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언덕 아래 포위망은 풀리지 않았다. 감히 공격할 생각도 없는 듯 움직임은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내려가야겠군요. 언덕에서 밤을 샐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한과 악일비는 언덕을 내려왔다.
커다란 나무 밑에 악일비가 매어둔 말이 보였다.
“악 형은 이대로 귀방하세요.”
“알겠습니다.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방에 가면 청의단 단주로서 바쁠 겁니다.”
“원하는 바입니다. 협으로 의를 세우고, 의로써 세상을 구한다. 천하방의 이념에 부합한다면 분신쇄골할 것입니다.”
악일비가 말에 올라 지체하지 않고 고삐를 채었다. 올 때는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이었으나 밤길을 달리는 지금은 아주 가볍기만 했다.
무한은 악일비가 가는 뒷모습을 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몸을 돌렸다.
기다란 관도는 악양으로 이어진다. 무한이 움직이자 포위망도 함께 움직였다.
수십 장 떨어진 곳에 있는 공손승의 머리를 강기의 검으로 주머니 속 물건 취하듯 한 걸 봤으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무한은 어둠이 내린 관도를 따라 걸어갔다.
한여름이었기에 해가 지고 나서도 무더웠다. 길가의 무성한 수풀이 수시로 흔들렸다.
어둠 속에 은신한 자들이 포위망을 형성한 채 무한을 따라왔다.
성밖마을에 이르렀을 즈음 무한이 멈췄다.
크지 않은 차양 아래 노란 등이 걸렸고, 한 사람이 나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의 장년인은 천하방 패천대주였던 형일천이다. 지금은 정천맹 부맹주이니 무림에서의 신분이 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여름밤 관도 가에서 안주도 없는 술을 마시고 있다.
형일천이 흘깃, 무한을 보더니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서 술 한 잔 하지 않겠나?”
무한이 차양 안으로 들어가 형일천과 마주 앉았다.
“정천맹 부맹주께 이런 아취(雅趣)가 있으셨군요. 해 저문 관도에서 독작(獨酌)이라니요.”
형일천의 눈에서 광망이 번뜩였다.
“말을 돌리지 마라. 내가 왜 여기서 너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말이냐?”
무한이 정색을 하였다.
“솔직히 말씀드려 모르겠습니다. 정천맹과 천하방이 한 뿌리에서 갈라졌지만 같은 정도를 걷고 있지요. 그런데 왜 본 방주를 압박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한 뿌리라…… 공손승을 단칼에 죽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기가 막히군.”
“책사라는 이가 죽을 자리를 모르고 왔다면, 당연히 목숨을 잃고 마는 거지요.”
“공손승의 죽음으로 천하방과 정천맹은 확실히 적이 되었네. 같은 정도라지만 길이 다름이 확인됐지.”
형일천이 술을 따라 무한에게 건네며 말했다.
“과거 한 뿌리였던 인연을 생각하여 한 잔 주지.”
무한이 잔을 받아 벌컥, 술을 마셨다.
“독이 없다고 자신하는가? 겁도 없이 마시는군.”
“형일천이라는 이름의 무인이 술에 독을 타는 비열한 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형일천이 묵묵히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형제의 인연이 끊어졌으니 본론을 말하지. 형소를 보내게.”
형일천의 안색은 더없이 차가웠다.
“제가 잡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무한이 말했다.
“얼마 전까지 형소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러더군요. 형소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친구의 일이라고.”
무한이 술병을 잡아 자신과 형일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친구의 부친에게 드리는 술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친구로서 한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형일천이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의 잔을 내려다봤다.
“저는 친구로서 형소를 믿고 의지합니다. 부맹주께서는 아비로서 아들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내가 내 아들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다는 말이냐?”
“믿고 맡긴다는 의미는 돌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냉정한 무한의 말에 형일천이 흠칫하였다.
“들으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감숙에서 마천의 대군과 싸웠습니다. 그의 검에 수많은 마천도가 스러져갔지요.”
“……?”
“형소의 검은 단순하지만 빠르고 정확합니다. 경지에 다다랐으니 막을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까지 수천, 수만 번을 휘두르고 찔렀지요.”
형일천의 눈에 의아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울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형소가 아비인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형일천은 독자인데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아들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항상 자신의 그늘 아래 두고 보호하려 해왔다.
“형소가 심의삼재검을 익힌 이유를 아시지요?”
“…….”
“오로지 부친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지요.”
무한의 목소리에는 형소와 함께 심의삼재검을 익힌 세월이 담겼다. 그러니 한마디 한마디가 진중하게 다가왔다.
“그 누구도 그리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모두가 무시하는 그 길을 형소는 십년 가까이 걸었지요.”
담담히 흐르던 무한의 어조가 냉정해졌다.
“이번에 형소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친구인 저를 돕겠다며 검천부에 의탁했지요.”
형일천의 미간이 우그러들었다.
형소가 검천부에 의탁하는 바람에 패천부에서 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제 정천맹 부맹주가 됐으니 당연히 자신을 따라와야 하는데 여전히 무한 곁에 머물고 있었다.
“무인 형소를 인정하시는지요?”
이 한마디 물음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형일천의 별호가 무왕이다. 천하사패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리는 그는 아들이 삼재검을 익힌다는 걸 부끄러워하였다.
“…….”
형일천은 무한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한이 술잔을 들어 벌컥, 마시고 시선을 돌렸다.
“패천부에 패천십결(覇天十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권왕의 패왕권을 대성한 자들로, 권왕과 무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지요?”
형일천이 내심 흠칫하여 무한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 자리에 나올 때 여차하면 무한을 죽일 작정으로 왔다.
형소를 돌려주지 않으면 무한을 죽여서라도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패천십결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무한이 말했다.
“한 사람.”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날아와 차양막 앞에 툭, 떨어졌다.
마혈이 짚인 듯 의식을 잃고 엎어진 사내는 어깨가 딱 벌어진 체구에 허벅지가 통나무처럼 굵었다. 권을 익힌 자였다.
“또 한 사람.”
그러자 다시 한 사람이 날아와 먼저 엎어진 사람 위에 떨어졌다.
형일천이 대경실색하였다.
저들이 패천십결이다.
은밀하게 이 자리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왜 저리 볼썽사나운 몰골로 내동댕이쳐진다는 말인가.
“누구냐!”
형일천이 벌떡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패천십결을 암습할 자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또 한 사람.”
다시 한 사람이 내동댕이쳐졌다.
무한이 담담한 얼굴로 형일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할까요?”
“이게 무슨 짓이냐?”
“무왕의 자부심을 누르려면 어쩔 수 없지요. 더 높은 하늘이 있음을 보여주는 수밖에요.”
그사이 다시 한 사람이 날아와 내동댕이쳐졌다. 마치 통나무를 던져 쌓는 듯했다.
‘패천십결이 모두 당했다는 말인가?’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면 권왕이나 자신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다.
오죽하면 십결, 완성된 자라는 의미의 별호를 붙였겠는가.
그런데 이리 허무하게 당하다니.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패천이 있다면 살천(煞天)도 있고, 그 궁극의 자리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지요.”
무한이 보기에 운객은 이제 살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감숙에서의 싸움 이후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 운객은 이를 자신의 무공으로 소화해냈다.
무왕 형일천도 운객의 은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패천십결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그만 하라!”
형일천이 기어이 승복하였다. 이대로 패천십결이 모두 내동댕이쳐진다면 앞으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이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인 저는 형소의 무위를 잘 압니다. 패천십결 그 어느 누구도 형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한은 관도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소가…… 형소의 검이 그리 대단하다고?’
형일천이 망연자실하여 쓰러진 십결을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인정할 수 없었다.
패천십결은 근골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권왕과 자신이 직접 키운 고수들이다.
그런데 고작 삼재검만 익힌 형소를 상대할 수 없다고?
형일천은 석상처럼 굳은 채 어둠에 물들어갔다.
***
악양 성밖마을 부둣가.
거리는 천하명승지답게 밤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무한은 유독 사람들이 붐비는 객잔 앞에 섰다.
일층, 환하게 밝혀진 반점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탁자에 앉거나 서 있는 이들은 반점 중앙에 선 사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른 가량의 사내는 키가 크고 잘 다듬은 몸에 안정된 기운을 갖춘 듯 형형한 안광을 뿜고 있었다.
창밖으로 사내가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악양성주가 무인을 이리 괄시하다니. 정천맹으로 가서 맹주에게 정식으로 해결하자고 요청해야 하오.”
무한이 잠시 들어보니 악양성이 병기를 든 무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듯했다.
“악양성만 그런 게 아니네. 나는 하남에서 오는 길인데 그곳의 주요 성도들도 마찬가지네. 무림인을 마치 도적 취급하더군.”
반점 안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무림인들이었다.
“듣자하니 조정에서 대파와 세가에게 천산파를 몰아내라는 명을 내렸다던데 어찌 이리 무림인을 푸대접한단 말인가?”
“가세. 맹으로 가서 맹주에게 고하고, 이를 바로 잡으세.”
반점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군산도로 넘어갈 듯 달아올랐다.
무한은 애초에 여론을 주도한 사내가 일부러 나섰음을 알았다.
사내는 교묘하게 무림인들로 하여금 정천맹에 의지하게끔 유도하였다.
‘이런 자잘한 수는 공손승의 책략이 아니야.’
무한은 손우자와 함께 사라진 삼군사 문요가 떠올랐다. 그 역시 정천맹에 의탁한 모양이다.
무한이 객잔 반점에 들어섰다.
“밤길을 오신 모양이군요. 어서 들어오시지요.”
점소이가 반가이 맞았다.
밤늦게 객잔에 들어서니 한두 사람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고 누군가 알아보았다.
“심무한!”
“뭐? 새로이 천하방주에 오른 그 심무한 말인가?”
사람들이 놀라 무한을 쳐다보았다.
무한이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하였다.
“무림 동도들께서 밤늦도록 회합을 가지고 계셨군요. 이왕 저를 알아본 사람이 있으니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사람들이 무한을 보았다.
두 번의 탈태환골을 겪으며 약관에 이른 무한은 헌앙한 모습에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신비한 기운이 흘렀다.
무한이 반점 안을 둘러보니 대개 무림을 떠도는 낭인들이었다.
“사실 방금 들어오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관아에서 무림인의 출입을 막는다는 게 사실인지요?”
“그렇소. 무인을 부당하게 천시하는 이런 방침은 용납할 수 없소.”
여론을 주도한 사내가 말했다.
“천하방은 홀로 고고하여 우리 같은 낭인들의 처지는 살피지 않으니 어쩌겠소. 정천맹에 의탁하여 무인을 억압하는 부당한 방침을 시정하고자 하오.”
무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죠. 천하방은 이제 무림의 일에 간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