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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25화 (225/250)

225화

방각이 굳은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저들의 아이들이 천산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십 년 후 그들이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겁니까?”

소림 장문으로서 그는 무공뿐만 아니라 불심도 깊었다. 무한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연히 알아들었다.

천하방 어린 방주가 너무 이상에 치우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방각이 탄식을 하고 말없이 돌아갔다.

***

중원의 대군이 들어오자 고원의 긴장감이 한층 높아졌다. 천하방 십이무력대 또한 당도하였다.

이제는 언제 접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무한은 성벽에 좌정하고 앉아서 온종일 고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내가 움직이기 전에는 아무도 나설 수 없다는 분위기에 모두 무한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흘렀을까?

마천 진영 뒤쪽이 열리며 한 대의 마차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천마 만세, 만만세!”

고원에 마천도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마차의 주위로 천주의 사대호위 마룡과 혈조, 풍호, 흑귀가 따랐다.

그 뒤로 일백 명에 이르는 천주의 친위대가 도열하고 들어오니 그야말로 위풍당당했다.

이윽고 마천의 본진에 이르자 마차가 멈추고 천주가 내려섰다.

“천마 만세, 만만세!”

마천도들이 재차 함성을 질렀다.

천주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성벽에 앉아 있는 무한을 보았다.

“오래 기다렸겠구나.”

“비무행은 다 마친 것이오?”

두 사람은 수백 장이나 떨어진 먼 거리였음에도 마치 바로 앞에 있는 듯 대화를 하였다.

무한은 천주의 기도가 바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 천하제일의 경지에 다다른 자의 여유가 흘러나왔다.

“네 녀석이 마지막이다.”

천주가 당도했다는 소식에 성채에 있는 고수들이 일제히 날아와 성벽에 섰다.

천주가 면면을 살피다 소마에게서 멈췄다.

“소천주, 지난 일은 용서해주마. 돌아오거라.”

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소. 이 자리에서 죽은 검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천주의 밑으로 다시 기어들어갈 수 있겠소.”

소마의 도발에도 천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군. 너도 같이 죽여주마.”

이어 천주가 구대문파 연합을 보고는 말했다.

“너희는 백 리 밖으로 나가 있어라. 내일 아침 백 리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구대문파 연합 선두에 서서 천주의 귀환을 지켜보던 방각과 청운의 표정이 침통하였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로 군림하는 그들이었으나 천주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통보한 것이다.

천주가 무한에게 말했다.

“내일 보자꾸나.”

마치 친손자에게 이르듯 말한 천주가 천천히 걸어서 본진으로 들어갔다. 마뇌가 영접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벽후가 천주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나는 감당할 수 없겠군.”

피전격은 말없이 천마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무거운 낯빛으로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남궁무룡이 탄식하였다.

“저자가 당금 천하제일인이구나.”

독왕의 눈에서 한줄기 독기가 흘러나왔다.

“내 눈에는 자신의 성취에 취해 거들먹거리는 놈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고수들은 수백 장이나 떨어진 먼 거리였으나 천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생각대로 천주의 출현을 평가했다.

무한은 좌정한 채 말이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지난번 난주에서 천주와 벌였던 접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천주는 최후의 심득을 얻으려다 혈랑의 방해로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본 천주는 놓친 심득을 다시 얻은 게 분명했다.

심득은 물건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얻기 힘들다. 오히려 평생 집착을 불러오고 영원히 얻기 어렵다. 고수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하다.

고수들이 세속의 일을 끊고 자아의 세계에 침잠하는 이유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심득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무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천주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다. 천주에게 도전을 할 때 일 푼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천주를 보곤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음을 느꼈다. 어쩌면 패할 수도 있다.

생사경에 들어 죽음을 관조하는 경지라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무한은 절지가 떠올랐다.

아버지 심군하와 어머니 진소향, 그리고 아버지가 꾸린 새로운 가족…….

그들이 보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천하방에 들어와 고립된 채 무공을 수련하면서 가족의 정이라는 건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부모가 살아 있었다. 보상이라도 하듯 원래의 가족에 또 다른 인연까지 더해 다가왔는데…….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들렀어야 했어.’

천주를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생사결을 마치고 찾으리라 했던 게 아쉬웠다.

‘나 역시 독왕 어르신 말처럼 스스로의 성취에 취해 거들먹거렸던 게 아닌가.’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무한의 시선이 저 멀리 고원 끝으로 향했다.

그런데…….

서녘 하늘에 노을이 물든 고원 끝에 몇 사람이 나타났다.

“……!”

붉은 노을을 받으며 다가오는 네 사람을 보는 순간 무한이 벌떡 일어났다.

옆에 있던 고벽후와 남궁무룡이 갑작스런 무한의 행동에 놀라 쳐다봤으나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무한은 한 마리 매처럼 노을 빛 물든 하늘을 날아 성채로 오는 이들을 향해 날아갔다.

순식간에 네 사람 앞에 다다른 무한이 소리도 없이 내려섰다.

고원의 석양을 받으며 온 이는 심군하와 진소향, 그리고 봉영영과 심원봉이다.

심군하가 무한을 보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마천의 천마와 생사결을 벌인다는 소식이 요란하더구나.”

무한의 시선이 저 뒤쪽에서 따라오는 흑선수사와 연이설, 그리고 흑월도를 향했다.

흑선수사가 무한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하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

“잘 오셨습니다.”

무한이 진심을 담아 가족을 반겼다.

진소향이 탄식을 하였다.

“내 욕심이 과했다.”

- 천하의 주인이 되어라.

만일 진소향이 무한을 천하방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 이 자리가 있었을까? 무한에게 다른 길을 열어줄 수도 있었다.

무한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게 제 길이었던 겁니다.”

무한이 어린 이복동생 심원봉을 번쩍 들어 어깨에 올렸다.

무한 일가족이 천천히 걸어서 성채로 갔다.

고벽후가 성벽에 있다 훌쩍 뛰어내리더니 심군하 앞에 내려서고는 포권을 하였다.

“멸마대 일조장 고벽후! 대주를 뵙습니다.”

심군하는 기억은 없지만 그간의 사정을 모두 들었고, 고벽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없네. 하지만 옛 전우를 보니 반갑군.”

고벽후의 눈에 격동의 빛이 스쳤다.

이어 성채가 열리고 멸마대원이 일제히 나와 도열하고는 옛 대주를 향해 예를 취했다.

심군하는 멸마대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를 직접 본 이도, 처음 본 이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새 소마와 피전격, 남궁무룡과 황산여음이 성벽에 섰다.

피전격의 낯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흑천을 넘겨받는 대가로 진소향과의 정략혼인에 대해 더는 거론하지 않기로 했지만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흑선수사가 반발하는 바람에 반쪽짜리 흑천을 물려받았으니 그로서는 여러모로 손해나는 거래였다.

“쳇! 저놈은 기억은 잃었어도 모든 걸 다 가지고 있군.”

피전격의 퉁명스런 말에 남궁무룡이 말했다.

“피 형, 나는 악양루에서 우리가 처음 모였을 때의 기억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오. 그때가 내 인생의 절정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오.”

“흥! 너는 가만 앉아 있어도 남궁세가가 손에 들어왔지. 하지만 나는 죽을힘을 다해 하나하나 얻어내야만 했다. 내 것을 잃은 적은 딱 한 번뿐이다.”

피전격이 진소향을 보다 휙, 돌아서더니 사라졌다.

소마는 말없이 다가오는 심군하와 진소향을 바라보다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시선 끝에는 사룡삼봉 가운데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따랐던 혁련향의 얼굴이 선연하다. 소마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번 결전이 끝나고도 살아남는다면 천소향이라는 아이를 찾아가봐야겠구나.’

소마의 시선이 다시 마천의 본진으로 향했다.

혁련향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피어난다.

분노가 깊을수록 소마의 웃음은 짙어진다.

***

이튿날 새벽.

마천의 진영이 움직이더니 백 리 밖으로 물러났다. 구대문파 연합과 십이무력대 등 성채 안팎에 주둔했던 무력대 역시 백 리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남을 거야.”

형소와 남궁우, 소소 등 무한의 지인들이 남고자 했으나 무한이 모두 물러나게 하였다. 사실, 그들이 남아 있는 게 더 부담스러웠다.

독왕 역시 남고자 했으나 무한이 말했다.

“당 가주에게는 독왕이 필요합니다.”

혹시나 여기서 독왕이 잘못되면 당전수의 입지도 흔들린다. 당가에는 아직도 어린 당전수를 흔들려는 세력이 남아 있다. 독왕이 마지못해 당전수와 백독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무한의 가족 중에서 심군하, 진소향이 남고, 무공을 모르는 봉영영과 아직 어린 심원봉은 신검무적대와 함께 후방으로 갔다.

그 외에 소마, 고벽후, 혈랑, 피전격, 남궁무룡과 황산여음이 남았다.

남궁무룡은 소가주 남궁악에게 모든 걸 넘겨주었다며 굳이 남았다.

황산여음이 남은 건 의외였다. 왜 남아 있느냐는 무한의 물음 섞인 눈빛에 황산여음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룡삼봉이 함께 하는 건 당연하지.”

무한은 사룡삼봉이 흑백 양도와 정사마에 걸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있음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소마가 어머니 진소향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피전격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또한 남달랐다. 흑천 사사천의 수장이면서도 수차에 걸쳐 무한에게 양보를 한 이유가 사룡삼봉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적이면서도 벗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들이 강호사에서 지워진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겠군.’

사룡삼봉이 정사마 출신이라는 걸 넘어 서로 우의를 지니고 있었다면, 각 진영의 수뇌부들은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있었으리라.

기어이 해가 떴다.

고원의 하늘에 퍼진 가을 아침 햇살은 강렬했다.

무한이 성채 앞에 서서 천주를 기다렸다.

천주의 마차가 먼지바람을 피우며 달려와 성채 앞에 와서 섰다. 천주는 사대호위만을 대동한 채 왔다.

마차 문이 열리고 천주가 내렸다.

천주는 무한과 뒤에 늘어선 이들을 훑어보았다.

‘……?’

그런데 천주의 눈빛이 무척 공허하였다. 눈앞의 사람들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 아득한 세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천주가 입을 열었다.

“천마 비무행은 의외로 실망스러웠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너희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세간에는 천하제일인 비무행으로 알려졌는데 천주는 천마 비무행이라고 말했다.

무한은 순간 느끼는 바가 있었다.

‘천마가 존재의 이유를 잃었다!’

무한은 천주가 천마로 등극한 후 겨룬 바가 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중원을 자신의 휘하에 두겠다는 야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천주는 천마로서의 존재 이유를 갈구하고 있다.

‘천주는 진위(眞僞)의 세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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