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무한은 마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천마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마천, 아니 그 이전 마교에서 천마는 제사장이자 하늘의 대리인이었고, 이 땅의 심판자였다.
확고부동한 신념의 존재가 천마인데, 지금 눈앞의 천주는 자신의 존재를 검증받고자 한다.
정상에 섰으나 그 발판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나아가 자신이 있는 이 세상이 진체인지 허구인지 의심하는 듯했다.
무한이 속으로 탄식하였다.
‘도왕, 이런 결과는 생각지 못하셨구려.’
천마는 지난 결전 이후 난주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천산파로 개칭하고 십이호교가문을 앞세워 중원을 공략하면서도 천주는 칩거하였다.
그 칩거를 깬 것이 도왕이었다.
심양조 이후 천하제일인으로 불렸던 도왕. 스스로는 천하제이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던 도왕이 천주에게 도전하여 생사결을 벌인 결과가 천마 비무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왕과의 생사결에서 이긴 후 자신감을 얻은 천주가 비무행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 것이리라.
천마가 심군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심군하 아니더냐? 살아 있었구나.”
심군하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이오. 천주.”
심군하는 정마대전 당시 혁련가의 일원으로 참전한 혁련후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무공을 잃었군.”
천마는 심군하가 무공을 잃을 걸 알고 관심을 버렸다.
천주는 이어 늘어선 이들의 면면을 살피고는 소마와 고벽후, 혈랑, 피전격을 향해 말했다.
“너희 넷은 나와 손을 섞을 자격이 있다.”
무공을 잃은 심군하 외에도 진소향과 남궁무룡, 황산여음은 자신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천주에게 도전한 자는 나요.”
무한이 천천히 걸어 천주와 십장 거리에 섰다.
천주의 잿빛 눈이 무한을 보다 탄식하였다.
“실로 기이한 일이구나.”
움직이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 흘러나오는 기운을 감지한 천주가 탄식하였다.
“만고의 기재가 이 자리에서 죽다니 애석하구나. 어떠냐? 내가 원한다면 소천주의 자리를 내주마. 너라면 무의 근본을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고자 하는 건 무의 근본이 아니오.”
“무인으로서 근본을 보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무인의 길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무인이 아니오.”
무한의 말에 천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무한이 하늘을 쳐다봤다.
아침 해가 솟는 가운데 매 한 마리가 허공을 날고 있다.
“저 하늘에서 바라본 수많은 인간들 중에 하나일 뿐이오. 나도 혁련후 당신도 저 매의 눈에는 땅을 기어 다니는 개미와 같은 존재요.”
“흥!”
천주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을 날던 매가 뚝 떨어져 천주의 손에 들렸다.
“천마의 위에 있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천주가 매를 던져 버리자 허공에서 퍽, 하고 터지며 한 무더기 혈화를 남기고 흩어졌다.
“십 리 밖으로 물러나라!”
이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강대한 기운이 형성되며 무한을 제외한 이들을 밀어냈다.
고벽후 등 무한의 뒤에 도열하고 있던 이들이 버티고자 했으나 무한이 말했다.
“천주에게 먼저 도전한 자는 접니다.”
우선권이 있음을 밝히자 고벽후 등이 십 리 밖으로 물러났다.
천주는 사대 수신호위마저 물리고 무한과 십 장 거리에서 마주하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쿠쿵, 하고 하늘에서 굉음이 터졌다.
무한과 천주는 손을 쓰지 않았다. 곧바로 마음과 마음, 심상(心象)의 대결로 들어갔다.
쿠쿵!
재차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으나 천주와 무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은 현실이 아닌 마음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천주의 뒤편 하늘에 팔이 여덟 개 달린 신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무한의 등 뒤로 거대한 산봉우리가 솟았다.
곤륜 삼도봉.
물론 신상도 삼도봉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이 그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한과 천주에게는 실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불러일으킨 심상이 격돌하였다.
쿠쿵!
가을 아침 햇살이 청명한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굉음이 터졌고, 백 리 밖에 있는 구대문파 연합과 마천도들도 들을 수 있었다.
소림방장 방각은 연달아 굉음이 터지는 하늘을 보며 침중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저들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들이구나.”
듣고 있던 무당장문 청운이 답이라도 하듯 말했다.
“심즉기 기즉생(心卽氣 氣卽生)이라는 선사의 말씀이 떠오르는구려. 저들은 이미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자들이오.”
격전장의 하늘에 울리는 굉음에 남궁우와 형소, 소소가 불안한 얼굴로 저 멀리 떨어진 성채를 보았다.
일행은 약간 높은 언덕에서 성채 쪽을 보고 있었다. 지형이 높은 탓에 백 리를 내다볼 수 있었는데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직 싸우는 거 아니지? 그럼 대체 이 소리는 어디서 터지는 거야?”
남궁우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담철조와 공곤을 비롯한 신검무적대와 독왕과 당전수를 비롯한 무한의 지인들 얼굴에는 걱정의 빛이 역력했다.
무한이 절대고수라는 건 알지만 상대는 수많은 절대고수를 꺾은 천마다. 절대고수간의 생사결 경험에서 천마가 우위에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봉영영에게는 백 리 밖 성채는 그저 한 점일 뿐이다. 어린 심원봉이 계속 어찌 되냐고 묻자 난감해진 봉영영이 남궁우에게 물었다.
남궁우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둘이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무슨 설전을 저리 하는 건지…….”
사실, 가까이서 관전하는 이들 역시 누가 우세한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 마치 석상과도 같았다.
심상 대결은 온종일 이어졌다.
아침 해가 중천을 지나 기울더니 피처럼 붉은 노을이 터졌다.
그 노을 속으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
끄아악!
천주가 죽인 매를 찾기라도 하듯 매가 터뜨린 울음이 석양이 저무는 하늘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놀랍게도 천천히 하늘을 선회하던 매가 갑자기 천주를 향해 내리꽂혔다.
순간, 천주의 미간이 꿈틀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매는 자신이 노리던 대상이 사라지자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렸다.
끄아아악!
매는 떠나지 않고 피처럼 붉은 하늘을 선회하였다.
스스스.
순간적으로 사라졌던 천주가 무한의 전후좌우에 나타났다. 이형환위가 극성으로 펼쳐지며 마치 네 사람을 쪼개진 듯했다.
천주의 손에는 피처럼 붉은 강기의 검이 들려 있었다.
네 사람의 쪼개진 천주는 각기 다른 검세를 취하고 있었다. 찌르는 것도 베는 것도 아닌 일종의 검형(劍形)이었다.
그러나 무한은 천검(千劍)이 밀려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파악!
무한의 손에 푸른 경천신검이 살아났다.
동시에 피처럼 붉은 혈검과 창공처럼 푸른 경천신검이 격돌하였다.
번쩍!
백색 섬광이 터지고 혈광과 청광이 거대한 원구를 그리며 퍼져나갔다.
뒤이어 쿠쿠쿵, 하며 굉음성이 터졌다.
하늘을 선회하던 매가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렸다.
“온종일 노려보다 해가 지니 본격적으로 싸우네.”
혈랑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소마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너는 보지 못했나? 그 싸움이야말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뭘 봤다는 말이오?”
“…….”
소마가 대꾸하지 않자 혈랑이 고벽후를 향해 물었다.
“고 마귀, 당신은 봤소?”
“…….”
고벽후 역시 답이 없었다.
혈랑이 구시렁거리면서도 멀리서 벌어지는 싸움에 눈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형이 점차 빨라지더니 관전하는 고수들도 육안으로 쫓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저 혈광과 청광이 무수한 선을 이뤄가며 격돌하는 것만 보였다.
“천마도 천마지만…… 무한, 저 녀석도 괴물이구나.”
혈랑이 새삼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인세에 다시없을 격돌에 운객과 무흔마저 은신술이 풀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두 사람의 접전을 지켜봤다.
‘이건 봐도…… 얻을 수 있는 게 없잖아!’
운객이 속으로 좌절하였다. 백일수련보다 고수들의 격전을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허튼소리라는 걸 절감했다.
수준이 맞아야 보고 깨치는 게 있지, 저렇게 아예 차원을 달리하면 봐도 건질 게 없다.
순간, 운객이 눈이 크게 벌어졌다.
두 사람의 신형이 점차 느려지고 있다. 잠시 후 무한과 천주의 신형이 완연히 드러났다.
붉은 노을이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고수들은 천천히 움직이는 무한과 천주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한과 천주는 어느 사이 내공을 쓰지 않았다. 그러자 혈검도 경천신검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서는 여전히 손에 검이 있었다.
무한이 손목을 휘젓자 내공도 쓰지 않았는데 천주 앞의 공간이 갈라졌다. 천주가 손을 들어 후려치자 공간을 가르고 들어오던 무한의 무형검이 튕겨나갔다.
이어 천주가 횡으로 긋자 천지가 갈리듯 공간이 양단되었다. 무한이 심의삼재검 천의도를 내리치자 천주의 무형검이 부서졌다.
순간 무한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천주가 무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중원으로 갈 게 아니라 너부터 죽였어야 했구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더라면 당신은 천마 비무행을 시작도 못했을 게요.”
“왜 손을 멈춘 게냐?”
“이제 당신을 죽일 생각이오.”
“뭐라?”
무한이 허리춤에서 비도를 꺼내 들었다.
“흥! 생사비도? 그게 너였더냐?”
천주가 코웃음을 쳤다.
“심상으로도 무형검으로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는데 고작 쇠붙이로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혁련후, 당신은 천마가 아니오.”
뜬금없는 무한의 말에 천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천마가 존재하오?”
“……?”
무한의 물음에 천주가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천마는 존재하지 않소. 스스로를 천마라고 믿고 있는 자가 있을 뿐이지.”
천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비도 역시 반드시 당신을 죽일 거라는 나의 믿음이오.”
무한이 비도를 쳐들었다.
“온종일 겨루고도 깨닫지 못했소? 아직도 진위를 아직 가리지 못한 거요?”
“……!”
무한이 비도를 던졌다.
쉬익!
비도가 섬광처럼 날아갔다.
천주가 움직이려는 순간, 무한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혁련후는 여기서 죽는다!”
천심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한마디 외침이자 의지였다.
순간, 천주가 움찔하였고…….
콰악!
천주의 목에 비도가 박혔다.
“……!”
천주의 눈이 더없이 크게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고한 존재, 인세를 초월한 천마가 고작 쇠붙이에 죽다니.
사실 비도는 천마의 목만 뚫은 게 아니었다.
이미 그의 영혼은 무한의 한 마디 외침에 균열이 갔고, 비도는 그 균열을 파고들었을 뿐이다.
천마의 잿빛 눈이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무한이 저 멀리 마천의 진영 쪽을 보았다.
‘마뇌…… 이걸 바란 것이냐? 대체 무슨 뜻이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