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210화 (210/250)

210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천하방이라는 명칭 자체가 천하 정도를 관장한다는 의미인데, 그 지위를 포기한다는 말인지요?”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방이라는 명칭은 천하 정도가 붙여주었지요. 거두어가는 것 또한 천하 정도에게 맡기겠습니다.”

“…….”

반점 안의 무인들은 반신반의하였다.

천하방 소속 백여 문파가 중원 곳곳에 퍼져 있고, 천하방을 후광 삼아 세도를 부리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이 이를 용납하는 건 그래도 천하방 무력대가 산적이나 수적, 흑도의 문파가 문제를 일으키면 나서서 해결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강호의 일에 천하방이 손을 뗀다니 심정이 복잡했다.

“그건 방주의 뜻이오, 아니면 천하방 소속문파 모두의 뜻이오?”

사내가 따져 물었다.

무한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정천맹이 천하방을 쪼개고 나갔소. 이는 소속문파의 뜻이 이미 갈렸음을 의미하오.”

“정천맹을 결성한 것은 천하방이 대파와 세가와 협력하지 않고 독주하는 행태를 바꿔, 중원 정도의 진정한 맹으로 거듭나기 위함이라 들었소.”

사내의 언변은 훌륭하였다.

“이제 천하방에서 중원 정도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다니, 정천맹의 위상이 더욱 중요하겠구려.”

“하지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지 않나?”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

역시 사내와 함께 여론을 몰아가는 바람잡이 역할을 맡은 자였다.

“그렇소. 천하방이 무림을 돌보지 않는다면 확실히 그 명칭을 반납해야 할 것이오.”

사내가 말을 받아서 결론 짓고 무한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방주라 할지라도 방의 명칭을 바꾸는 사안은 중요하니 이 자리에서 결정 지을 수 없겠지요?”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소. 천하방은 한 형제로 방주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소. 그러니 향후 방으로 돌아가면 논의하겠소.”

무한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천과 흑천이 중원으로 세력을 넓히는 이때, 정천맹을 중심으로 막아낸다면 중원 정도로서는 다행일 것이오.”

무한이 아예 중원 정도의 수장 노릇을 내려놓겠다고 하니, 사내는 물론이고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지난 삼십 년 간 천하 정도를 관장한 천하방이 사라진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천하방의 덕을 봤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는 겨울 햇볕과도 같았다. 삭풍이 부는 겨울, 옅은 햇볕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으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무한은 말을 마치고 점소이에게 말했다.

“방을 내주게. 식사는 방에서 하겠네.”

점소이가 무한을 이층으로 안내하였다.

사람들은 천하방주가 보통 사람이 이용하는 객방에 들자 생소해하였다. 천하방주라면 별채를 단독으로 쓰는 게 격에 맞았다.

“저자가 정말 천하방주가 맞아? 천하제일인의 후예가 맞냐고?”

“어찌 방주가 스스럼없이 무림 수장의 지위를 내려놓겠다고 하는 거지?”

처음 무한을 알아본 이조차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전신에 감도는 신비로운 기운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 점소이를 따라 오르는 무한을 향해 외쳤다.

“그러면 앞으로 천하방의 행보는 어찌되는 것이오?”

무한이 계단을 오르다 말고 반점안의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천하방은 무림의 일에 간여하지 않으나, 중원 정도 여러분을 형제로 생각하고 예우할 것이오. 형제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설 것이오.”

“…….”

무한이 남긴 말에 모두 입을 닫았다.

“중원 정도 모두가 한 형제라고? 너무 이상에 치우친 말 아닌가?”

“그렇지. 아무래도 천하방주가 현실을 모르는가보군.”

여론을 조장한 사내와 바람잡이가 초를 쳤으나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한마디가 새겨졌다.

- 천하 정도가 형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사람들의 가슴에 호연지기가 크게 일었다.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가 천하제일인의 후계자야. 진정한 천하방주이지.”

***

다음 날 아침.

무한은 악양 부두에서 배를 한 척 빌려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으로 넘어가는 기다란 부교도 있으나 이를 이용하자면 멀리 돌아가야 했다.

배는 작았다. 다부진 체구의 뱃꾼과 무한 단둘이 탄 나룻배였다.

호수를 미끄러지듯 가는 배 선두에 선 무한의 모습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았다.

뱃꾼은 감히 말을 붙일 생각을 못하고 말없이 노를 저었다.

군산 부두에 이르자 정천맹 사람들이 도열한 모습이 보였다.

무한의 통보가 이미 정천맹에 전해진 듯 기세가 무척이나 삼엄했다.

턱수염을 단정하게 빗고 목관을 쓴 중년인이 서서 무한이 타고 오는 배를 지켜보았다.

그는 설마 천하방주가 수행호위도 없이 홀로 나룻배를 타고 올지 몰랐기에 다소 당황해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나룻배가 닿자 무한이 부두로 올라왔다.

“여기서 기다리시겠소?”

무한이 은자를 건네며 말했다.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뱃꾼이 허리를 숙였다. 이 정도 은자면 배를 한 척 살 수도 있다.

중년인이 무한을 향해 다가가더니 일 장 거리에 서서 포권을 하였다.

“정천맹 접객당주 문이룡이 천하방주를 뵙소.”

문이룡은 점창의 협객으로 무림에서 명성이 높았다.

‘개방과 점창 등 몇몇 대파가 정천맹에 가세했다더니 정말이로군.’

무한이 마주 예를 취했다.

“천하방 심무한이오.”

문이룡이 말했다.

“천하방주께서 정천맹 총군사를 해치고 홀로 찾아온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소?”

문이룡은 눈앞의 청년이 범상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예우를 하였다. 몸에 밴 자세와 언행이 명문대파 점창의 후인다웠다.

“공손승을 참한 것은 그가 천하방을 무시하였기 때문이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 심무한을 경시하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나, 천하방주를 언급하며 족쇄를 채우겠다고 한 것은 천하방을 모욕한 것이지.”

“…….”

“공손승은 천하방 일군사를 역임하며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굳이 족쇄를 들고 온 의도가 무엇이겠소. 본 방주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오.”

“하지만 해명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단칼에 목숨을 거둔 것은 과했소. 그 또한 정천맹을 무시한 처사 아니오?”

무한이 가볍게 웃었다.

“천하방주가 자신의 일을 하는데 누구의 얼굴을 봐야 하는가?”

실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에 문이룡의 안색이 굳었다.

“말씀이 참으로 호기롭구려. 방주는 천하 정도가 안중에 없는 듯하구려.”

말에 가시가 돋쳤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분수를 모르고 경거망동하여 정도를 어지럽히는 자는 언제고 같은 결과를 맞이할 것이오.”

문이룡의 안색이 확, 우그러들었다.

무한이 말을 이었다.

“천하방에서 떨어져 나간 정천맹에 나는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소. 허나,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접객당주의 본분을 지키시오.”

네 일이나 알아서 잘 하라는 말이다.

정파의 명숙이라 자처해온 문이룡은 이 같은 수모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하하. 이제 보니 천하방주가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하구나. 나 문 모는 이런 수모를 묵과할 수 없다!”

그러면서 검자루에 손을 댔다.

순간,

쿠웅!

무한의 전신에서 묵직한 기운이 퍼져 나오며 부두를 장악했다.

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말했을 텐데? 천하방주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문이룡은 숨이 턱, 막혔다.

“내 앞에서 검을 뽑는 순간, 죽는다.”

문이룡은 무한의 한마디가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검을 댄 손이 떨렸다. 검과 함께 수십 년 강호를 누빈 검객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한이 한 걸음 내디뎠다.

쿠웅!

기파가 터지며 부두가 흔들렸다.

“으읏!”

문이룡은 물론 뒤에 도열한 이들이 땅에서 터지는 기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무한을 싣고 온 나룻배 뱃꾼은 이를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과연… 어쩐지 비범해 보이더라니. 천하방주였단 말인가? 내가 천하방주를 배에 태웠다고?’

무한이 기파를 터뜨리자 장내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왔으면 냉큼 올라올 것이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뭐하는 겐가?”

권왕의 목소리였다.

무한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군산 칠십이봉이 연이어 있는데 권왕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여 어느 봉우리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한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천맹에 호기가 넘치는 자들이 많으니, 공연히 죽는 사람 또한 많을 것 같군요.”

문이룡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천하방주가 이리 광오한 자였던가? 그가 들은 바로는 무척이나 예의 바르고 정중하다 했는데.

그러는 사이 무한이 다시 한 걸음 옮겼다.

쿠웅!

무한은 다시 한번 기파를 터뜨렸고, 사람들이 쫘악 밀려나며 길이 열렸다.

“접객당주가 안내할 생각이 없으니 스스로 길을 열어야겠습니다.”

무한의 행보에 부두에 있는 이들이 모두 놀라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간밤에 객잔에서 봤던 이들도 있었다.

객잔 반점에서 평범한 낭인에게도 정중하게 예를 취했던 천하방주가 정천맹 본산 군산에서 광오한 몇 마디를 흘려 시비를 일으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접객당주는 외빈을 모시게.”

이윽고 권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작 그랬어야지.’

무한은 권왕의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광오하게 굴었다.

천하방 시절부터 권왕은 무척 권위적으로 처신해왔다. 되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패천부의 대소사를 형일천에게 맡겼다.

무한이 문파 예방 차 찾아가 신분패를 돌려줄 때도 폐관수련을 이유로 형일천을 내세웠다.

권왕은 겉으로는 패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내심으로는 무척이나 심계가 깊고, 은밀하게 움직이기를 좋아했다.

공손승이 정천맹 총군사이나 권왕의 허락 없이 족쇄를 들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형일천과 패천십결을 보내 무한의 무공 수위를 알아보려 한 것도 권왕의 의중이다.

무한은 권왕이 도왕과 겨뤄 패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무림은 물론 천하방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권왕은 자신을 감추고 높이기에 능한 자였다.

지금 무한이 다소 광오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면 접객당주로 하여금 무한을 시험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무한은 남의 집에 찾아가 손님을 맞는 아랫사람과 다툰 꼴이 된다.

이제 무한이 오만하게 굴며 접객당주를 몰아붙이니, 그대로 두면 권왕 자신의 체면이 무너지는 상황이 됐다.

그러자 바로 아랫사람 운운하며 무한을 접객당주와 시비나 벌이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려 하였다.

이에 무한이 재차 광오하게 나갔고, 결국 권왕이 한 발 물러섰다.

무한은 접객당주를 따라 군산으로 들어갔다.

높은 패방에 정천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를 지나자 널따란 광장이 나왔다.

문이룡이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권왕께서는 저 봉우리에 계시오. 본 접객당주는 신분이 비천한지라 감히 모실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오.”

그러고는 묵묵히 예를 올리고 돌아갔다.

무한이 내심 실소를 흘렸다.

‘권왕, 무림맹주를 꿈꾼다더니 무림의 하늘이 되고 싶어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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