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16화 (116/250)

116화

“아니!”

무한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며 백발노인과 혈사대, 당전수 등의 사이에 섰다.

“나와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거야.”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나직한 어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무한에게 쏠렸다.

일조장은 방금 전 순순히 포박을 받아들이던 무한과 지금의 무한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귀영조차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남궁우만이 흥미로운 눈길로 무한을 보았다.

백발노인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차갑고 무심한 눈빛에 미미한 파장이 일었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어려서 혈기를 누르지 못하는 건가? 살 방도를 일러주려 하는데 죽을 길로 가려 하는군.”

무한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환노라고 한 백발노인의 말에 진정성이 느껴진 것이다.

‘고우와 일행 모두를 죽이고, 나는 살려주겠다?’

궁금해진 무한이 물었다.

“그의 뜻인가?”

뜬금없는 말에 환노의 하얀 검미가 살짝 휘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긴 한숨을 쉬고는 손짓을 하였다.

순간 장내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백발노인의 수신호를 받은 여섯 괴인이 움직였고, 잔뜩 경계하고 있던 혈사대가 바로 맞대응하였다.

여섯 괴인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라 이형환위를 방불케 하였다.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모습이 강변에서 무한과 맞섰던 네 명의 괴인과 비슷한 신법을 익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절정고수들이다. 수비대형을 지키고 당전수를 확보해!”

혈사대주가 일조장을 향해 외치는 동시에 커다란 대도를 휘저으며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른 명의 혈사대원들이 일제히 도를 휘두르니 얼어붙은 땅바닥의 눈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얼음조각과 날리는 눈으로 마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눈과 얼음조각이 날리니 시야확보가 어려웠다.

“어엇!”

혈사대원 하나가 빙판에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은 순간, 괴인의 칼이 날아들었다.

“우어엇!”

마침 옆에 선 귀영이 엉겁결에 도를 휘둘러 막았다.

터엉!

괴인의 칼에서 전해오는 막강한 경력을 해소하기 위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두 번이나 돌아 내려선 귀영이 중얼거렸다.

“흑천도의 목숨을 구할 날이 있을 줄이야. 정말 어지러운 세상이야.”

“지금 헛소리 할 때야!”

남궁우가 귀영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귀영이 깜짝 놀라 허리를 숙여 피하는데 머리 위쪽에서 깡, 하며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채앵!

남궁우가 귀영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든 수리검을 쳐냈다.

맞은편에 있던 혈사대원이 괴인을 노리고 던진 수리검이 빗나가 귀영의 뒤통수에 꽂힐 뻔했는데 남궁우가 용케 쳐낸 것이었다.

괴인들의 신형이 워낙 빨랐기에 혈사대원들이 암기를 던지는 순간 사라졌고, 그 통에 아군의 암기에 부상을 입는 이들이 나왔다.

“암기는 쓰지 마라!”

혈사대주도 튕겨 나온 수리검을 쳐내며 외쳤다.

“크윽!”

숫자는 혈사대원들이 많았지만 괴인들의 기괴한 신법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각자 방위를 지켜!”

일조장이 대원들을 독려하며 눈앞의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식!

도가 허공을 치고, 옆에서 괴인의 칼이 베어 왔다.

“조장!”

혈사대원 하나가 뛰어들어 칼을 막는 사이 다른 대원 둘이 괴인의 뒤쪽에서 달려들었다.

쉬쉭!

괴인이 환영처럼 사라지는 찰나, 일조장이 몸을 던져 괴인을 막아섰다.

촤라락!

도가 섞였다가 승부가 갈렸다.

괴인의 도가 미끄러지듯 일조장의 몸을 훑었다.

“크윽!”

옆구리를 크게 베인 일조장은 그 와중에도 괴인의 팔을 움켜잡았다.

“죽여!”

일조장이 외치기도 전에 양 옆의 혈사대가 괴인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

“컥!”

괴인은 목과 옆구리를 베여 비틀거렸고, 다른 혈사대원이 등 뒤에서 재차 목을 쳤다.

괴인은 쓰러졌으나 옆구리가 갈라진 일조장도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조장!”

혈사대원 둘이 양 옆에서 달려들어 일조장을 부축하려 했는데, 어느새 괴인 하나가 귀신처럼 나타나 벼락같이 도를 내리쳤다.

“컥!”

목덜미에 칼을 맞은 일조장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조, 조장!”

“이익!”

일조장이 쓰러지자 일조원들이 광분하여 괴인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순간 괴인은 환영처럼 사라지고 도는 허공을 쳤다.

“이 개새끼들아!”

혈사대주는 심복을 잃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괴인 한 명과 일대일 접전 중이었다. 하지만 괴인의 신법은 무척이나 빨라 번번이 도가 빗나갔다.

무한은 환노와 삼 장 거리를 두고 대치하였다.

등 뒤의 상황이 궁금했으나 눈앞의 환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환노가 단혼사가 감긴 손목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네가 추노를 잡고, 잔노를 죽였나?”

누구를 말하는지 무한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한이 침묵으로 인정하자 환노가 재차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궁금한가?”

환노가 말없이 무한을 주시하다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렇군.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었어. 직접 확인하면 될 일.”

무한은 이미 전신에 기운을 퍼뜨린 상태였다.

환노라는 별호로 봐서 신법에 뛰어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신법이라면 무한 또한 자신 있었다.

스윽!

환노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미세한 파공성이 들렸다.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끌어올리고도 간신히 감지할 수 있는 소리였다.

문제는 환노의 무기가 약 삼 장 길이의 단혼사라는 것이었다. 일반 병장기와 달리 소리만 듣고 공격 범위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무한은 선 자세 그대로 발만 놀려 옆으로 신형을 옮기며 검을 세웠다.

피릿!

간발의 차로 단혼사가 무한의 오른쪽 볼과 귓불을 스쳤다.

뺨에서 뜨끈한 피가 흘렀고, 귓불이 잘린 듯 시렸다.

순간.

피피핏!

단혼사가 허공을 거칠게 찢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기병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다. 우객의 우산도 기병에 속했지만 단혼사는 차원이 달랐다.

환노는 채찍도 아닌 가느다란 은사(銀絲)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강기가 실린 단혼사는 걸리는 건 무조건 잘랐다.

무한은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환노와 삼 장 거리를 두려 했으나 악착같이 따라 붙어 쉽사리 떨치기 어려웠다.

단혼사가 스치고 지나가며 무한의 전신 곳곳에서 피가 터졌다.

선수를 놓친 무한은 반격을 할 새도 없어 피하기 급급했다.

환노는 단혼사로 연신 몰아치면서도 내심 의아해하였다.

잔노와 천잔사괴, 천잔대 절반을 몰살했다면 당연히 화경의 고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무한은 진경 수준으로 보였다.

사실 무한이 잔노와 천잔사괴를 해치울 수 있었던 것은 천목투심술 덕분이었으나, 환노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암중 조력자?’

무한 정도 되면 당연히 암중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환노가 단혼사로 무한을 몰아치며 승부수를 걸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소리도 없이 환노의 등을 노리고 날아드는 수리검.

환노는 용케도 이를 감지하고 환영보법을 펼쳤다.

수리검은 빗나갔으나 그사이 누군가 소리 없이 날아와 검을 찔렀다.

길지 않은 검은 쇠꼬챙이와 비슷했는데 살수들이나 씀직한 모양새였다.

“흥!”

환노가 코웃음을 치며 재차 신형을 옮기며 단혼사로 원을 그려 검을 감으려 했다.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검을 빼는 대신 오히려 앞으로 툭, 쳐서 날려 보냈다.

이어 허리 쪽에서 도를 빼서 단혼사를 쳐내더니 다시 수리검을 셋이나 날렸다.

검을 날리고, 도를 빼서 쳐내고, 수리검을 날리는 동작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환노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당!

환노가 왼손에 장력을 실어 날아오는 검을 쳐내고, 도에 감긴 단혼사에 강기를 주입하여 끌어당겼다.

까가강!

놀랍게도 도가 잘려나갔다.

그러나 수리검은 환노의 코앞에 도달했다.

휙!

환노가 허리를 눕혀 수리검을 피했으나 전부를 피하지는 못했다. 수리검 하나가 허벅지를 스쳤다.

무한은 갑작스레 나타난 조력자 덕분에 환사로부터 삼 장 거리를 벗어났다.

환노가 싸움에 개입한 자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무한의 암중호위 같지가 않았다. 전신에 흐르는 사이한 기운은 사파나 흑도의 것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

환노를 기습한 이는 사라졌던 우사였다.

우사는 통성명할 생각이 없었다. 혹시라도 이름을 남겼다가 후환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우사를 본 혈사대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다 이제 나타나셨소! 어서 이리 와서 이놈들 좀 잡아 주시오.”

남아 있는 괴인은 셋.

혈사대주가 분전을 했으나 괴인들의 신법은 그야말로 허깨비 같아 혈사대의 피해가 컸다.

남아 있는 혈사대원은 고작 십여 명.

일조장마저 죽었다. 귀영과 남궁우, 당전수가 가세하여 싸웠기에 그나마 버티고 있는 중이다.

괴인들은 교묘하게 초절정의 고수 혈사대주를 피하며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혈사대와 무한 일행만 노렸다.

“이 늙은이부터 해치워야 해. 잠시만 기다려.”

우사가 환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하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애송아. 저놈의 단혼사를 잡아둘 수 있겠냐?”

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환노가 움직였다.

환노의 신형이 사라진 순간.

피리리릿!

단혼사가 우사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갔다.

“이크!”

우사는 영리했다. 신법을 펼쳐 사선으로 빠지며 등 뒤에서 검을 뽑아 검기를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우사의 등 뒤에 아직도 검이 두 자루나 남아 있고, 허리춤에도 도 한 자루가 걸려 있다.

환노는 방해꾼부터 처리할 생각인 듯 순식간에 일 장 거리로 좁혔다.

우사는 단혼사의 범위 안에 갇혔다.

스으윽.

단혼사가 횡으로 날며 우사를 후려쳤다.

“제기랄! 내 이럴 줄 알았어.”

우사가 소리를 지르며 등 뒤의 검을 하나 더 뽑으며 쌍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단혼사의 무서움은 검에 걸리더라도 끊어지기는커녕 휘어져 들어와 사람을 벤다는 데 있다.

무한은 우사가 흑천 사람이지만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만큼 그대로 당하게 놔둘 수 없었다.

환노를 향해 몸을 날리며 검에 뇌전의 기운을 담아 던졌다.

파지지직!

파르스름한 뇌전의 기운을 담은 검이 환노를 향해 날아갔다.

환노가 신형을 움직여 피했으나 검은 눈이라도 달린 듯 방향을 바꿔 날아갔다.

환노는 어쩔 수 없이 우사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우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양손의 검을 동시에 날렸다.

환노의 머리와 복부를 향해 날아가던 검이 어느 순간 서로 충돌하더니 그대로 박살이 나며 파편이 환노를 덮쳤다.

팍!

환노의 신형이 꺼졌다가 일 장 밖에 나타났다. 환노의 무위가 우사보다 확실히 한 수 위라는 게 드러났다.

‘같은 진경이라도 차이가 크구나.’

무한도 내단을 형성하며 진경에 들었으나 환노와 내공대결을 하면 밀릴 게 분명했다.

천기조양환 덕분에 내단을 형성했으나 진경 본연의 경지에 들어서려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 할 심득을 얻지 못한 상태다.

“크흐흐…….”

환노가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검의 파편이 스쳐 전신에 핏줄기가 그어져 있었다.

우사가 남은 검 한 자루와 도를 빼어들었다.

환노가 그 모습을 보고 비웃듯 말했다.

“고수란 놈이…….”

진정한 진경이라면 유형의 무기가 주는 이점에 기대지 않는다.

바위를 무 자르듯 하는 명검이 아닌 이상 의미가 없는데, 우사가 병장기에 집착하는 걸 보고 한마디 한 것이다.

우사가 좌검우도의 자세를 취하며 대꾸하였다.

“네놈이 단혼사의 이점을 누리는데 내가 날붙이를 쥐는 게 못마땅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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