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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44화 (144/250)

144화

혈겸이 처음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 명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정확히 목을 관통한 비도를 부여잡고 하나둘 쓰러졌다.

극을 든 사내만 간신히 비도를 막아냈다.

터엉!

뚝!

막기는 했으나 사내의 극이 부러지고 말았다. 손바닥만 한 비수에 어마어마한 경력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극이 부러진 순간 사내는 상대가 천외천의 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바로 몸을 돌려 어둠속을 향해 도주하였다.

살다가 이런 고수를 만나는 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다.

‘반로환동이라도 한 건가.’

극을 든 사내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중원, 특히 정파인들은 적에게 등을 보이는 걸 수치로 여겼으나 마천도들은 생각이 달랐다. 힘이 우선인 마천에서는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쌔애액!

허공을 찢는 폭음성이 들렸을 때, 사내는 죽음을 절감했다.

곧바로 옆으로 구르며 쌍장을 교차하여 강기를 쳐냈으나, 비도는 강기를 관통하여 그대로 사내의 목에 박혔다.

무한이 다섯 자루의 비도를 꺼내고 숨 한두 차례 쉴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다.

놀라운 광경에 악가박과 강문평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왜 그리 침착할 수 있었나 했더니. 나를 봐준 거로구나.’

불과 일 년 사이 무한의 성취가 엄청나게 늘어난 사실을 모르는 악가박이 오해를 하였다.

강문평은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자들이 볏짚단처럼 풀썩 풀썩 넘어가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무림은 힘이 우선이라는 말을 절실히 깨달았다.

강하보는 힘이 없어 멸문 당하고, 만행을 자행한 저놈들은 무한보다 약해 저렇게 어이없이 죽었다.

“가자!”

무한이 말의 목덜미를 툭, 쳤다.

그러자 악가박이 앞을 막고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은 낫에 당한 옆구리를 부여잡았기에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하오. 강하보 악 모가 구명지은으로 모시겠소.”

무한이 악가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들이 내 앞길을 막았으니 치웠을 뿐입니다.”

악가박에게는 무척이나 냉정한 말로 들렸다.

‘천하방 사람이니 흑도와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는 뜻이로구나.’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더 말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강문평은 달랐다. 무한의 앞길에 털썩,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저를 거두어 주세요.”

돌연한 강문평의 행동에 무한과 악가박 둘 다 놀랐다.

“소가주! 저분은 우리와 길이 다릅니다.”

악가박이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한의 시선이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보는 강문평의 얼굴에 꽂혔다.

강문평은 진지했다.

“거두어달라니 무슨 뜻이냐?”

“저들은 제 아버지를 해쳤습니다. 살부지원(殺父之怨)을 풀어주셨으니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무한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나이가 몇인데 제자를 들인단 말인가.

“내가 누군지는 알아?”

“…….”

“강하보는 흑천 흑월 산하 아닌가?”

무한이 말은 강문평에게 하면서 시선은 악가박을 향했다.

지난 봄 월야루 월아가 나서서 중재하자 악가박이 순순히 물러난 걸 기억하고 있다.

이후 하기주로부터 월야루가 흑월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강하보는 흑월 산하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악가박이 고개를 저었다.

“강하보는 난주 토종 문파입니다. 비록 세가 크지는 않지만 보주께서 자부심이 강하셔서 누구 밑으로 들어간 일은 없습니다.”

“그렇군.”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무릎을 꿇은 강문평을 내려다 봤다.

강문평은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이대로 두면 밤새 저러고 있을 것이다.

“일어나라. 난주에 가서 생각해보자.”

무한의 말에 강문평은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미 죽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악가박이 자신의 옷을 찢어 옆구리를 감싸고 말에 오르자 강문평이 뛰어 올랐다.

“제가 지혈을 하고 있을 게요.”

강문평이 악가박의 옆구리를 압박하였다.

세 사람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난주에 당도했다.

“저기, 저 객잔이 강하보 관할입니다.”

악가박이 자신들이 관할하는 객잔으로 가려 하자 무한이 제지했다.

“강하보와 상관이 없는 객잔으로 가시죠.”

악가박이 의아해하다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 말머리를 돌렸다. 이어 난주 외곽 허름한 객잔으로 안내하였다.

“먼저 쉬고 계시지요.”

악가박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충직한 사내야.’

흑도지만 악가박의 처신은 인정해줄마했다.

하룻밤 사이에 십년은 더 늙고 피를 많이 흘려 수척해 보였는데도 강하보 상황부터 살피러 가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한은 만류하지 않고 객잔에 들었다.

***

과거 천하방 감숙지부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뀌었다.

허물어진 집은 말끔히 수리하고 성벽은 높이 쌓아 올렸다.

내성 소마의 거처.

새벽같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뭐냐?”

사천대주 사추선이 들어왔다.

광풍대 광포와 함께 좌선우포로 불리는 사추선은 큰 키에 얼굴도 약간 긴 말상이다.

“급보가 왔습니다. 난주 흑도의 중견방파 강하보가 밤새 멸문 당했답니다.”

“그래? 그런데 그런 것까지 내가 알아야 해? 지금 이 시간에?”

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리 짜증을 내실까?’

심복 사추선은 소마의 웃음이 지닌 의미를 알고 있다.

소마가 침의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추선이 추가로 보고했다.

“근데…… 본산의 소행 같답니다.”

“뭐? 천산에서 사람이 왔어?”

“지옥곡 녀석들 같았답니다.”

“뭐라? 천주가 지옥곡을 열었다고?”

소마의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지옥곡의 의미를 아는 사추선의 얼굴도 침중하였다. 사추선이 자신의 의견을 냈다.

“소천주께서 여기 계시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난주를 친 건 우리와 흑월을 싸움 붙이려는 수작 입니다.”

“강하보가 흑월 산하인가?”

“산하는 아니지만 월야루와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소마가 잠시 생각하더니 사추선에게 일렀다.

“직접 가봐야겠다. 말을 준비시켜라.”

“사천대 일조를 데려가시죠.”

“됐다. 지옥곡을 열었다면… 우리 뒤통수를 때릴지도 모른다. 여기나 잘 지키고 있어.”

***

객잔에 들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던 무한은 점심때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식사를 하러 나오니 악가박과 강문평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잠도 못 잔 듯 눈 밑이 꺼멓다. 이제까지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온 게 분명했다.

“강하보는 어찌 됐습니까?”

“…….”

악가박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고, 강문평의 두 눈에서는 원독의 빛이 흘러나왔다.

무한은 따로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소면 한 그릇을 시켜 먹은 무한이 객잔을 나섰다.

길에 관군이 쫘악 깔렸다. 흑도 방파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관군까지 나선 것이다.

강하보 참사 소식이 전해지며 난주가 긴장하고 있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의 일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무한이 월야루에 이르렀을 때 대낮부터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한이 들어서자 나이든 기녀가 아양을 떨며 맞아주었다.

“어쩜, 난주에 이리 잘생긴 공자님이 계셨다니… 왜 이제야 오셨어요?”

“월아를 만나고 싶소.”

“여자를 아시는군요. 그런데 어쩌나. 월아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답니다. 아시지요. 여자들은 그런 날이 있답니다. 호호호.”

기녀는 연신 호들갑을 떨면서 무한의 눈치를 살폈다.

‘나를 알고 있군.’

무한은 기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작년 봄에 도움을 받았던 친구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시오.”

무한의 말에 기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야 못 전하겠습니까. 잠시 기다리면 답을 받아오지요. 그동안 저 방에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기녀가 지나는 하녀를 불러 무한을 안내하게 하곤 내원 쪽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걷던 기녀는 내원에 들어서자 눈빛과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내원 깊숙한 건물로 들어간 기녀가 문밖에서 고했다.

“검천부주가 찾아왔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월아가 나왔다.

“검천부주가 왔다고요? 확실히 그가 맞나요?”

월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강하보가 멸문한 것 때문에 루주와 상의중이다.

기녀가 자신보다 어린 월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주의 제자이니만큼 나이와 상관없이 그녀보다 윗사람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그때 왔던 검천부주입니다.”

월아가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와서 말했다.

“오늘 저녁 초경 때 다시 와주십사 전해주세요.”

기녀가 돌아와 무한에게 월아의 말을 전했다.

무한은 월아의 말이 곧 어머니 진소향의 전갈이라고 받아들였다.

흑선수사가 자신이 흑천노조를 만난 사실을 벌써 전했을 것이니,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루주와 무한의 사이를 모르는 기녀는 무한의 눈치만 보았다.

“알겠소.”

무한이 흔쾌히 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월아에게 강문평은 살아있고, 나와 함께 있다고 전해주시오.”

무한이 돌아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이 월야루에 들었다.

한 사내는 얼굴이 꺼멓고 덩치가 컸으며, 다른 사내는 약간 마르고 음침해 보였다.

기녀가 겉으로는 반가이 맞으면서도 내심 경계하였다.

심상치 않은 손님들이다.

“이봐. 여기 기녀들 다 불러와라. 오늘 이 어르신이 쌓인 회포를 풀어야겠다.”

흑면사내가 큰소리로 말하고는 기녀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이 새끼가! 내가 나이가 얼만데.’

갑작스런 희롱에 기녀는 울컥하였으나 화류계에 몸담은 이상 손님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아이구. 힘이 장사시네. 이 늙은 몸은 감당할 수 없으니 아주 생생한 아이들로 넣어드리지요.”

기녀가 아양을 떨면서 사내들을 기방으로 안내하였다.

“내 말 들었지. 여기 루주부터 모두 불러오라고. 어떤 년들이 있기에 월야루가 난주 제일가는 기루인지 알아봐야겠어.”

기녀가 웃으며 대꾸하였다.

“여기는 술과 웃음만 파는 홍루랍니다. 그건 아시지요?”

“뭐? 기녀가 몸을 팔아야지 웃음만 팔면 뭐에다 쓰나?”

흑면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기녀는 이들이 시비를 걸러 왔음을 눈치챘다.

‘강하보 참사와 연관이 있는 자들일까?’

그렇다면 비상이다.

기녀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또 모르지요. 대협께 반한 기녀가 있다면, 그건 막지 않는답니다.”

“잔소리 말고 술부터 가져와.”

흑면사내가 호통을 쳤다.

그동안 마른사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나온 기녀가 주방에 가서 말했다.

“대단한 손님들이 오셨다. 특으로 모셔야 할 거야.”

그 말에 주방에 있는 대장 숙수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월야루에서 흑월에 속한 이는 루주와 루주의 제자 월아, 주방의 대장 숙수와 나이든 기녀 수주향까지, 네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월야루를 평범한 기루로 여기고 일할 뿐이다.

대장 숙수는 수주향의 말에 적이 왔음을 알고는 식재창고로 가서 자신의 도를 꺼내 주방에 감춰두었다.

수주향이 다시 월아를 찾아 심상치 않은 자들이 왔음을 고했다.

“일단 술과 음식을 넣어주고 잘 지켜보세요.”

월아는 수주향에게 이르며 기방 쪽을 보았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천이 월야루를 넘보는 건가? 그런데 하필 이때 무한이 찾아오다니…….’

저녁에 무한이 다시 올 것이다.

혹시라도 마천과 무한이 조우한다면…….

‘안 돼. 어떻게든 막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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