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소마의 조건은 중원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마천의 위협에 시달리는 감숙과 산서, 섬서와 사천 등에서는 무한을 지지할 것이다.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군.’
무한은 피전격이 남기고 간 말도 잊지 않았다.
- 정도 놈들은 참 희한한 짓거리를 한단 말이야. 맹주를 비무로 뽑다니.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 알지? 센 놈들이 비무에 나가지 않으면 쭉정이가 맹주가 되는 거 아냐? 쭉정이가 제대로 맹주 노릇 하겠어? 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건지… 근데, 자신 있나? 맹주 자리에 오르면 그때는 중원 흑백의 명운을 걸고 한판 붙자.
말은 길지만 맹주 비무대회에 오르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천과 흑천의 수장들이 무한이 무림맹을 맡기를 원한다.
오히려 심군하와 진소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무한이 말했다.
“오래전 정마대전과 같은 파국은 아니었지만 감숙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소. 그 원한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오.”
마뇌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봉쇄로는 이런 상처를 치유할 수 없소. 마천은 흑천과 다르오. 벽을 쌓고 교류가 끊어지면 원한과 증오는 더욱 강고해질 것이오.”
마뇌가 흠칫, 놀라 무한을 보았다.
“나는 벽을 세울 생각이 없소. 이 뜻을 마천주께 전해주시오.”
마뇌가 잠시 생각하곤 일어나 정중히 예를 취했다.
“천하를 품은 그 마음,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
무림맹주 선출 비무대회가 다가오면서 중원이 떠들썩했다.
무림맹에서는 맹주 선출 비무대회에 앞서 후기지수를 선발하는 비무대회도 치르겠다고 발표하였다.
출신 문파와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선발하고, 무림맹 무고에서 수련할 기회와 요직에 등용할 것이란 내용이 발표되며 젊은 무인들이 환호하였다.
대파와 세가는 당황하였다. 심지어 무림맹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이는 자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맹을 스스로 깨야 하는 모순에 봉착했다.
대파와 세가의 반발이 거세지자 무림맹은 한 발 더 나아갔다.
후기지수 비무대회 예선을 출신문파와 이름을 가린 채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긴가민가하던 무림의 젊은이들도 삼삼오오 무림맹으로 향했다. 본선에만 진출하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무림맹에서 직책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하각지에서 수많은 이들이 몰려오니 무림맹으로 향하는 관도는 무림인들로 붐볐다.
병장기를 든 이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니 걸핏하면 싸움이 일고, 사상자도 생겨났다.
***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실.
형소가 무한에게 긴급회의를 청했다. 소소, 남궁우 등과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형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무림맹으로 오는 길 곳곳에서 싸움이 이는데 사상자도 꽤 되나 봐. 그냥 둘 상황이 아닌 듯해.”
“칼 들고 싸우는데 죽는 이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 개개인의 일까지 맹에서 개입할 수는 없어.”
남궁우가 말을 받자 소소가 형소 편을 들었다.
“그들이 여기로 오는 건 비무대회 때문이야. 맹에서도 책임이 있지.”
남궁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림맹은 애들을 돌보는 보모가 아니야. 맹에서 필요한 건 무사라고.”
“단순한 다툼이라면 맹이 개입할 필요 없지. 그런데 조직적인 움직임이 느껴져서 그래.”
듣고 있던 무한이 서늘한 시선으로 형소를 바라봤다.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무한은 그동안 중원 각파의 비리를 척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움직여왔다. 형소가 들고 온 사안은 최근 벌어진 일이라 그도 이제 처음 듣는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사상자들 중에 제법 실력이 있는 후기지수들이 많아.”
“……”
“공교롭게도 대개 중소문파 출신이거나 따로 독행(獨行)하는 후기지수들이지.”
남궁우가 입을 쩍, 벌렸다. 형소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설마, 유력한 후보들을 누군가 미리 제거하고 있다는 거야?”
남궁우는 차마 누군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대파나 세가 어디선가 그런 짓을 자행했다면 그건 무림공적이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그런 짓까지 할 자들은 아니야. 오만하고 독단적이지만 자기들만의 선은 지키는 자들이지.”
남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건 누군가 무림맹 비무대회를 기회로 중원 무림의 분열을 획책하고자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봐.”
형소가 물었다.
“그럴 만한 곳이 있을까?”
“어디 한둘이겠어. 혐의를 두자면 당장 마천, 흑천, 흑월부터 거론되겠지.”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세 곳은 그가 잘 아는 곳이다.
“그들도 아니야.”
“그럼 대체 어디지?”
무한이 모두를 보며 대답했다.
“새로운 악은 끊임없이 생겨나지. 구악(舊惡)이 새로운 악에 잡아먹히는 것 또한 자연의 순리 아니겠어. 무림맹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끊이지 않는 악을 막기 위함이잖아?”
무한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셈이야?”
“찾아야지. 숨어서 장난치는 놈들을.”
무한은 조사관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어느새 조사관은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군사부 조사관의 조직이 커지며 아예 독립된 조사기관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동시에 조사관 조직의 비대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근 무림맹이 얻은 성과는 대부분 조사관들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는 맹주가 관장하는 집행기관이나 장로전보다 군사부 조사관의 명성이 더 높다.
무한이 대청에 모인 조사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모두 무한의 천심공을 통과한 자들이다. 완벽한 자들은 아니지만 최소한 맹을 배신하거나 독직할 자들이 아니다.
그 중에는 한때 천하방 청의단주를 맡았던 악일비도 있었다.
무한은 악일비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조를 나눠 무림맹으로 오는 길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조사한다. 초점은 분쟁 배후에 숨어 있는 세력을 파악하는 데 있다.”
무한이 간단히 설명했으나 훈련된 조사관들은 바로 알아들었다.
“각기 무력대 이개 조를 지원하겠다. 반드시 단서를 잡아와라.”
“알겠습니다.”
조사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흩어졌다.
삼삼오오 회의장을 빠져 나가는 조사관들을 보며 남궁우가 우려의 눈빛을 띠며 말했다.
“조사관들이 모두 모인 건 처음 봐. 맹주부나 장로전에서 은근히 견제할 만해.”
남궁우는 군사부 군사로 무한을 전담하는 독특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군사부와 조사관들의 중간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런 남궁우도 조사관이 모두 모인 것은 처음 봤다. 그만큼 무한이 이번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궁우는 다른 점을 걱정하였다.
무한이 말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완벽한 조직은 없어. 한때 가장 효율적이었던 조직도 시간이 가면 적폐가 쌓이게 마련이지.”
무한도 남궁우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걸 개혁하는 건 다음 세대의 몫이야. 우리가 천하방을 해체했던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만든 조직을 허물고 더 나은 체제를 만들고자 하겠지.”
남궁우가 가볍게 탄식하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짓고 허무는 게 세상이라면 너무 허무하잖아.”
무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겠지.’
***
악일비는 한 무리의 사람들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한때 서현색마를 잡기 위해 모였던 휘주용봉회에 소속되었던 이들이다.
모두 낯익은 이들이기에 지금이라도 가서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무가 우선이다.
악일비가 따르는 것도 모르는 채 무리는 웃고 떠들며 길을 가는 중이다. 무림맹이 멀지 않으니 긴장이 풀린 것이다.
조령방 숭전양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형, 정말 조사관에 지원할 생각이오? 거기는 문턱이 무척 높고, 훈련도 엄청 고되다고 들었소.”
이 형이라 불린 자는 남궁세가 연회에서 무한에게 도전했던 이정렴이다.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 하지 않겠나? 수석조사관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분골쇄신할 참이네.”
두 사람 외에도 공소후와 두 명의 여자가 함께 길을 가는 중이다.
휘주에서 여기까지 먼 길이었으나 무림맹이 지척이고 휘주 후기지수로 불렸던 이들이 다섯이니 거침이 없었다.
그들이 숲속을 지나는데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크게 웃고 있는 이정렴을 흘깃 보더니 시비를 걸었다.
“새끼들, 주둥이로 무공을 하나. 무척이나 시끄럽군.”
“…….”
이정렴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귓구멍이 막혔나? 아가리 다물고 다니라고 했다.”
“뭐라?”
이정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숭전양과 공소후를 보았다.
숭전양은 상대가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상에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귀하가 시비를 거는 이유가 뭐요?”
“뭐긴, 너희가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나며 칼을 들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쉬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살기를 뿜었다. 각기 다른 일행인 줄 알았는데 모두 한패였다. 이어, 숲속에서 십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가 뭐냐?”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정렴이 물었다.
“크크. 알아서 뭐하게. 네놈들은 길에서 너무 떠든 죄로 죽는 거다. 물론 여자들은 살려줄 수도 있다만…….”
놈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자들을 보았다.
숭전양이 검을 뽑았다.
“자객이로군.”
“이제 알았냐?”
최초 시비를 걸던 자가 휙, 몸을 날려 오며 도를 휘둘렀다.
숭전양이 마상에서 튀어오르며 검을 휘저어 막았다.
채챙!
숲속은 순식간에 난전장이 되었다.
숭전양 등은 휘주용봉회에 들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은 데다 합공능력이 뛰어났다.
숭전양이 외쳤다.
“무력대 출신이야. 조심해.”
“어억! 이건 남궁세가의 검법이야!”
이정렴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남궁세가를 자주 들락거렸기에 남궁세가의 검법에 대해서도 잘 안다.
“아니야. 남궁세가가 아니야. 흉내 내는 것뿐이라고.”
숭전양과 이정렴은 상대를 막아내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해치고 남궁세가에게 뒤집어씌울 참이다.
“아악!”
여자 무인 하나가 허벅지를 베여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숭전양 등이 여자 무인을 중심으로 모였다.
자객들이 무리를 포위하였다.
“쉽게 끝나겠군.”
언제 꺼내들었는지 자객들이 쇠뇌를 겨눴다.
숭전양 등은 당황하였다.
포위된 채 집중적으로 쇠뇌 공격을 당하면…….
그때,
쉬쉭!
어디선가 쇠뇌가 날아와 자객들의 몸에 꽂혔다.
퍼퍽!
“산개하라.”
자객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경계를 하였다.
악일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구나.”
***
“운조연이 온대. 거의 다 왔대.”
남궁우가 서신을 보고는 반가워하였다.
“운조연?”
“휘주용봉회 생각 안 나?”
“아, 거기 모인 사람을 다 기억하라는 건 아니겠지?”
“휘주용봉회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같이 온대. 이번 후기지수 비무대회에 참가하려고.”
남궁우가 일어났다.
“마중 나가야겠다.”
“같이 가지.”
무한이 따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