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환노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우사를 무시하고 무한을 바라봤다.
“검을 버리다니……. 투항할 뜻이라도 있는 게냐?”
무한은 대답 대신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노궁을 통해 쏟아진 기운이 뭉치더니 소검을 이뤘다.
그 모습을 본 환노의 얼굴이 굳었다.
“이제 보니 수위를 감추고 있었구나.”
무한은 말없이 손바닥에 둥둥 뜬 강기의 검을 쏘았다.
파팟!
환노가 다시 순간적으로 이동하였으나 소검은 빠르게 방향을 바꿔 쫓았다.
“무형검! 이건 말이 안 돼. 말이 안 된다고…….”
우사가 입을 쩍 벌렸다.
무형검을 띄우는 건 적어도 화경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나 가능하다.
하지만 무한은 검마로부터 얻은 바가 있어 강기의 검을 이뤄낼 수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무형검과 위력이나 운용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만 보는 이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환노 역시 크게 놀라 순간적으로 다섯 번이나 자리를 바꾸며 날아드는 소검을 피했다.
소검이 무한으로부터 삼 장 거리를 벗어나자 기운이 끊기며 허공에서 스러졌다.
‘아직은 부족해.’
무한이 아쉬워하였다.
환노의 단혼사를 상대하려면 삼 장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이 소검을 운영할 수 있는 범위 또한 삼 장 거리이다.
쉬익!
잠시 멈춘 사이 환노의 단혼사가 무한을 향해 날아왔다.
무한이 다시 강기의 검을 형성하기 전에 해치울 생각인 듯 집중적으로 무한을 노렸다.
그러자 우사가 좌검우도를 휘저어 검기를 날렸다.
단혼사가 두려워 삼 장 거리 밖에서 날리는 검기와 도기였지만 환노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파파팟!
환노는 등 뒤를 노리는 검기와 도기를 무시할 수 없기에 무한을 몰아치면서도 우사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상대를 공격하니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 순간.
“크윽!”
우사가 뒤로 튕겨져 나갔는데 왼팔이 팔꿈치 아래서부터 끊어졌다.
두 눈을 부릅뜬 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왼팔과 환노의 단혼사를 보았다.
분명 삼 장 거리를 두었는데 갑자기 단혼사가 늘어나기라도 한 듯 왼팔을 감아 잘라냈다.
마치 예리한 칼로 단번에 자른 듯 깔끔하게 잘려 하얀 뼈가 보였다.
“조, 조심해라. 단혼사의 길이가…….”
우사가 미처 경고하기도 전에 단혼사가 무한을 감아왔다.
무한 역시 환노가 단혼사의 길이를 속여 왔다는 걸 깨달았으나 이미 늦었다.
쉬익!
단혼사가 무한의 목덜미를 덮쳤다.
무한이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어 단혼사를 감았다. 팔 하나를 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팽!
단혼사가 무한의 왼손 손목보호구에 감겨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
워낙 착용감이 좋아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손목보호구.
이전 싸움에서도 유용했는데 설마 단혼사를 막아낼 줄은 몰랐다.
환노 역시 놀라 재차 강기를 주입하며 단혼사를 끌어당겼다.
무한이 손목보호구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오른손바닥을 펼쳐 강기의 검을 날렸다.
미처 소검의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날린 강기의 검이었지만 피륙을 가르기에는 충분했다.
환노가 급히 몸을 비틀며 왼손으로 쳐내려 했다.
서걱!
환노의 손바닥이 그대로 잘리고 강기의 검이 가슴을 관통하였다.
“크윽!”
환노의 입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 우사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는 환노의 등을 도로 찍었다.
퍼억!
환노가 등을 강타한 도의 충격에 그대로 쭈욱, 밀려나와 무한 앞에 나뒹굴었다.
우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도를 내리찍은 듯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우사의 일격에 심장이 터진 환노가 울컥, 하고 피를 토하더니 무한을 향해 말했다.
“이제 알겠군. 잔노가 어찌 죽었는지…… 손……우자의 본명은 오경연…… 놈을 막아…….”
환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무한이 흠칫, 환노에게 다가가 살펴봤으나 이미 숨을 거뒀다.
‘손우자를 막으라고?’
그러자 환노가 처음부터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크윽!”
뒤에서 터지는 비명에 무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무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일행 쪽을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혈사대주가 괴인의 가슴에서 도를 뽑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는 혈사대원은 불과 두어 명.
다행히 당전수와 남궁우, 귀영은 무사했다. 그들 역시 피범벅이다.
마지막 괴인이 혈사대주에 의해 쓰러지자 귀영이 쿵, 하고 뒤로 넘어졌다.
“나, 나는 이제 꼼짝 안 할 거야.”
그 옆에 당전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의외로 가장 왜소한 체구의 남궁우만이 아직 검을 들고 경계를 섰다. 남궁우의 검 끝은 혈사대주로 향하고 있었다.
혈사대주가 남궁우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 수하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살려준 대가가 그거냐?”
혈사대의 피해가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당전수 등을 보호하며 싸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납치하러 온 것 아니었나?”
남궁우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적에서 동지로, 동지에서 다시 적으로 되는 순간이었다.
무한이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고 남궁우에 다가갔다.
“검을 내려.”
무한이 혈사대주를 향해 말했다.
“서로 좋은 인연은 아니니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그럴 수는 없다. 내 수하들이 왜 죽었는데?”
혈사대 삼개조 대부분을 잃고 심복인 일조장마저 죽었다.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눈앞의 애송이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때 우사가 다가왔다. 잘린 팔 부위를 동여맨 우사의 안색은 창백했다.
“네 상대가 아냐. 천주에게는 내가 말하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소.”
혈사대주가 항의하는데 무한이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흑천을 찾아가지요.”
“뭐?”
무한의 말에 혈사대주는 물론이고 남궁우, 당전수까지 놀랐다.
꼼짝 못하겠다던 귀영은 벌떡 일어났다.
“부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무한이 혈사대주에게 말했다.
“사사천주가 나를 보자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왔지.”
“조만간 흑천을 찾겠다는 말입니다.”
“그걸 믿으란 말이냐?”
무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천하방 검천부주의 말이오.”
혈사대주가 움찔하였다.
‘뭐야, 이 애송이는…….’
순식간에 바뀐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듯했다.
“크음…….”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자신이 약관도 안 된 애송이에게 기세에서 밀리자 혈사대주가 헛기침을 하였다.
우사가 말했다.
“조만간이라면 언제라는 말인가? 나도 천주에게 할 말은 있어야지.”
무한이 당가로 가는 일정을 헤아려보고 말했다.
“원단(元旦)이 지난 뒤 가지요.”
“알겠네.”
우사가 우울한 얼굴로 자신의 잘린 왼팔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팔을 잃은 대가로 검천부주의 약속을 얻은 걸로 하자고.”
***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화수전의 살수 운객이 나타났다.
그는 무한이 환노와 싸운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단혼사가 땅바닥을 베고 간 자리, 눈 위에 남은 발자국, 검기가 헤집고 간 땅바닥……
꼼꼼히 살펴보던 그가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
운객이 서서히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무한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운객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스쳤다. 자신이 발각될 것이란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무한은 운객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눈을 마주하고 서 있는데도 운객에게서는 한 점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대하는 듯했다.
“풍운야우…… 운객인가?”
무한은 운객에게서 우객의 그림자를 느꼈다.
아무런 기운이 실리지 않은 허허로움. 그러나 어느 순간 폭사하는 살기를 알고 있다.
운객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놀랍군.”
“화수전이 규칙을 어기는 건가?”
세 번의 살행을 실패하면 포기한다는 화수전의 규칙.
운객이 고개를 저었다.
“풍운야우는 화수전의 규칙에서 자유롭다.”
“우객의 복수를 할 생각인가?”
운객이 고개를 들어 동이 트는 하늘을 봤다.
‘우객, 복수를 원하나?’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그 스스로도 무한을 쫓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운객이 고개를 돌려 무한을 향해 말했다.
“이유를 알게 되면 말해주지.”
무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전수 등과 산을 빠져 나가려다 누군가 쫓는, 그 이상한 느낌 때문에 돌아왔다. 화수전의 살수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살수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천목투심술을 발휘해도 돌아오는 건 공허함뿐이다.
여기서 처리하고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 운객의 신형이 스르륵 사라졌다.
‘이상한 자야.’
상대가 누군지 알자 찜찜함은 해소되었다.
화수전의 자객이라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우객을 상대할 때와는 무한 자신이 다르다.
무한은 운객이 사라진 쪽을 잠시 바라보다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귀영과 남궁우가 다투고 있었다.
“명문가 출신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내가 말했지. 알아서 하겠다고.”
옆에서 팔목과 허벅지에 붕대를 감은 당전수가 한심한 듯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가 들어봤더니 귀영이 등에 난 상처를 붕대로 감아주겠다는데 남궁우가 필요 없다고 거절했고, 귀영은 자기를 무시하는 거라고 화를 내는 중이다.
“흥! 고상한 척하기는.”
귀영이 콧방귀를 뀌고는 먼저 산을 내려갔다.
당전수가 남궁우에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주는 게 낫지 않아?”
“뭐? 뭘 사실대로 말하라는 거야?”
남궁우가 정색을 하고는 귀영을 따라 내려갔다.
“꽤 아플 텐데.”
당전수의 말에 무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겨울이라 덧나지는 않을 거야. 산을 내려가면 중경이야. 의원이 있겠지. 어서 가자고.”
무한이 당전수의 어깨를 툭, 쳤다.
“으윽.”
당전수가 인상을 팍, 쓰고는 걸음을 뗐다.
무한이 속으로 웃었다.
‘녀석, 네놈도 멀쩡한 척하느라 애를 쓰고 있잖아.’
괴인들과의 싸움에서 무한 자신은 물론이고 일행 모두 부상이 적지 않았다.
‘다시 습격을 받으면 누구 하나 죽을 수도 있다.’
무한이 당전수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며 물었다.
“혹시 천하방에서 받은 게 있나? 서찰이나 선물 같은 거.”
당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뭔가 생각난 듯 등에 맨 보따리를 풀렀다.
“이걸 받았지.”
천하방주의 직인이 찍힌 한 통의 서찰과 작은 목합.
목합엔 봉인지가 붙어 있었다.
무한이 살펴봤으나 별다른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줘봐.”
당전수가 목합을 들더니 약보따리에서 하얀 약병을 꺼내 목합 틈새에 부었다.
투명한 액체 하나가 목합 틈새에 떨어지더니 은은한 향이 났다.
당전수가 향내를 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추종향이야.”
“버리고 갈 수는 없겠지?”
천하방주가 보내는 예물이니 버리면 당전수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다.
“방법이 있지.”
당전수가 약보따리에서 하얀 약병을 꺼냈다. 이어 보자기에 목합을 넣고 약병의 가루를 부었다.
“향은 향으로 제압하는 거지. 보통 향은 추종향을 덮을 수 없지만 이건 당가 비전의 추종향이야. 모든 향을 제압하지.”
무한은 새삼 당전수가 당가 소가주라는 걸 깨달았다.
“진작 생각했어야 했는데.”
당전수가 미안해하였다. 명색이 당가 소가주가 추종향에 당하다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야. 이제 알았으니 됐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