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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25화 (125/250)

125화

흑천노조는 다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앉거라.”

당연히 천심공의 오의를 깨쳤을 거라 여겼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같은 무공을 똑같은 시간 수련해도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진경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성취가 다르다. 그래서 무공의 경계를 나누는 게 무의미하다지만, 내가 보기에 진경과 화경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화경을 이루려면 심단의 연성도 중요하지만, 한번은 죽음의 문턱을 밟아야 한다. 생과 사의 경계를 건너본 자만이 화경에 이를 수 있지.”

흑천노조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무공관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진경 정도 되는 이가 생사지경에 처할 경우가 얼마나 있겠느냐? 게다가 그런 위험에서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그러니 화경이 드문 것이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경이라면 중견 문파의 장문인이나 장로급이다.

강호에 바람 잘 날이 없다지만 장문인이나 장로가 죽을 지경에 처할 만한 분쟁은 많지 않다.

그런 자가 생사지경에 처했다면 상대는 그 이상의 실력을 지녔고, 이는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화경에서 현경으로 넘어가는 건 사람마다 업이 다르니 뭐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이생에서 얻은 모든 걸 버려야 비로소 길이 열린다는 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흑천노조가 찻잔을 건네며 말을 마쳤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얻는 건 네 몫이다.”

심양조가 무의 극의를 전할 때 무한 스스로 생각하여 오의를 얻도록 유도했다면, 흑천노조는 자신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고 알아서 받아들이라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현경의 고수가 일러준 가르침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무한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선대의 음덕(陰德)에 다시금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할아버지와 오도(五道). 고 대형에 이어 흑천노조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룬 게 아니니 스스로 겸손해야 할 것이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서 있는 자리가 다름에도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한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도 자신과 흑천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였다.

무한을 보는 흑천노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한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가는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디에 서 있든 완전한 자신을 이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자만이 지존(至尊)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지존이라고 하셨습니까?”

갑작스레 지존이라는 단어를 접한 무한이 되물었다.

“지극히 존귀한 자리는 스스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며, 누가 이끌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흑천노조의 눈빛은 깊고도 깊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보다 더 많은 걸 물려받았다고 해서 지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악착같이 홀로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지존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한은 흠칫, 놀랐다.

흑천노조가 방금 전 선대의 음덕에 기대어 성취를 이뤄가니 겸허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게 분명했다.

“지존이란…… 허상과도 같으며 궁극의 자리이자 완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선대의 음덕 여부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거라. 그럴수록 스스로를 완성하는 길은 멀어진다.”

흑천노조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할 말을 다했다는 뜻이다.

무한이 내심 놀랐다.

흑천노조가 지존은 완성이자 궁극이라는 말을 할 때 요산자나 목령산인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흑도의 하늘에서 선가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말이 나오다니.

만류귀종이라는 말을 새삼 절감했다.

무한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흑천노조는 눈을 감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버리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노조께서는 흑도를 일통하고 사천은 물론 천하를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버리라는 가르침과 상이합니다.”

논무(論武)를 빙자하여 흑천의 사천 침공을 화제로 꺼냈다.

흑천노조가 눈을 떴다.

벼락같은 안광이 공간을 스쳤다.

“하늘은 묵묵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땅은 말없이 만물을 품는다. 세상이 그리 돌아가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선답(仙答)이 돌아왔으나 무한은 바로 이해했다.

심양조의 천지불인과도 일맥상통한 답이다.

자신은 흑천의 하늘로 존재할 뿐 구체적인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시에 흑선수사의 말이 떠올랐다.

- 군림할 뿐 지배하지 않는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사사천주와 담판을 지어야겠군요.”

흑천노조가 다시 눈을 감자 무한이 예를 취하고 다실을 나왔다.

***

동흥전으로 돌아오니 수수가 말했다.

“서패전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다음 날까지 오라고 했는데 소식이 없으니 사람을 보낸 모양이다.

이미 기한은 지났고, 무한은 피전격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고 하곤 우이친이 있는 보수공사 현장을 찾았다.

흑선수사는 무한의 잠입경로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우이친이 화를 당하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짧은 인연이지만 이유도 대가도 없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그였다.

우이친은 한창 일을 하는 중이었다.

무한을 보자 우이친이 고개를 숙였다. 무한의 신분이 남다르다는 걸 안 이상 이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별 탈 없는가 보네.’

우이친의 해맑은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무한은 묵묵히 눈빛으로 우이친에게 답을 하고 돌아섰다.

동흥전 전각 보수공사는 원단 직전에 끝날 것이고, 마치고 나면 우이친은 고향 우향촌으로 무사히 돌아갈 것이다.

동흥전으로 돌아온 무한은 연공실을 찾아 들며 수수에게 일렀다.

“내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게.”

원단까지 남은 며칠간 천심공을 수련할 생각이었다.

무한은 어려서부터 천목투심술을 익혔기에 천심공의 틀은 이미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틀에 내용을 담아야 한다.

천심공은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니 이는 근본을 들여다보는 수련이다.

천심공의 구결을 되새기며 무한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검천부의 인을 받은 뒤 심씨 사당에 들어 각오를 한 바 있다.

사당을 나서며 그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분노를 분출하였다.

오래된 분노.

자신의 길이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길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일 년도 되지 않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진정한 복수가 뭘까?’

할아버지는 복수를 당부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일러주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당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게 아니다.

‘할아버지는 복수가 아니라…… 나의 길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무한은 할아버지 심양조와 나눴던 대화를 복기하다 무아지경에 들었다.

***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뀌었다.

흑천은 소수민족 출신이 많았다.

원단을 맞아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흑수애가 한산해졌다.

이른 아침.

수수가 무한이 수련중인 연공실 문에 살짝 귀를 대었다.

침식도 거른 채 며칠째 나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오늘이 원단인데 아직도 수련중이신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렸다.

수수가 깜짝 놀라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연공을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놀랄 것 없네.”

무한이 수수를 안심시켰다.

수수가 보니 무한의 낯빛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아!’

수수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절로 붉게 물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절로 설렜다.

‘내가 왜 이러지?’

처음 무한이 동흥전에 왔을 때 어딘가 날이 서 있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아침을 준비해주게. 오늘 떠날 것이네.”

무한의 말에 수수는 가슴 어딘가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속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무한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겼다.

“새해를 맞아 모두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공자님은 떠나시려 하는군요.”

언제 왔는지 진복이 무한의 보따리를 보며 말했다.

진복이 서운해하는 걸 모른 척하고 무한이 말했다.

“서패전에 들렀다가 바로 흑수애를 떠날 것입니다.”

흑천을 찾았던 건 자신이라는 존재가 흑천의 계략에 의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의심이 풀렸으니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동흥전은 노조의 영역이지만 서패전은 다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진복이 아쉬운 눈빛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

흑수애로 들어오는 흑천관은 오가는 이들로 붐볐다.

흑천관 외곽 한적한 객잔.

한 쌍의 부부가 들어섰다.

서른 가량의 남편은 소심해 보였고, 젊은 아내는 피부가 거칠고 꺼먼 박색이었다.

두 사람은 객방은 잡지 않고 반점 구석에서 숙덕거렸다.

“오긴 왔는데 어떻게 흑수애로 들어가지?”

남편으로 분장한 귀영이 묻자 아내로 분장한 남궁우가 고개를 저었다.

“뭐하러 흑수애까지 가. 여기가 길목이라고. 특임감찰이 오면 이 일대가 난리날 거야. 그때 재빨리 합류하면 돼.”

“으음. 특임감찰이 은밀히 잠입하면 우리도 모를 텐데? 신법이 귀신같거든.”

“우선 저녁 먹고 분위기를 알아보자고.”

남궁우가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시켰다.

여자 목소리로 음식을 주문하는 남궁우를 보며 귀영이 소름이 끼친 듯 팔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여자 흉내 하나는 기막히네.”

그러다 의뭉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기왕 변장할 거 좀 예쁜 얼굴로 하지. 보는 맛이 없잖아.”

“헛소리 말고 너도 주문이나 해.”

잠시 후.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데 흑의무복을 입은 사내 한 무리가 들어왔다.

호기롭게 한복판 탁자를 차지한 무리는 술을 시켜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그중 턱수염이 텁수룩한 사내의 한마디에 귀영과 남궁우가 음식을 먹다말고 얼어붙었다.

“이보게. 검천부주가 우리 쪽으로 전향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 누구 아는 바 있나?”

***

서패전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대문 안 너른 광장에 수십 명이 도열하고 있었다.

“검천부주를 뵙습니다!”

도열했던 무사들이 한목소리로 일제히 외치더니 양 옆으로 갈라서며 길을 내주었다.

무한은 피전격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수작이지?

천천히 한가운데를 질러 서패전 대전으로 올라갔다.

대전 상석에 앉아 있던 피전격이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내려와 맞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잘 왔네. 왜 이리 늦었단 말인가.”

마치 오랜 형제를 맞이하기라도 하듯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까지 띠었다.

“자, 자. 이리 와서 앉게.”

피전격이 무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대청 옆 협실로 갔다.

협실 다탁에는 이미 차와 다과, 과일이 놓여 있었다.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답이 없어 서운했네. 그래도 뒤늦게라도 왔으니 그건 넘어가고…….”

피전격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짓고 있다.

“자네가 흑천에 투신한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네. 그럴 의향이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무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들었다.

“…….”

“자네가 퍼뜨린 것 아닌가?”

무한의 표정을 살핀 피전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눈에 재밌다는 빛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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