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얼굴이 꺼먼 사내가 커다란 손아귀로 기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악!”
기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년, 감히 내가 따라 준 술을 거부해? 목을 분질러주마!”
기녀의 앞에는 커다란 대접에 술이 한가득 있었다.
다른 기녀들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사내는 기녀에게 개처럼 핥아서 술을 마시라고 했고, 기녀는 그럴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
사내가 기녀의 뒷덜미를 내리눌러 대접에 얼굴을 박았다.
“푸웁!”
술대접에 얼굴이 처박힌 기녀가 숨을 쉬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때.
덜컥, 하고 문이 열리고 수주향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바깥에서 안의 동정을 듣고 있었기에 얼굴 시꺼먼 놈이 무슨 변태 짓을 하는지 다 듣고 있었다.
일단, 기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잠시만 제 말 좀 들어보시죠.”
사내가 피식, 웃었다.
“이따위로 손님을 대접하고 할 말이 있다고?”
수주향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대신하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다른 기녀를 들이겠습니다.”
“흥! 필요 없다. 나는 이년이 술을 먹는 걸 봐야겠다.”
수주향이 뭐라 말하려는 참에 월아의 전음이 들렸다.
- 작정하고 온 놈들이야. 제거하라는 루주의 명이 떨어졌어.
전음을 들은 수주향의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를 놔주시면 기녀를 배로 들이고, 난주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남쪽의 귀한 음식을 올리겠습니다.”
“뭐라? 네가 내 말을 잊었나보군. 이 술을 다 마시고 나면 월야루주부터 주방의 하녀까지 모두 내게 면상을 보여야 한다고 했잖나?”
“농담이시겠지요?”
“농담?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사내가 갑자기 기파를 터뜨렸다.
엄청난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때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마른 사내가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흑면(黑面), 저년은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다. 소매 속에 감춘 손에 암기가 들려 있을 거야.”
흑면이라 불리는 사내의 눈에서 광포한 빛이 터졌다.
“흥! 구수(勾手) 네가 일러주지 않아도 그쯤은 알고 있다. 저년은 처음부터 우리를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네가 이년을 죽이는 거지.”
우두둑!
흑면이 기어이 기녀의 목을 분질렀다.
기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수주향은 눈이 확, 돌아갔다.
“이 개새끼들아!”
수주향이 달려들며 앞으로 손을 쳐냈다.
구수의 말대로 소매에서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눈으로 분간하기도 어려운 가느다란 은침이 흑면의 전신을 향해 날아갔다.
“크하하. 고작 이따위 걸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냐!”
흑면이 커다란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펑!
권에서 기파가 터지며 날아오던 은침이 뭔가에 가로 막혀 우수수 떨어졌다.
흑면이 다른 손으로 수주향의 목을 잡아채 갔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수주향이 단도로 자신의 목을 잡으려 드는 흑면의 팔꿈치를 베려 하였다.
“어리석은 년!”
목을 노린 건 허초였고, 은침을 막은 오른손이 수주향의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흑면의 손은 무척 커서 가느다란 수주향의 옆구리를 반이나 잡았다.
수주향이 내공을 일으켜 손을 튕겨내려 했으나 흑면의 손아귀 힘은 신력이라 부를 만큼 강력했다.
“네년은 머리통을 깨주마!”
흑면이 왼손으로 수주향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찰나.
쾅!
한쪽 벽이 터지며 월야루의 대장 숙수가 튀어 들어왔다.
“그 손, 놓아라!”
대장 숙수가 고함을 지르며 흑면의 팔을 내리찍었다.
사람이 벽에서 튀어나올 줄을 미처 생각지 못한 흑면은 수주향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곱게 놔주지 않았다. 옆구리를 쥔 손을 펴서 경력을 쏟아 쳐냈다.
“크읍!”
수주향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반 장가량 날아가 쓰러졌다.
대장 숙수가 폭풍처럼 도를 휘둘러 흑면을 압박하는데 흑면 뒤에 있던 구수가 튀어나왔다.
“이놈은 내게 맡기고 루주를 찾아!”
구수는 양손에 두 자쯤 되는 갈고리를 쥐고 있었다.
까강!
대장 숙수의 도가 구수의 갈고리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구수는 휘몰아치는 도세 속에서도 침착하게 갈고리를 뻗었다.
끼리릭!
대장 숙수의 도가 구수의 왼손에 들린 갈고리에 걸렸다.
대장 숙수가 도를 비틀어 빼내려는데, 구수가 신형을 옆으로 비틀며 갈고리로 도를 훑으며 한 자가량 거리를 좁혔다.
“크윽!”
언제 어떻게 했는지 대장 숙수의 어깨에 구수의 오른손 갈고리가 박혔다.
구수는 마치 생선을 잡아채듯 갈고리를 당겼다.
덩치가 큰 대장 숙수는 신력과 내공으로 버티고자 했으나 구수의 내공이 한 수 위였다.
구수가 대장 숙수를 갈고리로 꿴 사이, 흑면이 쓰러진 수주향에게 다가가 머리에 발을 올렸다.
“루주는 어딨나?”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검을 빼어든 월아가 차가운 얼굴로 들어섰다.
지켜보다 적이 너무 강하자 바로 들어온 것이다.
“호오, 네가 월아란 년이구나?”
흑면이 반색을 하며 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흑면이나 구수는 월야루를 피로 씻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굳이 대화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피에 굶주린 마귀구나!”
월아가 앙칼지게 외치고는 손에 든 검으로 반원을 그렸다.
두 자가량의 도가 지난 허공에 도광이 번뜩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검법이었으나 흑면은 개의치 않았다.
“조심해라, 월녀검이다.”
오히려 옆에서 보던 구수가 월아의 검법을 알아보고 흑면에게 경고하였다.
“흥, 어린년이 뭘 좀 배웠나보군.”
흑면이 코웃음을 치고 검세 속으로 파고들었다.
퍼엉!
흑면이 허리를 숙이며 왼 주먹으로 기파를 터뜨려 검의 진로를 막고, 오른손으로 월아의 발목을 잡아갔다.
신분을 감추고 산 월아는 실전경험이 많지 않았다. 더럽게 생긴 놈이 발목을 잡아오자 주춤, 물러나며 선수를 뺏겼다.
흑면이 훅, 하고 월아 앞에 서더니 양손으로 어깨를 잡으려 했다.
월아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대로 발을 벌려 주저앉으며 검을 세워 흑면의 복부를 노렸다.
“고년, 제법 앙탈을 부릴 줄 아는구나.”
흑면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위에서 아래로 권을 내질렀다.
퍼엉!
월아가 옆으로 피하려 했으나 허벅지에 권을 맞고 말았다.
“읍!”
월아가 신음을 삼키고 떼굴떼굴 굴렀다가 튕기듯 일어나 검을 앞세워 도약하려다 비틀거렸다.
뼈가 부러진 듯 권을 맞은 허벅지에 힘이 실리지 않고, 엄청난 고통이 전해온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난전에서 몇 합 겨루지도 못하고 월야루의 고수들이 당했다.
“후우……”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직한 소리였으나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흑면과 구수가 움찔하여 서로를 보았다.
‘이건… 들었던 것 이상의 고수잖아?’
한숨을 흘린 이는 월야루주이리라. 그들이 들은 정보를 상회하는 경력이었다.
이윽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백발미부가 기방으로 들어왔다.
“네가 월야루주냐? 마의 하늘이 왔으니 무릎을 꿇어라.”
흑면이 윽박질렀으나 진소향은 들은 척 만 척 월아를 향해 말했다.
“누누이 말했잖느냐? 생사가 오가는 싸움에서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월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로서 발목이 잡히는 게 두려워 본능적으로 피하다 당하고 말았다.
진소향은 아직도 대장 숙수의 어깨에 갈고리를 박고 힘을 겨루고 있는 구수를 향해 말했다.
“그를 놔줘라.”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하나?”
구수가 빈정거리듯 말하는 순간, 싸늘한 한기가 몰아쳤다.
구수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연신 갈고리를 휘둘렀다.
이를 본 흑면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월야루주는 그저 한손을 쳐들었을 뿐인데 구수가 놀라 뒤로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흑면은 겉으로는 거칠고 호탕하게 보이지만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자였다.
월야루주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고수임을 알자 도주할 궁리를 하였다.
‘정보가 잘못됐어. 예상 밖의 고수이니 괴목(槐木) 일행이 오면 합세하여 죽여야 해.’
머릿속으로 도주에 대한 변명까지 마친 흑면이 구수를 향해 외쳤다.
“합공하자!”
그러면서 진소향에게 달려들 듯 하다 곧바로 옆으로 몸을 빼어 달려갔다.
구수는 영악한 자였고, 흑면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았다. 그 역시 진소향을 공격하는 척하다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료에 대한 의리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그들을 보며 진소향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흥!”
진소향이 코웃음을 치며 월아의 손에 든 검을 탁, 발로 찼다. 그러자 검이 화살처럼 날아가 흑면의 등판에 꽂혔다.
“커억!”
흑면은 등을 꿰뚫고 가슴까지 튀어나온 검을 보고 두 눈이 퉁방울마냥 불거졌다.
쿵!
뭐라 한마디도 못 하고 흑면이 엎어졌다.
그사이 구수는 문 앞에 이르러 막 빠져나갈 참이었다.
그때.
한 사내가 들어오다 구수와 마주쳤다.
“비켜라!”
구수가 갈고리를 휘둘러 마주친 사내를 찍으려 했다.
사내가 씨익, 웃었다.
“이 새끼 보게? 내가 누군지 몰라?”
구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
퍽!
그 순간 구수의 머리통이 터졌다.
“이 새끼가 감히 내 앞에서 눈을 부릅떠?”
소마가 정말 재밌다는 듯 웃으며 구수의 시신을 걷어찼다.
구수의 시신이 한쪽으로 날아가다 허공에서 터져 육편이 되어 버렸다.
소마가 발길질에 경력을 담아 터뜨린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진소향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이, 어쩌다 그 흑단 같던 머리가 백발이 됐소?”
“닥쳐라! 누가 너의 누이란 말이냐?”
“이거 섭섭하군. 은근 걱정이 돼서 왔는데 보자마자 구박이라니.”
소마가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좀 늦었군.”
진소향이 매서운 눈으로 소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마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집안단속도 못하고…….”
“그거야 피차일반 아닌가? 피전격이 흑천을 내놓으라고 농성하고 있다며?”
소마의 시선이 칼이 박힌 채 쓰러진 흑면에게 향했다.
놀랍게도 아직 죽지 않고 버둥거리며 기어가고 있다.
소마가 발밑에 떨어진 구수의 갈고리를 걷어찼다.
쉭!
갈고리가 날아가 흑면의 머리통을 부쉈다.
“역시 머리통을 깨야 확실하지. 진 누이는 겉으로는 북풍한설 몰아치듯 냉랭한 사람처럼 굴지만 의외로 무른 데가 있단 말이야.”
진소향과 소마의 대화를 들은 월아는 의아해하였다.
‘사부와 소마가 아는 사이였구나.’
진소향이 그런 월아에게 말했다.
“뭐하느냐? 주향과 대장 숙수를 돌보지 않고.”
월아가 흠칫하고는 아픈 허벅지를 절뚝거리며 수주향에게 다가갔다.
하인들은 느닷없는 싸움에 놀라 모두 달아난 상태였다.
대장 숙수가 고통을 참고 월아와 함께 수주향을 부축하고 내원 쪽으로 갔다.
둘만 남자 진소향이 말했다.
“이거, 천주가 너를 노리고 한 짓이지?”
“나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확실히 비겁한 자야.”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대문에 무한이 서 있었다.
“심무한?”
소마가 무덤덤한 얼굴로 뇌까렸다.
아주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