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24화 (124/250)

124화

무한이 내심 놀랐다.

그러잖아도 천목투심술, 아니 천심공이 이미 팔성을 넘은 듯한데 구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의아해하던 참이다.

무한은 더 주저하지 않고 흑천노조의 앞에 마주 앉았다.

흑천노조가 잠시 눈을 감고 조식을 한 후에 말했다.

“천심공은 원래 생사경을 넘고자 내가 고안한 공법이다.”

“생사경…….”

화경을 대성하면 현경에 이르고, 그 이후 생사관문을 넘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경을 이룬 이도 손가락으로 꼽고, 현경은 그야말로 아득한 경지인데 생사경이라니.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생사경이라면…… 그 이후에도 경지가 있습니까?”

“있지!”

흑천노조가 단언하였다.

“경지란 끝이 없다. 그 이후부터는 밟은 자가 이름을 붙이면 그게 경지의 명칭이 되겠지.”

그 말은 이제껏 생사경을 넘은 자가 없다는 뜻이다.

무한이 눈빛을 번뜩이며 흑천노조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진경을 이룬 무한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경지다.

문득, 할아버지 심양조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예 무공도 몰랐지만 어쩐지 전해오는 기운이 비슷했다.

‘흑도의 무공으로도 현경을 넘을 수 있는 건가.’

무한은 문득 자신의 무공관이 편협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검천전과 만현서고의 수많은 무공서 대부분이 정파의 무공이다. 만현서고 삼층에 있는 마공서들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파의 무공서들은 한결같이 정심정도(正心正道)를 논했다.

마천이나 흑도의 수법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길로 잠시 이득을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에 이를 수는 없다고 했다.

무한은 거기에 더해 산도를 비롯한 오도(五道)의 가르침을 받아 은연중 선도의 영향도 받았다.

그래서인지 사마외도의 무공으로는 대성을 이룰 수 없다는 막연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고벽후를 만나 무공에 대해 논하며 약간 흔들렸다. 고벽후는 마공으로도 극의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마심(魔心)이라고 했던가?’

무한의 생각이 비밀연공실에 있는 표지가 찢긴 무공서에 미쳤다.

‘무명공.’

너무 살기가 넘쳐 마공서라고 여겼지만, 거기에서 연혈의 단초를 얻었다.

무한의 생각이 빠르게 전환되는 사이 흑천노조가 깊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천심공의 완결성 여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흑천노조 자신이 생사경에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배운 이십 년 전의 천심공에 비할 바는 아니다.”

“생사경의 공법이라면…… 제가 며칠 만에 익힐 수 있겠습니까?”

“네가 익힌 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작이 잘못된 거지.”

그러면서 손을 휙 들어 검지를 들어 무한의 미간을 가리켰다.

찌릿!

천목혈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익힌 과정을 말해봐라.”

무한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며 천목투심술을 익힌 과정을 설명했다.

“다행이군. 어려서 자연스럽게 익혔기에 부작용이 적었던 게로군. 아니었다면 너는 지금쯤 광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흑천노조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이 잘못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시작은 자신이 누구냐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왠지 정도의 심공과 비슷한 논리였다.

“스스로를 알아야 기준을 세우고, 기준이 있어야 타인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이치다.”

“…….”

“만일 네가 이대로 천목투심술을 익히면, 너보다 강한 고수를 만났을 때 반탄력에 의해 오히려 심신을 제압당할 수 있다.”

“그러면 제 기준을 굳건하게 세우는 게 출발이란 말씀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게 네가 익힌 정도 심공들의 기본이기도 하지. 그래서 쉽게 익힐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흑천노조가 설명을 마치고 천심공의 구결을 들려주었다.

단 한 번 들려주었을 뿐인데 모두 팔십일자에 이르는 구결이 무한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천심공은 상대의 머릿속을 지배하기도 하는 건가?’

무한 자신이 영민하기는 하지만 이렇듯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진 건 흑천노조의 천심공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구결을 일러준 후 흑천노조가 말했다.

“지금 네 나이의 성취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열여덟의 나이에 하주와 중주, 신주를 완성하고, 하주에 내단을 형성한 자는 솔직히 들어보지 못했다.”

“여러 기연이 있었습니다.”

화정노의 지화령석으로 임독맥을 타통하는 등 여러 기연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취이긴 했다.

흑천노조가 아쉬운 듯 말했다.

“네가 삼주를 합일하여 하단전 내단, 기단(氣丹)을 형성하여 진경에 이르렀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가진경(假眞鏡)이랄 수 있다.”

무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느끼는 바다.

그럼에도 천목투심술로 부족한 경지를 보완하여 환노 등을 상대할 수 있었다.

“깨달음을 얻어 완전한 진경을 이루면 기단이 완성됨과 동시에 중단전, 심단(心丹) 연성에 들어가게 된다.”

“알고 있습니다.”

“중단전 심단을 이뤄야 비로소 화경이랄 수 있다. 화경을 이루면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얻을 수 있지.”

“…….”

“화경 후기에 이르면 상단전 인당이 열리고, 인당에 신단(神丹)이 맺히면 비로소 현경을 밟을 수 있다.”

무한 역시 무공서에서 비슷한 내용을 읽었으나 흑천노조가 말하니 명확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신단이 완성되면 천하만물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이른바 타심통이 열리는데 그 경지는 그야말로 깊고도 깊어 사람의 수명으로는 이루기 어렵다. 타심통 하나만 해도 그런데 육신통을 모두 이루려면 그야말로 장구한 세월이 걸리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선도에 매진하나 끝을 보기 어려운 것이다.”

흑천노조가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노부도 이제 겨우 신단을 형성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생사경을 넘보고자 욕심을 부릴 수 있는 건 천심공 덕분이다.”

흑천노조는 수십 년 세월을 천심공에 매달려 왔다.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천심공이 역천의 수련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심단과 신단이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천심공으로 신단의 묘리를 운용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지 알겠느냐?”

흑천노조의 설명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무한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흑천노조의 입꼬리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으나 곧바로 사라졌다.

‘영특한 놈이군. 향아를 닮았어.’

그러자 자신의 딸을 훔쳐간 괘씸한 놈이 무한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에잉.’

흑천노조가 안색을 굳혔다.

놀랍게도 무한은 그 짧은 심리적 변화를 감지했다.

“말씀 명심하고 주의하여 익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절을 하려 했다.

흑천노조가 손을 들어 막았다. 무한은 무릎을 굽힐 수가 없었다.

흑천노조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 호기로 저술한 투심공의 오류를 그냥 볼 수 없어 바로 잡아준 것에 불과하다. 그대로 익히다 미쳐버리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흑천노조의 말이 길어질수록 무한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천심공을 익힌 현경의 강자도 사람이었다. 연을 끊어 아무 인연이 없는데 천심공을 전하려니 궁색한 변명을 한다.

“에잉. 어서 수련해라.”

흑천노조가 무한의 내심을 읽었는지 벌떡 일어나서 뒤돌아 나가며 말했다.

“앞으로 사흘. 여기서 폐관하며 팔십일자의 의미를 깨쳐야 한다.”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에서 허허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다 머릿속에 쿵, 하는 울림이 일었다.

‘무공을 이루는 방법의 차이가 정사마를 가르고, 세상사를 대하는 수단의 차이가 흑백을 나눌 뿐이다. 그 사람의 행동으로 흑백이 나뉘는 것이지, 사람 자체에 흑백은 없다!’

무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가며 울림의 여운을 잡아채어 선정에 들어갔다.

연공실 문을 나서던 흑천노조는 무한의 머릿속 울림을 들었다.

‘저 녀석, 말 몇 마디에 깨달음을 얻네?’

현경인 그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내단을 형성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 가진경 상태로 죽는 이가 허다하다.

대개는 십 년여 각고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가진경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무한이 바로 깨달음을 얻는 걸 보고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놈이 흑천에 눌러앉아준다면…… 천하일통도 가능할 텐데.’

현경의 고수인 흑천노조도 천하일통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권세를 위함이 아니라 가진 바 뜻을 펼칠 세상을 이룩하고자 하는 자아의 발현이다.

***

머릿속 울림은 계속 이어졌다.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은 무엇인가…… 빛과 어둠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세상이 세운 경계를 하나씩 지워나가던 무한은 태초에 만물을 이뤄낸 음양의 경계에 이르렀다.

수많은 무공서에서 본 태극의 원리가 심득으로 다가왔다.

쿠쿵!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굉음이 울리고, 무한은 백회가 터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머리 위가 날아가 없어진 듯한 느낌에 이어, 하늘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들어와 단전까지 쭈욱 내려갔다.

동시에 회음에서 차가운 기운이 형성되더니 치고 올라와 하늘의 천기와 어울리며 무한의 내단, 정확히 말하면 하단전 기단을 감쌌다.

‘……!’

천기와 지기의 음기가 단전으로 밀고 들어가자 갑자기 전신에 퍼져 있던 내력이 기단으로 모이더니 뜨거운 양기를 분출하였다.

‘크읍!’

아랫배가 찢어질 듯 기단이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 순간 폭발하였다.

“후읍.”

무한은 거칠어지는 숨결을 붙잡고 조식에 전념하였다.

어느 순간 천지의 음기와 무한의 호흡으로 이뤄진 양기가 서로 어울려 소용돌이치다가 서서히 섞여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음양이 하나 되어 점차 응고되더니 하단전에 자리 잡았다.

비로소 완전한 기단을 형성한 것이다.

무한이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둠 속에 한 줄기 섬광이 터졌다가 사라졌다.

“진경에도 차이가 있구나.”

무한은 완전한 진경을 이루면서 진경 안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만일 임독맥 타통이 되지 않은 채 진경을 이뤘다면 화경 심단을 이루기는 요원했으리라.

“이제 천심공인가?”

무한은 흑천노조가 일러준 팔십일자 천심공 구결을 떠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무한의 머릿속에 허공이 펼쳐지며 금빛 글자가 선연히 떠올랐다.

금빛 글자는 천심공 팔십일자 구결이었다.

‘아!’

머릿속 허공을 배경삼아 떠 있는 번뜩이는 금빛 글자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흑천노조의 솜씨가 분명했다.

무한은 흑천노조의 배려에 감사하며 머릿속 허공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흑천전 연공실은 완연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사흘 후.

고요히 좌정한 무한의 전신에 미동이 일었다.

뒤이어.

쿠쿵!

무한의 머릿속 허공에 새겨진 천심공 팔십일자 구결이 어느 순간 모두 폭발하였다.

놀랍게도 무한이 천심공 구결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순간 글자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팔십일자 구결은 무한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나, 머릿속 허공에서 빛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현경의 재주는 신에 근접하구나.’

무한은 왜 흑천의 그 누구도 감히 흑천전을 범하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흑천노조는 정말 흑도의 하늘이었던 것이다.

무한은 흑천노조의 말대로 정확히 사흘 만에 오의를 얻고 연공실을 나왔다.

어둠 속에서 사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건만 전신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웠다.

진정한 진경, 그것도 최상의 성취를 얻은 자의 기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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