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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24화 (224/250)

224화

피전격은 무한이 흑선수사와 흑월의 도주로를 열어준 걸 잊지 않았다.

“네가 흑선수사를 빼돌리는 바람에 흑월을 놓쳤다. 어찌 보상할 거냐?”

“보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네 사정을 봐줬는데 너는 번번이 내게 피해를 입히고 있지. 이래서 내가 너를 어찌 용납할 수 있다는 말이냐?”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크게 갚을 날이 있을 거요.”

천하방을 해체한다면 피전격은 춤이라도 출 것이다.

피전격이 무한을 노려보다 말했다.

“기대하지. 소마는 어딨나? 천마에게 죽도록 맞았다던데…… 팔다리는 붙어 있나?”

피전격이 소마를 찾아갔다.

이후 피전격과 흑천 무력대는 성채 밖에 막사를 쳤다.

무흔과 운객도 슬며시 잠입하였고, 뒤이어 형소와 소소, 남궁우가 신검무적대와 함께 나타났다.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 들었어. 수고했다.”

무흔으로부터 먼저 소식을 들은 무한이 형소와 소소, 남궁우의 활약을 치하했다.

형소가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겸양을 떨었다.

“방주가 여기에 마천의 주력을 묶어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형소가 성채 주위에 포진한 마천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략 오천 가량의 마천도들은 그 기세가 십이호교가문과 사뭇 달랐다. 한눈에 봐도 마천의 정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검대와 무적대는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천하방 십이무력대는 난주에서 정비한 후 올 거야.”

담철조와 공곤, 하기주와 강문평도 왔다.

“장주를 뵙소.”

담철조와 공곤은 이제 신검산장 사람임을 자처하여 무한을 장주라고 불렀다.

강문평이 무한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사형 덕분에 강하보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습니다.”

악가박도 멀리서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아무래도 흑도 출신이었기에 여전히 한발 물러 서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감숙지부 성채가 터져 나갈 지경이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독왕과 당전수가 백독대를 이끌고 왔다.

“천마가 천하제일인 비무행을 하는데 독왕께서는 두렵지 않습니까?”

독왕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천하제일인이 아니지. 천하제일독이라면 몰라도. 천마가 무영지독을 맛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선사할 생각이다.”

이어서 남궁무룡이 아들 남궁악과 남궁호와 함께 왔다. 남궁무룡은 정천맹의 대패 소식을 들은 뒤 곧바로 다시 일백 검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남궁악 등이 패잔병을 규합하여 천하방과 공동 작전으로 대승을 거둔 뒤였다.

남궁무룡은 무한이 천마에게 도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과 함께 감숙지부까지 들어왔다.

“가주께서 이 먼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자네가 천마에게 도전했다는데 오지 않을 수 있나.”

남궁무룡의 시선이 막 대청으로 들어오는 소마에게 향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도 살아 있었군.”

소마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먼 휘주에까지 내가 죽을 뻔한 이야기가 퍼졌다니…… 이제 중원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겠군.”

“천마가 중원의 고수들을 척살하고 다니네. 그에게 패하고 살아남은 것만도 대단한 거지.”

“도도한 남궁세가의 가주가 이 황량한 고원까지 무슨 일로 온 게요? 천마와 비무라도 할 생각이오?”

“할 수 있다면 사양치 않을 것이야.”

남궁무룡의 옆에는 처음 보는 중년 미부가 있었다.

소마의 시선이 미부를 향했다.

“검룡에게 빠져 황산에 틀어박혀 산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왔소?”

“검룡이 소향을 보러 가자 해서 따라 왔네.”

검룡은 남궁무룡의 젊은 시절 별호 창천검룡을 지칭하는 말이다.

무한은 여인의 용모와 금을 메고 있는 모습에서, 언젠가 남궁무룡이 말한 황산여음이라는 걸 알았다.

“황산여음 선배를 뵙습니다.”

무한이 먼저 인사를 했다.

황산여음은 어머니 진소향과 함께 한때 삼봉으로 불렸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 심군하와 남궁무룡, 피전격과 소마가 사룡이었고, 어머니 진소향과 마천 혁련가의 혁련향, 그리고 황산여음 항적연이 삼봉이었다.

항적연이 무한을 보고 말했다.

“검룡이 그렇게 칭찬을 하더니 과연 헌앙하군.”

그때, 피전격이 나타났다.

“흥! 다들 죽은 줄 알았더니 질기게도 살아 있었구나.”

“피 형의 쟁쟁한 위명은 늘 듣고 있었소.”

남궁무룡의 말에 피전격이 말했다.

“조만간 중원 흑도를 일통하면 사룡삼봉을 모두 부를 테니 기다려라.”

피전격의 말에 남궁무룡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소?”

“내가 말했지. 중원 흑도를 일통하여 너희 정파의 콧대를 콱, 눌러주겠다고.”

“천마가 주먹을 휘둘러 정파의 콧대는 이미 주저앉은 지 오래요. 피 형까지 나설 것 없소.”

남궁무룡과 피전격, 항적연과 소마가 자기들끼리의 회포를 풀고자 대청 옆 다실로 들어갔다.

이어서 동사철이 난주 무림인을 이끌고 왔다.

“동 국주께서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실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구명지은의 은인이 천마와 대적한다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소.”

그러면서 혈랑대 쪽을 바라봤다.

무한이 빙그레 웃었다.

난주 정도의 명숙인 동사철이 흑도 출신의 사위를 맞아 마음고생이 심하다.

“사위가 걱정돼서 오신 것 아닙니까?”

“방주가 사람을 놀릴 때도 있구려.”

동사철이 민망한 웃음을 짓고는 혈랑대 쪽으로 갔다. 역시 혈랑이 무사한가 보러온 것이다.

뒤이어 소림 장경각주 방수와 무당 태청관주 청해, 공동 장문인 상청 등이 구대문파 오백여 명을 이끌고 왔다.

무한은 이들의 출현이 의외였다.

방수와 청해, 상청이 찾아왔다.

“구대문파는 정천맹과 함께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정천맹과 상관없이 소림의 일로 온 것이오. 조만간 방장께서 직접 백팔나한을 이끌고 오실 것이오.”

소림과 무당은 사문의 존장이 천마에게 당한 복수를 할 생각이다.

‘비무였다고 들었는데 이들은 마천과의 전쟁으로 비화할 생각이구나.’

천마가 정당하게 비무를 신청하였다면 그 결과가 죽음이었다 해도 승복해야 한다.

그러나 소림과 무당 등 대파는 문파의 명예가 실추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한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천마의 생사결이오. 대파가 나서서 이 자리에서 마천과 전쟁을 벌인다면 천하방주로서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소림의 지원을 반길 줄 알았던 무한이 정색을 하고 나서지 말라 경고하자 방수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탕마멸사는 중원 정도의…….”

“탕마멸사는 소림의 힘으로 하시오.”

한마디로 남의 비무에 숟가락 얹지 말라는 뜻이었다.

방수의 낯빛이 벌겋게 물들었다.

무림 태산북두 소림의 장경각주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았던가.

그러자 공동장문인 상청이 분위기를 무마하려 들었다.

“방주, 공동파는 단지 공정한 비무가 진행될 수 있도록 참관하러 온 것이오. 만일 마천이 삿된 수작을 부린다면 공동이 나설 것이오.”

공동파는 무한 덕분에 크나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영역 감숙에서 벌어지는 천마의 마지막 비무행이다.

이 싸움의 결과에 문파의 존망이 걸려 있기에 소림이나 무당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마와 나의 생사결이 마천과 중원 무림의 전쟁으로 비화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무한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니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천의 오천 정예와 이 자리에 모인 중원 무림이 충돌한다면 동귀어진 수준의 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손우자가 의도한 바가 달성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여 온 지인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다.

그런데 소림과 무당의 의도는 다르다.

소림방장이 벡팔나한을 이끌고 온다는 건 일종의 상징이다. 실제로는 수백 명의 무승들이 따라올 것이다.

소림 혼자서 마천을 감당하기는 무리다. 그러니 무당과 다른 대파의 세력도 끌어 모았을 것이다.

실제로 소림과 무당은 이번 천마와의 비무행에 당한 문파들을 규합하여 삼천 무인을 끌고 오는 중이다.

정천맹의 출정에는 형식적으로 일백 무인을 보냈지만 문파의 명예가 달린 일에는 사활을 건 셈이다.

대파에게는 천마와 무한의 생사결이 더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무한은 여기서 전쟁을 벌이려는 소림과 무당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의 차가운 냉대에 소림과 무당 등 구파는 성채 밖에 막사를 짓고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무인이 몰려든 감숙지부는 며칠 전과 달리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정파의 태두라는 소림과 무당이 마천의 소천주, 흑천의 천주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색한 일이다.

며칠 후, 대파의 무인 삼천여 명이 진군해왔다. 소림 장문 방각과 무당 장문 청운이 선두에 있었다.

방각이 선발대로 보낸 방수로부터 무한의 뜻을 전해 듣고 찾아왔다.

“천하방주를 뵙소.”

“소림 장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나, 반가이 맞을 수는 없군요.”

“방주의 뜻은 전해 들었소. 허나 우리가 물러난다 해도 마천이 과연 순순히 지켜보고만 있겠소? 어렵게 구파가 탕마멸사의 기치를 세워 들었소. 중원 정도의 안녕을 위해 해량하여 주시오.”

“따라오시죠.”

무한이 방각을 데리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저들이 마인입니까?”

무한이 마천 진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방각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무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대답했다.

“저들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졌소. 애초에 그들 스스로가 마를 자처하는데 방주가 굳이 그들을 위해 나서는 이유가 진정 궁금하오. 천하방주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면 중원 무림으로서는 크나큰 불행이니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무한이 두루뭉술하게 말을 돌려 대답을 회피하려는 방각에게 재차 물었다.

“다시 묻지요. 방장의 눈에 저들이 마인으로 보입니까?”

방각이 웃음이 걷혔다.

소림의 방장이다. 아무리 불심이 깊어도 오랜 세월 대접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제 약관에 이른 무한이 몰아붙이자 기분이 상했다.

“방주가 빈승을 시험하는구려.”

말을 돌릴 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무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제게는 대사나 저들이나 사람으로 보입니다.”

“…….”

무한이 내성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이 안에 마천도도 있고, 흑도의 거두도 있습니다. 탕마멸사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요.”

무한의 말에 방각의 낯빛이 굳었다.

말 그대로 탕마멸사의 기치를 내걸었다면 어찌 상대를 가리느냐 하는 물음이었다.

“정히 구파가 마천과 일전을 겨루겠다면 천하방은 빠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서 세상을 구한다는 천하방의 이념을 저버릴 작정이오?”

“아니, 그러기에 빠지는 겁니다.”

무한이 고원을 보았다.

“나는 저 고원에 무고한 시신이 쌓이는 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천마와의 일전은 수장끼리 이 싸움을 결판내자는 뜻입니다.”

“천마가 진다고 해도 마천은 물러가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무한이 방각의 말을 잘랐다.

“그들은 부처가 될 수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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