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악일비가 손을 쳐들자 무림맹 무력대 이개 조가 자객들을 포위하였다.
“악 형?”
악일비는 사문 남악문에서 내쳐지며 휘주에서 이름이 잊혀져 갔다. 하지만 휘주용봉회 사람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숭전양이 반가워하자 악일비가 말했다.
“이놈들부터 처리하고.”
그때, 다시 쉬쉭, 하고 쇠뇌가 날았다.
이번에는 무림맹 무력대원들이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조심해라. 적이 더 있다!”
챙!
악일비가 날아드는 쇠뇌를 쳐냈다.
숲속에서 다시 한 무리가 나오는데 마흔 명가량 되었다. 애초부터 오십 명 가량이 움직였던 것이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흑의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심무한의 개 악일비로군. 반갑다.”
“…….”
왠지 낯익은 목소리.
악일비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생각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다. 동원한 무력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움직임이나 공격하는 행태가 무력대 출신이다.
몇몇은 검을 들고 있으나 대부분 비슷한 크기의 도를 들고 있다.
악일비가 차갑게 내뱉었다.
“도천부의 떨거지들이로군.”
“배신자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닌듯한데?”
악일비의 사문 남악문은 도천부를 따르는 문파였다.
“동호방, 너야말로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군. 심 방주가 목숨을 붙여주었는데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동호방은 과거 고성후의 무력대 도룡대의 대주였다.
동호방은 복면을 썼는데도 악일비가 자신을 바로 알아보자 약간 당황한 듯했다.
악일비가 말했다.
“나는 네놈들의 속성을 알고 있지. 그래서 그동안 내내 쫓아다녔다.”
도천부는 가권의 변동이 많았다.
첫째 고강후가 죽자 둘째 고성후가 맡았고, 고성후가 몰락하여 무한에 의해 천하방 뇌옥에 갇히자 고성후의 장남 고군이 잠시 맡았다.
이어, 한때 실종됐던 고강후의 아들 고수와 고현이 고성후의 몰락 소식을 듣고 나타나 가권을 되찾아갔다.
고강후의 아들 고수와 고현은 도천부의 재산을 정리하여 절강으로 돌아갔으나 고성후의 아들 고군과 고마는 중도에 사라졌다.
악일비는 틈이 나는 대로 그들의 종적을 수소문해왔으나 물에 빠진 돌처럼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마주쳤다.
악일비가 돌연 품에서 손바닥 만한 죽통을 꺼내 잡아당겼다.
파시식!
불꽃이 솟으며 신호탄이 하늘로 올라갔다.
동호방은 한때 도룡대의 대주였던 초절정고수다. 재빨리 비수를 던져 신호탄을 쳐냈다.
퍼억!
신호탄이 제대로 터지지 못하고 붉은 연기를 흘리며 힘없이 떨어졌다.
동호방이 외쳤다.
“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애초에 살인멸구를 하러 왔으나 이제는 절대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동호방이 수하들을 독려하였다.
“저놈들은 애송이다. 무력대부터 처치해.”
쉬쉭!
쇠뇌가 날았다.
하지만 나무가 많은 숲에서 쇠뇌는 효용이 떨어졌다.
급기야 격전이 벌어졌다.
악일비가 이정렴과 공소후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운매를 지키게.”
운조연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고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 무사가 부축하고 경계를 하는 중이다.
이정렴과 공소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조연의 앞뒤를 지켰다.
악일비가 숭전양과 함께 달려드는 적을 막아섰다.
그는 원래도 무공이 뛰어나 휘주일룡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간 각고의 수련을 통해 무공이 일취월장하였다. 자객이 넷이 달라붙었으나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둘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쉽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크윽!”
무림맹 무력대원들이 중과부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때.
쿠웅!
마치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 땅이 흔들리더니, 진앙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기파가 터져나가며 나무들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갑작스런 천재지변에 모두 놀라 황망히 돌아보는데 진앙의 한가운데 사람이 서 있었다.
심무한이다.
무한이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남궁우와 함께 운조연을 마중하러 나오던 무한은 멀리 신호탄이 솟다가 불발되는 걸 보았다. 제대로 터지지는 않았지만 군사부 조사관들이 쓰는 신호탄이라는 걸 알자마자 몸을 솟구쳐 날아온 것이다.
무한이 나타나자 동호방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그러나.
무한이 손을 젓자 오른손목이 잘려나갔다.
“그리 쉽게 가서는 안 되지.”
싸늘한 목소리가 장내를 휘저었다.
그런데 동호방의 뒤에 있던 자객이 갑자기 동호방의 등을 찔렀다.
“크윽!”
동호방이 신음성을 내지르며 비틀거리는데 그 자객이 바로 칼을 빼서 자기 목을 그었다.
동시에 자객들이 칼로 자기 목을 그어갔다.
무한이 휙, 허공으로 솟구치며 손을 휘저었다.
퍼퍼퍽!
죽음 앞에서 잠시 주저했던 몇몇이 무한에게 제압되어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광기와도 같은 독기에 숭전양 등 후기지수들은 물론이고 악일비까지 혀를 내둘렀다.
무한이 서늘한 눈으로 살아남은 몇몇을 보았다.
악일비가 외쳤다.
“저들을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려라. 절대 자결하지 못하도록 하라.”
***
“도천부 도룡대주 동호방이 맞습니다.”
악일비가 동호방의 신원을 확인하고 무한에게 보고하였다.
“도천부 무력대 출신들은 모두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새로 들인 자들 같습니다.”
“목숨을 버릴 정도로 도천부에 대한 충성심이 컸나?”
무한은 의외였다.
“독을 썼습니다. 해약이 없으면 어차피 고통 속에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요.”
악일비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우가 치를 떨었다.
“지독하군. 이건 사파보다 더하잖아. 한때 정파였다는 자들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절강 고가장원에 급보를 보냈습니다만, 그쪽에서도 이런 사실은 모를 겁니다.”
그동안 도천부 잔당의 동정을 감시해왔던 악일비였다.
“고강후의 아들들이 의외로 무릅니다. 고성후의 아들 고군과 고마가 분가를 요구하자 재산을 반 나눠주었습니다. 그걸로 재기를 노리는 듯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지.”
남궁우가 비웃자 무한이 말했다.
“내가 처음 도천부와 상대할 때 누군가 그 말을 하더군.”
그러자 남궁우가 샐쭉하여 시선을 돌렸다. 자기가 한 말이다.
악일비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살아남은 놈들도 본거지조차 모릅니다. 게다가 이렇게 빨리 세력을 갖췄다면…….”
악일비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자 무한이 대신 말했다.
“과거 도천부와 결탁했던 문파들 중에 누군가 도움을 주고 있다는 뜻이로군.”
“게다가 한때 천산파로 전향했다가 몰락한 문파들의 후인들도 참여한 듯합니다.”
마천이 천산파라는 이름으로 중원에 진출했을 때 손을 잡은 흑도 방파들이 꽤 됐다. 마천이 물러가자 그들은 기댈 곳이 없었다.
구파일방은 마천주를 잡지 못한 분풀이를 하듯 그들을 몰아붙였고, 대부분 몰락하여 흩어져 버렸다. 애초에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흑도방파이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도천부 잔존 세력과 몰락한 흑도 방파가 손을 잡았다면 세력이 꽤 될 것 같은데.”
남궁우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무한이 말했다.
“그래서 무림맹이 있어야 하는 걸지도 몰라.”
“그게 무슨 뜻이야?”
“무림에서 뭔가를 획책하려면 우선 넘어야 할 벽, 그게 무림맹이지. 도천부 잔당이 무림에 서려면 무림맹부터 무너뜨려야지. 그게 무림맹의 존재이유야.”
“무림맹이 고기방패라는 거로군.”
남궁우가 중얼거렸다.
***
도천부 잔당이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절강 고가장원의 고수와 고현이 황급히 달려왔다.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결자해지. 우리도 잔당 색출에 참여하겠습니다.”
고강후의 아들 고수와 고현 두 형제는 한때 고성후의 칼날을 피해 실종으로 위장하며 숨어 지내야 했다.
그런데도 고성후의 후인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자 더욱 분개하였다.
그러나 형소의 눈초리는 싸늘하였다.
“두 분은 절강으로 돌아가셔서 결과를 기다리기 바랍니다.”
형소는 고씨 형제를 믿지 못했다.
고씨 형제가 억울해하였으나 형소는 완강하였다. 두 사람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자는 아예 들이지 말아야 해. 나는 누구처럼 인자무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담담히 웃었다.
“내가 인자(仁者)로 보여? 할아버지에게서 처음 배운 게 불인의 길이야.”
“아니. 너는 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무림맹주는 인자여야 하지. 그래야 세상이 따르지.”
형소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말했다.
“너는 무림맹의 얼굴이니까 그래야 해.”
무한이 벌써 무림맹주라도 된 듯 말하는 형소다.
***
무림맹주 및 후기지수 선출 비무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림맹 성밖마을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객잔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방을 못 구해 민가에서 신세를 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림맹 천하대전.
과거 천하방의 중심이었던 천하대전은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현 맹주 형일천의 의지였다.
천하대전 대청에 맹주 형일천과 장로, 그리고 집행기관의 장이 모두 모였다.
무림맹주 및 후기지수 선출 비무대회를 준비한 군사부가 그간의 일을 정리하고 비무에 대한 세부 보고를 하는 자리였다.
제갈주승이 보고를 마치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께 알려드릴 말이 있소.”
모두의 시선이 제갈주승을 향했다.
“본 비무대회에 마천과 흑천에서 참관의사를 밝혀 왔소.”
“뭐라? 방금 뭐라 했소?”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장로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갈주승이 말을 이었다.
“맹주와 몇몇 수뇌부와 상의한 결과, 받아들이기로 했소.”
“……”
“…….”
무림맹 총단에 마천과 흑천이 들어온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누군가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어 비난이 쏟아졌다.
“이렇게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도 되는 것이오?”
“장로전이 허수아비요?”
그러자 대장로 곤륜의 우학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 일은 노부가 승인했네.”
“우학진인! 어찌 그럴 수가?”
“이건 대장로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오.”
그러자 평소 사람 좋은 우학진인이 기세를 일으키며 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까마득한 연배의 노도가 호통을 치자 장로들이 입을 닫았다.
우학진인이 노안을 부릅뜨고 좌중을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마천과의 싸움에서 곤륜이 흘린 피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곤륜은 청해성에 접하고 있어 마천과의 접전에서 늘 최우선에 섰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마천도와의 마찰이 적지 않았다.
“그 피를 안다면 나의 독단을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걸세.”
“…….”
“…….”
“…….”
“사안의 엄중함으로 인해 사전에 상의하지 못한 건 미안하네. 소림과 무당에게는 알렸네. 물론 반대하였지만.”
그러자 소림의 방수와 무당의 청해가 불쾌한 낯빛을 지었다.
“곤륜이 흘린 피를 생각하여 이번 결정을 양해하여 주게.”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곤륜의 노선배가 나서자 장로들도 입을 닫았다.
제갈주승이 돌연 무한을 호명했다.
“수석조사관?”
무한이 일어나 포권을 하고 앞으로 나서서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축하사절로 오는 것이오. 그들은 무림맹에 예를 갖출 것을 약속했고, 무림맹은 그들의 안위를 보장했소. 그리고 후기지수 비무대회 본선 진출자 상위 십인과 자신들의 후기지수 십인 간의 비무를 제의해왔소.”
그제야 장로들은 이 일을 추진한 자가 무한이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