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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18화 (118/250)

118화

강변에서의 혈전이 퍼지며 천하방은 물론 사천과 호남, 호북 무림이 들썩였다.

“흑천이 당가 소가주를 습격하여 당가는 물론 도천대까지 당했다더군.”

“당전수는 생사불명이래.”

“도천대공자 고우와 검천부주 심무한도 실종됐어.”

처음에는 흑천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뒤이어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 흑천 혈사대가 괴인들의 습격으로 죽을 뻔한 당전수 일행을 구했다.

- 괴인들이 고우를 죽였다!

흑천에서 퍼뜨린 소문에 천하방은 충격에 휩싸였다.

천하방주 도왕 고진의 장손이 죽었다!

사람들은 흑천이 고우를 죽이고, 천하방의 보복이 두려워 거짓소문을 퍼뜨렸다고 받아들였다.

동시에 사천 진출을 모색하는 흑천과 천하방이 일전을 벌일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다.

고우가 죽었다는 소식에 도천대는 물론 도천부 제이무력대 도룡대까지 총출동하여 무한 일행의 행적을 뒤졌다.

***

무한 일행이 중경에 들어섰을 때, 거대한 도시는 안개에 잠겨 있었다.

음울한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듯한 분위기였다.

강가의 객잔에 든 뒤 남궁우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귀영 역시 상황을 알아보겠다며 나갔고, 무한과 당전수만 각기 자신의 객방에 남았다.

무한은 환노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경연…… 놈을 막아…….’

무한은 그간 손우자에 대해 알아봤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천기자의 대제자이자 군사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소소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총군사에 대한 기록은 극비로 관리하며 볼 수 있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조차 몰랐다.

무한은 추노에 대해 떠올렸다.

추노는 귀영의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손우자에게 충성을 했다.

잔노는 주어진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환노는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손우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무엇을 막으란 거지?’

무한이 이층 객방 창가에 서서 안개에 잠긴 거리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당전수가 들어왔다.

오는 길 내내 어두웠던 당전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본가에서 무인들이 왔어. 이제 안심하고 갈 수 있어.”

무려 일백으로 이뤄진 백독대(百毒大)가 모두 왔다고 했다.

“백독대라면…….”

“본가 최정예라고 할 수 있지. 만독문을 공격할 때 이후로 백독대 전원이 강호에 나온 건 처음이야.”

당가에서 지금 상황을 얼마나 엄중히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세를 알아보러 간 귀영도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다.

“도천대와 도룡대가 쫙 갈려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객잔 앞이 인기척으로 소란스러웠다.

점소이가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손님이 혹시 심 씨이십니까?”

“그런데?”

“누가 찾아왔습니다.”

무한이 일층으로 내려가니 객잔 반점에 위맹한 장년인이 서 있었다.

‘신악강?’

도천대를 신검무적대를 제치고 당금 천하방 제일무력대로 조련한 인물.

도천대주 신악강은 말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무한을 보았다.

태산처럼 버티고 선 그의 얼굴은 더없이 굳어 있었다.

반점에는 질식할 것만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무한이 계단을 내려와 신악강 앞에 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악강의 눈에서 매서운 빛이 폭사되었다.

그러나 무한은 태연한 얼굴로 신악강의 시선을 받아냈다.

뒤따라 내려온 귀영은 영문을 몰랐지만 당전수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대번 알 수 있었다.

무한은 검천부주.

천하방주 도왕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신분이다.

무한은 신악강이 먼저 예를 취하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신악강은 한참 어린 후배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게 내키지 않은 것이리라.

평소 무한이 귀영에게도 존대하는 걸 본 당전수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무한을 보았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자. 능히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라.’

할아버지 독왕이 직접 써서 가주전 벽에 걸었다는 족자의 글귀가 새삼 머릿속을 스쳤다.

“……!”

신악강의 뒤에 도열한 도천대 조장들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신악강이 직책은 무력대주에 불과하지만, 과거 정마대전에서부터 활약한 천하방의 노장이기도 하다.

비록 심무한이 신분이 높다 해도 한참 어린 나이이니 먼저 예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악강이 먼저 예를 취하기를 기다리니 도천대 조장들은 분개하였다.

그러나 신악강이 입을 열지 않고 있으니, 그 어느 누구도 나설 수 없었다.

무한은 무심한 얼굴로 신악강을 볼 뿐이다.

팽팽한 대치를 깬 것은 신악강이었다.

검천부주와 도천대주라는 신분의 차는 어찌할 수 없었다. 신악강이 포권을 하였다.

“도천대주 신악강이외다. 검천부주께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소.”

“고우 대공자에 대해 묻는 것이겠지요?”

그제야 무한이 마주 포권을 하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안타깝게도 오는 도중 괴인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였습니다. 첫 번째 공격에서 도천대 이개조가 전멸하였고, 두 번째 기습에서 고우 대공자와 마철립 도천일조장이 당했습니다.”

“아!”

신악강의 뒤에 도열했던 조장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직접 본 것이오?”

“도천대 이개조의 시신은 마철립 조장이 직접 매장하였고, 고우 대공자와 마철립 조장은 저와 당 소가주가 안치해뒀습니다.”

환노가 죽고 혈사대가 간 뒤 무한과 당전수는 조각난 고우와 마철립의 시신을 거두어 임시로 만든 관에 넣고 불전 뒤에 안치하였다.

“시신을 거두지 않았소?”

왜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가서 직접 보시면 이유를 알 것입니다.”

육신이 두 동강 났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무한이 산속의 폐사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너희는 먼저 가서 시신을 확보해라.”

신악강이 뒤에 있던 조장에게 일렀다.

“잠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무한은 신악강과 이층 별실로 올라갔다.

안내한 점소이에게 신악강이 일렀다.

“술을 가져와라.”

“안주는…….”

“필요 없다.”

점소이가 술을 가져오자 신악강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벌컥 마셨다.

석 잔을 연거푸 마신 후 신악강이 잔을 내려놓았다.

고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 주군 도왕의 장손이다.

도천부 제일무력대주로 고우의 죽음에 책임 있는 자는 살려둘 수 없다.

신악강이 무한을 노려보며 물었다.

“습격자들이 누군지 알아냈소?”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모릅니다.”

“어찌된 일인지 정황을 들려주실 수 있겠소?”

“그러지요.”

무한은 감출 게 없었다.

당가 무사 셋이 죽은 것부터 강변의 혈전, 산속 폐사지의 격전까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 과정에 있었던 고우의 비겁한 행동은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악강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혈사대가 습격했는데 왜 고 공자 혼자 떨어져 있었단 말이오?”

“일어난 일만 거론했습니다. 그 이유까지 듣고자 합니까?”

신악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한 것이다.

신악강이 말했다.

“심 부주의 말에 따르면, 강변 혈전의 습격자가 백 명에 이르렀다고 했소. 그런데 우리가 현장에 당도했을 때는 시신이 한 구도 없었소.”

“……?”

“당금 강호에 일백 무력대를 조직하여 운용하고, 그 정도로 현장을 지워버릴 세력은 많지 않소.”

“무슨 뜻입니까?”

“흑천의 농간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소?”

“폐사지에서는 혈사대도 당했습니다.”

“강호는 음험한 곳이요. 심 부주도 나이가 들면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흑천이 혈사대까지 희생해가며 그런 짓을 꾸밀 이유가 있을까요?”

“고 공자의 죽음을 회피할 수 있다면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이오.”

“…….”

신악강은 어떻게든 흉수를 알아내야 할 책무가 있다.

무한은 괴인들의 뒤에 손우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나 증거가 없으니 말할 수가 없었다.

“고 공자를 해쳐서 흑천이 얻는 게 뭘까요?”

“천하방 후계의 혼란!”

신악강의 눈에서 매서운 빛이 폭사되었다.

무한은 신악강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흑천과 손잡고 고우를 죽임으로써 천하방 차기 후계가 흐트러지면 무한에게도 기회가 생길 거라 보는 것이다.

무한은 기가 막혔다.

고우를 자신의 상대로 생각해본 바가 없다.

‘내 상대는 도왕과 손우자야.’

무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주의 말대로라면 흑천의 음모에 나도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겠군요.”

어쩌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기회에 검천부를 제거하면 도천부로서는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고우 말고도 도왕의 손자는 다섯이나 남아 있으니까.

무한은 도천부가 결론을 그 방향으로 몰아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신악강은 무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듯 노려보기만 한다.

무한이 피식, 웃었다.

“신 대주가 도천부의 충신이라는 건 알고 있소.”

무한의 말투가 바뀌자 신악강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가정이오. 하지만 검천부를 모욕한다면 나 역시 가만있을 수 없소!”

무한이 술병을 들어 신악강의 잔에 따랐다.

“마지막 잔이오. 강변 괴인들의 시신이 사라졌다면 폐사지 격전의 흔적 또한 지워질 것이니 서두르는 게 좋겠소.”

무한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보이는 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했소? 일단 제대로 보기나 하시오.”

신악강의 굵은 검미가 꿈틀하였다. 그의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다.

“뒤가 구린 자는 종종 강한 부정을 하곤 하지.”

신악강이 손바닥을 펼쳐 술잔을 눌렀다.

퍽!

술잔이 가루가 되고 술이 피시식 기화되었다.

탁자에 손자국이 남았다.

무한이 신악강의 경지를 파악했다.

‘진경 아래는 아니야.’

신악강은 신검대주 담철조나 무적대주 공곤과 같은 연배이자 호적수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곤 말없이 별실을 나왔다.

손우자의 의도가 눈에 보였다.

자신과 당전수를 제거하는 데 실패하자 다음 수로 자신을 흑천과 연결 지으려는 것이다.

‘어쩌면 사지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손우자가 당가를 충동질한다면?

천하방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당가 입장에서는 무한 대신 손우자와 손을 잡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그날 저녁.

객방에 있는데 남궁우가 찾아왔다.

“당가에서 백독대가 왔다며? 그들과 함께 가면 고생 끝이지.”

남궁우는 한시름 놨다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상처는?”

“괜찮아. 이까짓 쯤이야.”

남궁우가 별 게 아니라는 듯 대범한 척했다.

무한이 남궁우를 가만 바라보다 물었다.

“남궁세가가 원하는 게 뭐지?”

남궁우가 흠칫, 놀라 무한을 보았다.

“의도하는 바가 있으니 너를 보낸 것 아닌가?”

“나는 남궁세가 방계라고. 있으나마나한 존재야. 그러니 내 살길 찾아온 거지.”

남궁우가 재빨리 대답했다.

“남궁세가에서 지낭이라 불리는 인재를 그리 쉽게 내돌리나? 이번에 죽을 뻔 했잖아.”

“내 한 몸 지킬 만한 실력이 되거든.”

무한이 말없이 남궁우를 주시하였다.

“뭐야?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건데?”

“네가 진실하지 않으면 앞으로 함께 할 수 없어.”

무한의 말에 남궁우가 당황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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