출신들이 강했다. 특히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이 연달아 승리하며 역시 소림, 역시 무당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들의 면도 세워줘야지. 그들이 없으면 무림맹도 유명무실해질 거야. 과거 천하방과는 다르지.”
형소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천하방은 천하사패라는 강력한 힘이 있었으나 무림맹은 그렇지 못했다. 대파와 세가의 참여가 필요했다.
“하지만 본선은 다를 거야. 중소문파나 독행무인들의 수가 많아서 약해 보이는 것뿐이지 진정한 강자들도 섞여 있다고.”
소소가 비무 결과를 분석하며 말했다.
무한이 마천과 흑천의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비무 광경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에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선이 끝나고 본선이 거듭되자 마천과 흑천의 후기지수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본선 진출자는 일백 명이었다. 거의 일천여 명 가운데서 선발한 일백이니 열 중 하나를 고른 셈이다.
이어 오십 명, 스물다섯 명, 점차 숫자가 줄어들며 비무대에서 펼쳐지는 무공의 수위도 급격히 올라갔다.
콰쾅!
심지어 강기가 터지기도 했다.
소림에서 자신 있게 선발로 내민 영승(英僧) 법성의 백보신권이었다.
엄청난 권강에 상대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실전이었다면 즉사할 정도의 위력이었으나 법성은 막판에 강기를 거뒀다.
“역시 소림이야.”
“대환단을 먹은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 저 나이에 어찌 저런 내공을 지닐 수 있겠냐고.”
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 초절정 이상에서나 쓸 수 있는 강기가 나오자 모두가 경탄하였다.
이어 무당 등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종종 강기를 터뜨려 장내를 긴장시켰다.
그러니 마천과 흑천의 후기지수들도 굳은 얼굴로 비무를 관전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열 명이 가려졌을 때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소소의 장담대로 열 명 중에 대파의 제자는 네 명에 불과했다.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과 종남이었고, 세가 출신은 팽가뿐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은 중소문파나 문파가 사라지고 일인전승으로 이어지는 독행무인이었다.
그들은 초반에 실력을 숨겼으나 본선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고,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며 단숨에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강문평은 놀랍게도 열 명 중에 선발되었다. 흑도 강하보의 후손이 무림맹 후기지수 십 인에 든 것이었다. 하기주가 혹독하게 수련을 시켰다더니 정말 그랬던 모양이다.
“거 봐. 내 말이 맞았지? 대파와 세가가 출신문파의 명성 때문에 돋보였을 뿐이야. 나는 저들이 될 줄 알았지.”
소소가 으스대며 말했다.
단상의 강문평과 눈이 마주치자 무한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주었다.
강문평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