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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08화 (208/250)

208화

동정호.

무한은 멀리 악양이 내다보이는 언덕에서 바다처럼 너른 호수에 뜬 군산을 내려다보았다.

석양빛을 받은 군산 칠십이봉, 크고 작은 봉우리 사이에 정천맹 총단이 있다.

악양과 군산 사이 떠 있던 배들이 서둘러 포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무한의 표정은 담담했다.

잠시 후.

잿빛 땅거미가 내려설 무렵 누군가 언덕 위 소나무 아래 나타났다.

“방주를 뵙습니다.”

무한이 돌아보니 안면이 있는 자다.

“오랜만이군요. 악 형.”

나타난 이는 무한이 남궁세가에서 만났던 남악문 악일비였다.

“하대하시지요. 방주.”

“아닙니다. 형제를 존중하지 않으면 천하방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악일비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악 형이 정천맹에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지요.”

무한의 말에 악일비의 표정이 침울하게 굳었다.

그는 한때 남악문 소문주였으나 지금은 파문당한 처지였다.

“천하방을 위해 오명(汚名)을 뒤집어썼으니 이를 어찌 보상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지금은 무엇이 오명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처지입니다.”

악일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황산 일대에서 제법 이름난 문파의 소문주가 사문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썼다.

남악문은 원래 도천부 산하 문파였다.

소문주 악일비가 도천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황산 일대 문파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악일비는 남궁세가에서 무한을 만난 뒤 도천부 산하에서 나오자고 문주에게 건의를 했다가 면벽에 처해지기도 했다.

손우자는 권왕을 부추겨 정천맹을 결성할 때 그런 악일비를 점찍어 첩자로 들여보냈다.

도천부 산하 남악문 사람이 정천맹으로 그대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악일비는 사문이 도천부와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는다고 폭로하고 정천맹으로 넘어가야 했다.

악일비로서는 내키지 않았으나 문파의 안위까지 거론하는 도천부 고성후와 손우자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문을 배반한 패륜아가 되어 정천맹에 들어갔으나, 돌연 도천부가 와해되고, 남악문은 천하방을 탈퇴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악일비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남악문주는 문파를 위해 오명을 뒤집어쓴 악일비를 구제하지 않았다.

악일비는 철저히 버려진 신세였다.

그럼에도 천하방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사문을 배반했다는 자신의 오명을 언젠가는 씻을 날이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그는 군사부 비밀정보요원이었다.

악일비는 겉으로는 담담했으나 내면으로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무한은 그런 악일비를 보자 절로 남궁세가에서 열렸던 후기지수 연회가 떠올랐다.

서현색마를 잡기 위해 황산 일대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한은 때 묻지 않은 젊은 패기들을 봤다.

당시, 악일비 역시 젊은 영웅이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무한이 말했다.

“이 길로 방에 복귀하세요.”

“……?”

“악 형의 신분은 이미 노출됐습니다. 그리고 천하방은 이제 첩자를 운영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한이 악일비가 보낸 첩지를 상기하며 말했다.

“정천맹주와 구파일방의 회합 장소와 일시를 보냈지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악일비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알아낸 사실을 무한이 무시하는 듯하자 다소 분노했다.

“그건 저를 유인하는 함정입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악일비가 당황하였다.

무한의 시선이 언덕 아래를 향했다.

“지금 악 형의 뒤를 쫓아온 이들을 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겁니다.”

악일비가 무한의 시선을 따라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잿빛 어둠이 내리는 언덕 아래 미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악일비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정천맹 군사 공손승은 손우자의 수족 같은 자입니다. 당연히 악 형의 신분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가 구파일방 수장의 회합을 악 형에게 흘린 것은 나를 잡아들이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왜 오신 겁니까?”

“악 형의 안위 때문이지요.”

“제 안위라니요.”

“본 방주가 운영하는 천하방은 형제를 위험 속에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는 더러운 일을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무한은 악일비의 첩보를 본 후 결단을 내렸다.

사필염을 불러 마천과 흑천을 비롯해 천하각지 주요 문파에 잠입한 정보원에게 임무 해제를 명했다.

군사부에서 보관하는 정보원 명단을 불태우고 거취 또한 본인의 의사에 맡겼다. 본방으로 돌아오는 자는 받아주고, 다른 뜻을 가진 자에게는 그간의 보상과 함께 보내주도록 하였다.

“악 형이 귀방하면 걸맞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천하방 후기지수들을 규합하여 청의단(淸衣團)을 만들고자 합니다. 악 형이 단주를 맡는다면 본 방주의 걱정이 덜어질 겁니다.”

악일비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청의단.

명칭에서 무얼 하려는 모임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다.

“남궁세가에서 열렸던 후기지수 회합이 천하방에서도 열렸으면 좋겠군요.”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언덕 아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악일비가 언덕 아래를 보며 탄식하였다.

“방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군요. 저 때문에 방주가 위험에 처하게 됐습니다.”

악일비가 손에 든 장검을 뽑았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방주께서는 일단 피하시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건 본 방주입니다.”

무한이 담담히 웃으며 말하고는 언덕가로 걸어가서 섰다.

“공손 군사, 오랜만이오.”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일대 하늘을 덮었다.

악일비가 놀라 무한을 보았다.

신임 방주의 무공이 절대지경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남궁세가에서 무한의 무공이 대단한 경지라는 걸 보기는 했지만 불과 일 년여 사이에 절대지경이라니.

신임 방주의 무위를 과장하여 천하방의 위세를 알리려는 걸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무한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절로 뛰었다.

마치 하늘에서 울리는 듯 천지를 진동하는 목소리는 육합전성을 뛰어넘는 신공이었다.

이는 무한이 천심공을 발휘한 진음(眞音)으로, 삿된 자의 마음을 뒤흔들고, 정대한 자의 의기는 북돋는 효과가 있었다.

“크흐흐. 과연 부주의 신공은 대단하구려.”

언덕 아래 횃불이 밝혀지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단정한 문사복을 갖춰 입은 공손승이 음침한 얼굴로 서서 언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주위를 포함해 악양 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쳤소. 방주가 순순히 따라온다면 굳이 여러 사람 고생할 필요 없을 것이오.”

“권왕이 보자는 것인가?”

“맹주께서는 어린 조카와 굳이 대립하기를 원치 않소. 따라오시겠소?”

“어려울 것 없지.”

“그렇다면 약간의 금제를 해야겠소.”

공손승이 손짓을 하자 쇠로 된 철봉과 쇠사슬, 그리고 팔목과 발목을 채우는 족쇄를 가진 이들이 나타났다.

“방주의 무공이 현묘하니 어쩌겠소. 이 금제를 받아들이면 정중히 모시겠소.”

족쇄를 본 악일비가 분노하여 무한 대신 나서서 외쳤다.

“정천맹 총군사가 이리 가증스러울 줄이야! 그게 어찌 금제란 말이냐? 목숨을 맡기라는 뜻 아니냐?”

공손승이 아랑곳하지 않고 무한을 향해 외쳤다.

“방주의 안위는 책임지고 보장할 것이오.”

공손승이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악일비가 무한에게 말했다.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건 방주를 해치려는 수작입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천하방주가 이런 수모를 당할 이유가 없지요. 죄인처럼 끌려갔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나중에 천하방 형제들을 무슨 낯으로 보겠습니까?”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니 악일비는 무한이 농담을 하는 건지 진심인지 헛갈렸다.

악일비는 낯빛을 굳혔다. 무한과 함께 혈로를 뚫으려 작심하였다.

무한이 악일비에게 말했다.

“악 형, 무의 길은 끝이 없소. 무의 단계를 나누는 방법도 다양하고, 그 수준을 평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오.”

“……?”

적이 둘러싼 상황에서 뜬금없이 무의 단계를 논하니 악일비가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본 방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연이 있었소. 하지만 가장 큰 기연은 일찍이 절대고수의 신공을 접했다는 것이오.”

무한이 소마의 마왕검벽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의 신공을 보고 언젠가는 나도 할 수 있다 생각했고, 그랬기에 그와 비슷한 무공을 펼칠 수 있었소.”

악일비의 낯빛이 진중해졌다. 지금 무한이 자신의 심득을 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다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보고 듣는 것이 바로 한계라는 것이었소. 본 방주가 그의 신공을 봤기에 펼칠 수 있었다는 걸 깨닫자 이런 의문이 들었소.”

“…….”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언가를 내가 그려낼 수 있을까?”

악일비는 무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한계를 두지 마시오. 보고 듣는 것이 바로 한계라오. 하지만 시작은 보고 듣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니…….”

무한이 자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등에 맨 장검이 절로 떠올라 머리맡에서 선회하였다.

악일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늘, 본 방주의 무공을 보여주겠소.”

무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회하던 경천신검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곧추섰다.

이어 촤라락, 하는 기음과 함께 경천신검이 부채꼴 모양으로 펴졌다.

악일비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분검!”

그건 악일비 수준의 표현이었을 뿐, 무한의 검은 분검이 아니었다.

무한의 극강한 내공을 받은 경천신검이 수십 자루의 강기검으로 나뉘었다.

무한이 검결지를 짚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파앙!

수많은 강기검 중에 하나가 공손승을 향해 쏘아갔다.

“막아라!”

공손승 주위에 있던 고수들이 일제히 도검을 앞세워 경천신검의 강기를 막으려 하였다.

파앙!

재차 기음이 터지고 경천신검의 강기가 사라졌다.

이어.

“꺽!”

짧은 비명이 터졌다.

공손승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은 채 무한 쪽을 보았다. 광망이 번뜩이는 두 눈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한은 공손승의 눈에 어린 광망이 스러지는 걸 보며 속으로 탄식하였다.

‘공손 군사, 잘 가시오.’

공손승과 사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손우자의 수족이 되어 정천맹을 농락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목숨을 거두었다.

“끄르륵!”

공손승의 목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툭, 떨어졌다. 이어 선 채로 피분수를 뿜던 몸뚱이가 서서히 쓰러졌다.

무한이 악일비를 향해 물었다.

“잘 봤소?”

악일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게 어찌 사람의 수법이란 말인가?

그제야 시작은 보고 듣는 데서 비롯되고, 그게 한계이며,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게 무인의 길이라는 무한의 말을 체감하였다.

“아…….”

“내게는 천라지망도 소용이 없소. 공손승은 자신의 머리로 나를 재단한 것뿐. 그가 나를 알지 못한 채 이 자리에 나타났으니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었겠소.”

무한이 쓰러진 공손승을 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이어, 무한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가서 정천맹주에게 전하라. 명일 내가 군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악일비가 절로 감읍하여 예를 취했다.

“방주, 청의단을 맡겨주십시오. 기필코 후의에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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