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무한은 부모 심군하와 진소향의 안위를 염려하여 중경 하가보 하기주에게 호위를 부탁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흑월주 무흔이 직접 흑월도를 이끌고 와서 심군하와 진소향을 호위하였다.
물론, 암중에서 호위하였기에 심군하와 진소향은 물론 마중 나간 하기주도 알 수 없었다.
무한 역시 피전격과 함께 악양에 들어온 후, 자신을 찾아온 무흔을 만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흑월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은밀하였다.
무한과 무흔은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무흔이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흑월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저기 보이는 달의 뒷면을 뜻합니다. 결코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곳, 흑월은 애초에 그런 곳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무흔은 흑월주가 되었음에도 어머니 심군하는 물론 무한을 주군으로 대했다. 그는 한번 결정하면 죽을 때까지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흑월은 늘 주군의 뒤에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무흔이 사라졌다.
무한은 무흔이 남기고 간 술잔에 비친 달을 오래도록 보았다.
무엇이 정파이고 무엇이 흑도인지…….
이미 오래 전 그만의 기준이 세워져 있었으나 새로이 새기는 밤이었다.
다음 날.
심군하와 진소향이 하기주와 함께 악양에 들어왔다. 무한이 직접 마중 나가 화청루로 모셨다.
하기주는 그 사이 일문의 수장다운 면모를 갖췄다.
“문평은 잘 있습니까?”
“이제 제법 한 몫을 한다. 사제들이 들어오니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다.”
오래전 멸문지화를 당한 하기주는 가까운 친족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를 몇 더 들였다고 한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럴 건 없고, 조만간 문평을 무림맹으로 보낼 생각이다.”
하가보도 무림맹 소속으로 들어오겠다는 뜻이다. 천하방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한 하기주로서는 의외의 결정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가보 일백여 목숨으로 일천 목숨을 구한 게 아니냐. 그래서 비정한 강호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만,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를 것이다. 문평이나 잘 돌봐주거라.”
***
정파의 영역에서 오대세가의 가주인 남궁무룡의 앞길을 막는 자는 없었다.
남궁무룡은 황산여음과 함께 조용히 악양에 들어왔다.
사룡삼봉이 악양에 들었으나 거리의 모습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외지인이 많은 악양의 특성이기도 했다.
여전히 흑천주와 마천주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는 정파 사람들은 악양 외곽에서 숨어 있었고, 자신들의 수장을 지키기 위해 온 흑천과 마천도들 역시 곳곳에 은신한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검대와 무적대, 그리고 무림맹 군승대는 변복을 하고 잠행하였다. 그러니 정파도, 흑천이나 마천도들도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무인이 부쩍 늘어난 느낌은 들었으나 악양 거리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보름을 맞은 악양루는 저녁에 오히려 사람들로 붐볐다. 야트막한 언덕 주위의 주루는 몰려든 시인묵객들로 붐볐다.
동정호 하늘 위에 둥근 달이 떴다.
사룡삼봉은 사람들과 섞여 악양루에 올랐다.
무한은 누대 아래서 악양루를 지켜보았다. 무한이 지키고 있으니 무림인들은 감히 악양루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저 봐라!”
“신선이 하강한 건가?”
악양루 삼층에서 연달아 신형이 솟구치더니 하늘을 날아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무한이 보니 피전격과 소마, 남궁무룡과 황산여음 그리고 진소향이었다.
다섯 줄기의 인영이 강가를 달리다 군산을 향해 넘어갔다.
누군가 미리 준비한 듯 중간 중간 고깃배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를 징검다리 삼아 순식간에 군산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군산에서 천지를 흔드는 굉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회합이라더니, 비무였던 거로군.’
무인들이 정당하게 겨루는 것이라면 비록 생사결일지라도 끼어들 수 없다.
무한이 누대에서 군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심군하와 천소향이 다가왔다.
무한의 시선이 팔을 잃고 펄럭이는 심군하의 소매를 향했다.
그러자 심군하가 웃으며 말했다.
“무공을 잃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구나. 저런 무시무시한 자들과 겨루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고는 천소향을 보며 말했다.
“이만 내려가자꾸나.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는 것이겠지.”
산달이 가까워 몸이 무거운 천소향을 배려한 것이다.
무한이 심군하와 천소향과 함께 언덕을 내려와 화청루에 들었다.
사룡삼봉의 군산 비무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호숫가 곳곳에 무림인들이 은신하여 밤새 지켜보았다. 비무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누가 승자가 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화려한 누선이 군산 부두에 닿았고, 다섯 사람이 산에서 나와 배에 올랐다.
모두 멀쩡하니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누선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승부의 결과를 기다리던 무림인들이 허탈해하였다.
무림의 이목을 모았던 사룡삼봉의 회합은 그렇게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진소향은 오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진소향이 무한을 불렀다.
“네가 이번 회합을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애를 썼다고 들었다.”
“자칫하면 정마대전이나 흑백대전이 다시 일어날 뻔했지요.”
무한이 반쯤 농을 섞어 말하자 진소향이 약간 의외라는 듯 보았다.
그간 못 보던 사이 아들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오래전 약속도 지켰으니 이제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후.
소마가 은밀하게 찾아왔다.
“피전격을 확실히 눌러놨으니 당분간 날뛰지 못할 것이다.”
소마가 득의에 차서 말하자 무한이 속으로 웃었다.
피전격이 이미 전날 찾아와 소마에게 따끔한 경고를 전했으니 앞으로 마천이 중원에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이기고 누가 진 거야?’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소마가 품에서 첩지와 서찰 봉투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뭡니까?”
“서찰은 마뇌가 보낸 것이다. 첩지는, 네가 무림맹주를 맡는 동안 마천은 공식적으로 중원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내 증서다.”
무한이 의아한 눈으로 보자 소마가 말했다.
“천하방주에 올랐다기에 정치에 좀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구나. 천하방과 무림맹은 확연히 다르지. 이 첩지가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것이니 잘 보관해라.”
소마가 떠나기 전 한마디 하였다.
“천산에 온다는 약속은 지켜라.”
소마가 간 뒤 무한은 마뇌의 서찰 봉투를 열었다.
“…….”
다음 날은 남궁무룡에게 연락이 왔다. 오시에 약속 장소인 악양루에 올랐다.
남궁무룡이 전망 좋은 오층 자리에 조촐한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이 오르자 앉기를 청하고 술을 따랐다.
“자네 덕분에 무사히 회합을 치르게 됐네. 이건 그에 대한 감사의 술이네.”
무한이 술잔을 받아 마시며 빙긋 웃었다.
“대단하신 분들이더군요. 사적 회합에 강호가 진동했습니다.”
“남궁우 그 녀석과 어울리더니 농이 많이 늘었구먼.”
술잔을 비운 남궁무룡이 잔을 내려놓으며 동정호를 내려다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오 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흘렀어.”
남궁무룡이 사룡삼봉 회합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
악양 사룡삼봉 회합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무림의 주요 세력이 움직인 큰 사건이었다.
무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조용히 끝났으나 여파는 오래갔다.
특히 구파는 이제 무한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무림에 무한의 출생신분과 함께 피전격, 소마와의 인연이 다시 거론되었고, 거기에 더해 악의적인 음해까지 흘러나왔다.
- 심무한이 무림맹주에 오른 뒤 흑천, 마천과 손잡고 무림을 지배하려고 한다.
사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음해였으나 많은 이들이 그리 믿었다.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군사부 수석조사관으로서 문파 간 분쟁이나 악행을 저지른 문파를 색출하여 하나하나 척결해갔다.
그런 무한에게 환호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
다시 봄이 왔다.
무한이 아무도 모르게 무림맹을 떠나 길에 올랐다.
사천 어딘가에 이른 무한이 한 마을에 들어섰다.
평범한 마을이지만 규모는 제법 커서 수백 호에 이르렀다.
봄을 맞아 길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의 손길은 분주했다.
무한이 마을 저잣거리 찻집에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와 예를 취했다.
마뇌였다.
무한이 마주 예를 취하자 마뇌가 맞은편에 앉았다.
“형님의 유해를 모실 수 있게 배려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무한이 담담히 말했다.
“내가 황제라도 된 듯 말하는 구려. 아니, 황제라도 남의 개인사에 개입할 수는 없을 것이오.”
마뇌가 공손하게 말했다.
“황제 그 이상의 분 아니십니까? 사황자가 진북왕이 되어 황도를 떠난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 먼 천산에서 구중궁궐의 사정까지 듣다니, 역시 마뇌라 불릴 만하오.”
무한의 시선이 길을 달리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향했다.
한 녀석이 가다가 엎어지자 울음을 터뜨렸다.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일으켜 달래자 이내 눈물을 닦고는 무리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마뇌가 아이들을 보더니 탄식하였다.
“딱 저만한 나이였겠군요. 우리 형제에게도 저럴 때가 있었습니다.”
한때 오가촌으로 불렸던 마을이다. 마천에 의해 오가촌 사람들이 거의 죽고, 이제는 마촌이라 불린다.
마뇌는 지난번 소마를 통해 손우자의 유해를 오가촌에 묻을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무한이 자신이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자 마뇌가 손우자의 유해를 가지고 와서 오가 사람들이 묻힌 자리에 묻었다.
“형님이 간 길이 그릇되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지요. 어린 저보다 형님은 마을에 대한 추억이 더 많았을 테니까요.”
무한이 마을을 둘러보며 내심 탄식했다.
여기서 나고 자란 아이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자 전 중원에 복수를 하려 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었다.
마뇌도 마을을 둘러보며 말했다.
“솔직히 폐허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번화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천기자는 자신의 실책으로 오가촌이 몰락하자, 남은 후손을 찾아 마을을 재건하고 암중에서 보호하였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의 한을 씻을 수 없지만 버려진 마을로 놔둘 수는 없었다.
천하방이 암중에서 돌본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마을은 지금과 같은 규모를 이뤘다.
“나를 원망하지 않소?”
무한이 마뇌를 향해 말았다. 손우자에게 독수를 쓴 건 자신이니까.
마뇌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천산으로 와서 왜 배신을 했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마뇌의 표정은 평온했다.
“내게 가족이 있냐고 묻고는 웃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소. 그도 나도 자신의 싸움을 한 것뿐이오.”
무한이 조용히 말했다.
“마천과도 언젠가는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이오. 그때는 적이겠구려.”
“천주는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마뇌가 말했다.
무한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마의 조건은 무한이 무림맹주가 되면…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