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무척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싸늘한 얼굴로 무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한은 눈앞의 중년인이 사사천주라는 걸 깨달았다.
‘성정이 무척 급하네?’
아까 사뇌 납득이 왜 한참을 머뭇거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초청을 거절했다는 말에 바로 달려오리라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잠시 무한을 살피던 피전격의 눈에 돌연 광망이 번득였다.
“버릇을 고쳐주마.”
피전격이 오른손을 내밀어 무한의 어깨를 잡으려 하였다.
느린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기운까지 실려 있어 어지간한 이는 꼼짝 못 하고 어깨를 잡힐 상황이었다.
스윽.
무한이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미끄러지듯 옮겨 갔다.
“흥! 어림없다.”
순간, 피전격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무한 또한 정자를 벗어났다.
“응?”
피전격은 두 번이나 무한이 피하자 인상을 썼다.
“우사의 말이 맞았군. 어린놈이…….”
누구를 칭찬하는 법이 없는 피전격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한 발을 내디디며 양손을 펼쳤다.
파악!
허공이 찢어지는 기음과 함께 피전격의 전신에서 검은 빛이 폭사되었다.
순간, 무한은 사방이 막힌 밀실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피할 곳이 없었다.
“이제 피할 수 없겠지?”
피전격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오른 주먹을 쭈욱, 뻗었다.
콰르르르.
피전격의 전신에 어린 검은 빛이 주먹을 따라 쭈욱 밀려왔다.
무한이 소주천을 운기하며 전신 내공을 끌어 양손바닥을 내밀었다.
푸르스름한 뇌전의 기운이 양팔에 어렸다.
콰앙!
주먹과 양손바닥이 부딪히며 무한이 주르륵 일 장여 밀려났다.
피전격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주먹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주먹이 녹슬었나? 애송이 하나를 박살내지 못하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스치는 건 감출 수 없었다.
무한은 담담한 얼굴로 피전격을 보았다.
양손이 얼얼하고, 내장이 뒤틀리는 충격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안 아프냐?”
피전격이 속을 들여다보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도무지 진지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정을 두어 주어 고맙소.”
무한은 피전격의 일초가 자신의 무위를 알아보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기에, 삼 할의 힘은 감춰둔 채 맞받아쳤다.
그렇기에 일 장이나 밀렸으나. 피전격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그친 게 놀라웠다.
우사에게서 무한이 진경이긴 하나 화경의 고수를 상대할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경지가 나뉘는 건 서 있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다. 임기응변이나 암수로 극복할 수 없는 게 경지의 차이다.
그런데 지금 무한과 일초를 겨루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전격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나와 독대할 수 있지. 앉아라!”
피전격이 어느새 정자에 앉아 무한을 불렀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곤 피전격을 바라봤다.
“네놈 때문에 혈사대가 축나고 우사는 팔을 잃었다. 내 수하들의 피로 목숨을 붙여줬는데 냉큼 오지 않고 뭐하는 게냐? 내가 내려가서 잡아와야겠느냐?”
무한이 정자에 올라 마주 앉았다.
피전격이 무한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싸늘한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흥! 어린놈이 대담하군. 제 발로 나를 찾아오다니. 게다가 노조를 염탐해?”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오?”
“천하방 검천부주라면 훌륭한 인질이지.”
무한은 피전격이 일부러 윽박지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왜 답이 없느냐?”
“내가 인질로 가치가 없다는 건 천주가 더 잘 알 것 같소.”
“으음. 음흉하기까지 하군. 잘 알아둬라. 내 앞에서 머리 굴리는 놈 치고 살아나간 놈이 없다.”
피전격이 코웃음을 치곤 말을 이었다.
“네놈이 천하방에서 천대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럼 어떠냐? 차라리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냐?”
이번에는 무한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피전격을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분명하게 대답을 하란 말이다. 내 밑으로 온다면 바로 이인자의 자리를 내주겠다.”
진심인 것 같아 등골에 소름까지 끼쳤다.
“천주는…… 참 대단한 사람 같소.”
무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무지 생각의 한계라는 게 없는 이 같았다.
“내가 대단하기는 하지.”
피전격이 진심으로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주먹을 내보였다.
“이 손 보이나? 이 주먹 하나로 사사천을 일궈냈다. 너처럼 부모에게 물려받은 게 아니다. 남아라면 자신의 목을 걸고 대업을 이루는 게 당연하지.”
말하다말고 피전격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흑천전을 향해 소리쳤다.
“노조! 들었소?”
흑천전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흥! 듣고 있다는 것 알고 있소. 내 뜻은 분명히 밝혔소!”
그러더니 불쑥, 일어나 정자를 내려갔다.
“하루 주겠다. 내일까지 서패전으로 들어와라.”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다짐하듯 내뱉고는 성큼성큼 걸어 가버렸다.
그제야 무한은 피전격이 온 것은 자신이 아니라 흑천노조에게 뭔가를 말하고자 함이었음을 깨달았다.
무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사천주의 수에 놀아났군.’
두서없이 폭주한 듯했으나 그 모든 게 의도한 바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신중하게 행동해도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들의 심계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겠지.’
무한은 피전격이 알아간 게 뭘까 잠시 생각했다.
그 짧은 사이 무한의 무위를 파악하고, 천하방 내에서의 위상을 확인했으며……
그러다 스치는 생각에 안색이 급변했다.
‘피전격이 나와 흑천노조의 관계를 알고 있어!’
흑천노조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인 건 흑천의 후계를 흔들지 말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흑천노조가 무한을 동흥전에 들였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비상식적이다.
그럼에도 피전격 같은 고수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두 사람이 혈연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어떻게?’
무흔은 그 사실을 아는 자가 흑천노조 외에는 없을 거라 했다.
무한의 생각이 흑선수사에게까지 미쳤다.
‘단조도 의심은 하고 있어.’
그러기에 흑천노조의 의중을 돌려 물었을 것이다.
애초에 흑천노조가 무한을 동흥전에 들인 게 말이 되지 않는다.
‘흑천노조는 이렇게 될 걸 알고 동흥전을 내준 거야.’
흑천노조의 의중까지 헤아리려니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해졌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방 수뇌부들이 어찌 나올까?’
무한의 생각이 깊어갔다.
***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
귀영이 창밖의 안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당전수는 백독대를 이끌고 당가 무인들의 유해를 수습하러 떠난 지 오래다.
귀영과 남궁우는 그대로 중경에 머물고 있다.
무한은 그들에게조차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사라졌다.
귀영은 입맛도 없었다.
무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는 그야말로 길바닥을 구르는 낙엽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고강후가 살인멸구 하려 들지도 모르지.’
그러자 왠지 목덜미가 오싹했다.
고강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게다가 장자 고우까지 죽었으니 눈이 확 돌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무한 옆에 붙어 있는 게 장수하는 길이다.
“후우.”
귀영이 다시 한숨을 쉬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탁자 맞은편에 남궁우가 앉아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다.
귀영은 짜증이 났다.
“너는 특임감찰이 실종됐는데 밥이 넘어가?”
남궁우가 입 안 가득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흥! 나는 해임됐다고. 이제 호위가 아니란 말야.”
“의리도 없는 놈. 네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해임한 거지. 싹싹 빌라고.”
“빌려고 해도 사람이 없잖아.”
“그러니까 너는 걱정도 안 되냐고? 특임감찰이 잘못되면 호위들이 책임져야 한단 말이다.”
남궁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머리를 굴려봐. 어디 갔는지 모르지만 원단 이후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지.”
“원단 이후? 그렇지!”
귀영이 무릎을 치다 울상을 지었다.
“알면 뭐해. 우리가 흑천에 갈 수도 없잖아.”
“가야지.”
“으음. 흑천에 가자고? 죽고 싶은 거냐?”
귀영이 신음성을 흘렸다.
“우리는 천하방 사람이라고. 특임감찰 호위가 흑천 영역에서 어슬렁거리면 얼씨구나 하고 잡아다 족칠 걸?”
“이 바보야. 위장하면 되지. 신분을 감추면 우리가 특임감찰 호위인지 뭔지 누가 알겠어.”
“혈사대 놈들이 알지.”
“걱정 마. 내게 아주 좋은 인피면구가 있거든. 감쪽같이 위장할 수 있어.”
“그래?”
귀영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쉿! 여기 우리를 지켜보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신분을 위장하려면 감쪽같이 빠져나가야 해. 그러니 평소처럼 술이나 마시라고.”
남궁우가 눈짓을 하자 귀영이 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봐, 여기 술 더 가져와.”
***
흑천전 내실.
환하게 밝혀진 방에 흑천노조와 무한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음식은 단출했다.
특히 흑천노조의 앞에는 채소 몇 가지뿐이다. 흑도의 하늘이라는 흑천노조의 저녁상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한 앞에는 따로 고기볶음과 생선탕이 놓여 있었다.
‘…….’
무한은 자신의 앞에 놓인 요리가 낯익었다. 어렸을 적 서안에서 먹던 요리들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진복이 와서 빈 그릇을 치우고 차를 가져왔다.
그동안 깊은 침묵만 내실에 흘렀다.
“심양조의 돌연한 죽음이 석연찮았는데,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군.”
흑천노조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으며 말했다.
흑천노조는 검신 심양조보다 나이가 윗줄이었다.
“선대의 은원에 얽매일 필요 없다.”
무한은 흑천노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복수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다.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하지만 집착하다보면 네 본질을 잃을 수도 있다.”
흑천노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동흥전에 머물게 한 의미는 너무 깊이 생각할 것 없다. 연을 끊은 건 나지, 네가 아니니까.”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피전격? 그 녀석은 그냥 한번 을러댄 것뿐이다. 내게 불만이 많지. 그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흑천노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흑천노조는 무한을 데리고 내실 옆에 딸린 방으로 들어갔다.
십 장 넓이의 방은 연공실이었다. 방 가운데 한 자 높이의 돌로 된 평상이 놓여 있었다.
“네 어미가 가르쳐준 천심공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투심술 단계에 불과했지.”
흑천노조가 평상에 좌정하며 무한에게 일렀다.
“앉아라.”
무한이 잠시 주저하였다. 흑천노조가 뭘 하려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고 섰느냐? 내가 무공을 전수하면 천하방에 트집 잡힐 것 같으냐?”
“그런 게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무한이 말했다.
“다만, 천심공은 저주라고 하셨는데 제게 전수하려니 의아해서 그럽니다.”
흑천노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익힌 천심공은 불완전한 것이다. 대성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후유증으로 미치거나 주화입마를 당하기 딱 좋지.”
그러면서 한숨을 쉬었다.
“네 어미가 그 공법을 가져갈 줄은 몰랐다. 그저 익히면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내 말만 믿고 그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