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넓은 방 한쪽 커다란 탁자에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감숙과 인근 성(省)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지도 앞에는 수수한 의상을 입은 미모의 중년여인이 서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아쉽게도 머리가 완전한 백발이었다.
“사부, 수상한 자들이 왔습니다. 강하보 참사와 관련된 자들 같습니다.”
월아의 보고를 들은 백발미부, 진소향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도 옆에는 난주 곳곳에 있는 흑월의 첩자들이 보내온 밀지들이 쌓여 있었다.
“소마가 데려온 놈들이 아니야. 마천 본산에서 온 놈들이지.”
진소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런 식으로 혼잣말을 한다는 걸 잘 아는 월아는 조용히 듣기만 하였다.
진소향도 마천의 내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인지 눈치챘다.
“이건 소마를 노린 거야. 만만한 강하보가 애꿎게 당한 거지.”
그러면서 가볍게 탄식하였다.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 세 곳 모두 내분 상황이라니……. 정말 공교롭구나.”
월아가 대답했다.
“어디든 세력이 너무 커지면 생각을 달리하는 이가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네가 귀여워하는 문평이 무사하다니 다행이구나. 무한이 그 아이를 구했을 줄이야.”
순식간에 팔 년여 세월이 흐르고, 장성한 아들이 찾아왔다.
흑선수사의 전서구를 받았을 때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예상보다 시기가 빨랐을 뿐이다.
진소향은 당장이라도 아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순간, 흑천은 바로 격렬한 내전에 휩싸일 것이다.
피전격이 잠자코 있는 것은 그녀가 신분을 감춘 채 흑월 산하 일개 루주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피전격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 역시 자신과 절연하지 않았던가.
자신 역시 그런 심정으로 무한을 천하방으로 보냈다.
‘그때 이생에서의 인연은 끝난 거야.’
진소향은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몰랐다.
심군하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고자 감숙에 왔다. 백골이 되었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망객의 무덤만 찾았을 뿐 심군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불망객의 무덤까지 파헤쳤으나 심군하의 유해는 없었다.
그러자 심군하가 살아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였다.
그 기대는 희망이자 독이었다.
살아 있다면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희망이 바로 절망으로 바뀐다.
심군하의 유해가 독수리에게 먹히는 꿈이라도 꾸면 밤을 꼬박 지샜다.
살아 있지만 사는 게 아닌 세월에 머리가 다 희어버리고 말았다.
월아가 조심스레 권했다.
“무한을 만나보시지요.”
사부의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란 월아이기에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였다.
진소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무척이나 냉정한 말투에 월아가 흠칫 놀랐다.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방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악!”
***
무한이 돌아오자 강문평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기어이 무한을 사부로 모실 생각이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는 서너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사제지연이 말이 되겠냐?”
“저, 이제 겨우 열세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입니다.”
강문평이 자기 나이를 두 살이나 깎았다.
악가박에게서 이미 강문평의 나이를 들어 아는 무한이 속으로 웃었다.
무한도 강문평이 싫지는 않았다. 굳이 천심공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영특한데다 의기가 충만하다.
다만, 잔꾀가 있고 거짓말이나 모함을 서슴지 않는 건 흑도 문파에서 자란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무한은 겉으로 냉랭한 표정을 꾸미고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이를 들일 수는 없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버렸다.
강문평이 아찔한 표정으로 있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 나이는 열다섯입니다.”
“…….”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다시 한번 거짓말하면 벼락을 맞겠습니다.”
“…….”
“제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제야 무한이 몸을 돌려 앉으며 물었다.
“힘이 생기면 어떡할 것이냐?”
“마천을 쓸어버릴 겁니다.”
강문평의 두 눈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한이 말했다.
“나도 혈육을 잃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죽이지는 않는다. 마천도들이 흉폭하지만 모두 죽어야 할 자는 아니다.”
“…….”
이번에는 강문평이 입을 닫았다.
이제 막 혈육을 잃은 강문평은 할 수만 있다면 천산을 피로 씻을 작정이다.
“네가 힘을 가지면 너 같이 혈육을 잃고 복수를 하고자 하는 자들이 무수히 나오겠구나.”
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강문평이 자기 가슴을 치며 말했다.
“복수는 정당하게, 책임이 있는 자에게만 할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무한이 천심공을 일으켰다.
강문평이 말한 바는 지키는 성격이라는 걸 확인하였다.
무한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너와 나는 사제지간을 맺을 인연이 아니다. 그러니 너를 사숙에게 추천하겠다.”
“네?”
“내게 사숙이 있다. 그분이 받아들여준다면 너는 나와 동문 사형제가 되는 거겠지.”
“아… 그분도 사형처럼 엄청난 고수이십니까?”
강문평이 바로 호칭을 전환하였다.
확실히 상황판단이 빨랐다.
‘하 사숙은 이런 성격을 싫어하는데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인연이라는 건 항상 의외가 있으니까.
하기주 역시 마천에 의해 혈육을 잃었으니 서로 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심단에 입문한 후 무한은 인과 연에 대한 눈이 트여가고 있다.
“만나보면 알 것이다. 그만 가서 악 총관의 상세나 돌봐라.”
강문평이 나가자 무한은 의복을 갈아입고 하오문 감숙지부로 향했다.
***
다섯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는 고원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바싹 마른 고목껍질 같은 얼굴을 한 노인과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음침한 서생이 쓰러진 시신을 살폈다.
고목껍질 같은 노인이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비도 하나에 목숨 하나라… 생사비도(生死飛刀)가 따로 없군. 패극(覇戟)만 한 차례 막았을 뿐이야.”
“혈겸은 어깨와 목을 맞았소. 어찌 생각하시오?”
“그 이유를 내가 어찌 아나?”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두 사람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자신들이 패극이나 혈겸보다 확실히 우위라고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짚이는 자라도 있소?”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뇌까렸다.
“모르지. 지옥곡에 처박혀 산 지가 수십 년인데… 그동안 강호가 어찌 변했는지 내가 알겠나?”
“혹시 소마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가능하겠지. 하지만 소마라면 일장에 쳐죽이지 굳이 귀찮게 비도를 날렸을까?”
“워낙 예측할 수 없는 자이니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소. 만일 소마가 왔다면 월야루를 치러 간 놈들도 무사하지 못할 게요.”
서생이 우려의 시선으로 난주 쪽을 바라봤다.
그때 한 사람이 빠르게 달려왔다.
거대한 덩치에 턱수염이 우락부락한 장한이었다.
“여기서 뭐하는 건가? 엉? 이들이 왜 여기 죽어 있는 거지?”
장한이 죽은 지옥곡 동료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서생이 말발굽 자국이 난 곳으로 가서 쭈그려 앉아 발굽의 방향을 살피곤 말했다.
“혈겸은 아마도 누군가를 추적해 왔던 것 같소. 여기서 그들을 잡았는데… 저쪽에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왔고… 그 사람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군.”
서생이 말 위에서 비도를 던지는 시늉을 했다.
“말을 타고 가는 길에 비도 한 자루씩 던져 파리 잡듯 잡았소.”
노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말했다.
“난주표국은 외곽에 있으니 최단시간에 처리하고 바로 빠지기로 하지.”
“으음. 오랜만에 살맛 좀 보려고 했더니…….”
음침한 서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이 못마땅한 듯 타박했다.
“그 짓거리를 하고 싶으면 월야루를 치러 가지 그랬나?”
“아니, 나는 화류계 여자들은 싫소.”
서생이 고개를 저었다.
노인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동안 난주를 피로 씻으라는 천주의 명이다. 허튼수작 부리다 망치면 너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 죽는다. 그러기 전에 너부터 죽여 버릴 것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난주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노인의 신분이 더 높았는지 서생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뒤를 따랐다.
뒤이어 장한이 시신들을 한 번 더 살펴보곤 노인과 서생을 따라 갔다.
***
무한은 지난번 천무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하오문에 불망객의 행방을 찾아 달라 의뢰했다. 난주에 온 김에 결과를 받고자 했다.
골목 허름한 객방 이층에 붉은 천을 건 뒤 한 시진 가량 지나자 이전에 봤던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가 무한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불망객의 무덤을 찾는 것보다 귀하의 소재를 파악하는 게 더 힘들었소. 결국 직접 왔구려.”
사내의 눈은 지쳐 보였다. 인피면구를 썼기에 가려진 표정을 알 수는 없지만 무척 초조해하는 듯했다.
“불망객의 무덤은 찾았소.”
사내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 건넸다.
무한이 보니 불망객의 무덤이 있는 위치는 감숙에서 섬서로 흐르는 강가였다.
“두 가지 추가 정보가 있소.”
사내가 말했다.
“원래는 의뢰받은 일만 처리하는데 귀하에게만 특별히 제의하는 것이오.”
무한이 사내를 봤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에 쫓기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한이 두말하지 않고 전낭을 꺼내 은 일백 냥에 해당하는 전표를 건넸다.
“불망객의 시신을 묻어준 이는 천하방 멸마대주 고벽후란 자요. 그리고 우리가 찾았을 때 무덤은 훼손된 상태였소.”
“누가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했단 말이오?”
무한은 내심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우리가 알아낸 바로는 월야루주였소.”
무한이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자 사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확실히 정보를 다루는 자다웠다.
일개 기루의 주인이 불망객의 무덤을 파헤친 걸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정보에 해당한다.
무한이 사내의 속을 읽고 말했다.
“그 정보를 아는 이는 몇이오?”
무한의 말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살인멸구를 하려는 게 아니오. 영원히 입을 닫아준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소.”
무한이 다시 은 일백 냥에 해당하는 전표를 건넸다.
졸지에 거금을 챙긴 사내는 안도하며 말했다.
“귀하께서 선심을 쓰시니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해드리겠소.”
사내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지금 난주에 혈풍이 불고 있소. 강하보가 멸문 당했다는 것은 들었을 거요. 마천의 짓이오.”
이번에도 무한이 담담히 듣기만 하자 사내는 오기가 난 듯 말했다.
“강하보는 시작이오. 월야루와 난주표국도 곧 피바다가 될 것이오.”
무한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방금 뭐라고 했소?”
“강하보는 난주 흑도를 대표하고, 난주표국은 표국이지만 난주 정파의 중심이기도 하오. 월야루는 확실치는 않지만… 흑월 산하라는 소문이 있소.”
사내가 이래도 놀라지 않을 것이냐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들을 모두 멸문시키는 이유가 뭐겠소? 마천이 난주를 접수하려는 것이오. 그러니 어서 떠나는 게 좋을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