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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49화 (49/250)

49화

조약평에게 무한의 신분을 들은 모양이다.

“미처 몰라봤소. 검천부주를 여기서 뵙는군요.”

천하방 무인들 상당수는 여전히 천하제일인 심양조를 존경하고 있었고, 전경목 역시 그랬다.

무한을 대하는 말투부터 달라졌다.

“지금은 천무행을 나온 천무관 문하생일 뿐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전경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주가 쓰러졌다면 추적도 멈췄을 거요.”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마천 소천주가 직접 온 듯합니다. 게다가 감숙지부도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한이 광포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으음…….”

전경목이 침음성을 흘렸다.

“바로 난주로 빠져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승룡대는 섬서 제일의 무력대일세. 광풍대의 기습을 받아 패했지만 이렇게 맥없이 물러날 수는 없다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싸울 여력도 없지 않습니까?”

전경목이 돌연 고함을 질렀다.

“승룡대!”

그러자 승룡대원들이 일제히 복창하였다.

“승룡번천!”

우렁찬 목소리가 고원 평야에 울려 퍼졌다.

전경목이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대주가 죽고 형제들이 죽었다. 우리가 이 고원에 뼈를 묻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형제들의 원한을 갚아야 합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전경목이 무한에게 말했다.

“부상자들은 난주로 보내겠네. 검을 들 수 있는 자는 감숙지부로 가서 함께 싸울 걸세.”

전경목이 조약평을 불러 지시했다.

“부상자들을 데리고 난주로 가라.”

“한 사람이라도 손이 필요합니다. 저는 남겠습니다.”

조약평이 말하자 전경목이 고개를 저었다.

“부상당한 형제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

“가라.”

전경목이 정색을 하고 명을 내리자 조약평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약평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떠나니 남은 인원이 서른 명가량 되었다.

“모두 모여라.”

전경목은 승룡대를 삼개조로 재편했다.

“부상자가 없으니 두 시진이면 감숙지부에 도착할 것이다. 마천의 공격이 예상되니 상황을 봐서 대처한다.”

전경목이 승룡대와 함께 앞서 달렸다.

‘이래서 무력대라는 건가?’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승룡대를 보고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뒤를 따랐다.

질주하던 일행이 멈췄다.

앞서가던 척후조가 되돌아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적입니다! 앞에 적이 매복하고 있습니다!”

무한이 보니 저 멀리 어둠이 밀려오는 듯한 무리의 혈의인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쪽 언덕으로 가시죠!”

무한이 전경목에게 달려가 왼쪽 절벽을 가리켰다.

전경목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는 길이 없지 않나? 절벽으로 막혔으니 포위되고 말 걸세.”

“지금도 포위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뒤로 적이고 우리보다 수가 많습니다. 저기는 좀 버틸 만합니다.”

전경목이 무한이 가리킨 절벽 밑을 보니 호리병 같은 지세를 이룬 곳이다.

양쪽으로 절벽이 날개를 뻗듯 내려오는 지세라 공격하는 적은 가운데 비탈진 길을 올라야 한다.

“절벽 날개 양쪽을 지키고 가운데를 막으면 한동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으음…….”

전경목이 침음성을 흘렸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세!”

일행은 언덕 호리병 지형으로 올라갔다.

호리병 지세로 들어오자 전경목은 양쪽 절벽에 승룡대원을 다섯 명씩 올려 보내고 앞쪽에 열 명을 배치했다.

“나머지 조는 대기하고 있다가 약한 곳을 지원한다.”

승룡대가 호리병 지세로 스스로 갇히자 마천도들이 아래쪽을 틀어막았다.

“날이 밝으면 공격해올 게야.”

전경목이 적들을 노려보며 침중한 어조로 말하는데 무한이 옆구리에 찬 행낭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고벽후가 준 것이다.

“그게 뭔가?”

“신호탄입니다.”

전경목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래서 이쪽으로 오자고 했군. 이 신호탄을 감숙지부에서 볼 수 있을까?”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절벽 위로 올라가 터뜨리면 확실하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지원을 올 상황인지는 모르겠군요.”

“모든 게 예측일 뿐이잖나. 원군이 올 수도 있지.”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

“어서 신호탄을 터뜨리게.”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신호탄이 터지면 적이 바로 공격할 겁니다. 지금은 독 안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고 날이 밝은 뒤 공격할 생각이겠죠. 하지만 원군이 온다면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자 할 겁니다.”

“…….”

“우리는 계속 달려서 지친 상태입니다. 반 시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터뜨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전경목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한을 다시금 봤다.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걸 무한이 말하니 놀라웠다.

모두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무한도 잠시 운기조식을 하였다.

반 시진 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선 쪽으로 걸어갔다.

은은한 달빛 아래 웅크리고 있는 검은 무리가 보였다.

마천도들이다.

공격을 앞두고 숨을 고르는 게 느껴진다.

문득,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왜 우리를 죽이려 할까?’

일면식도 없는데 마주치면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이라니.

그게 천하방도와 마천도들의 숙명이라는 건가?

무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마천 진영을 살피던 무한이 신호탄을 들고 절벽 앞에 서더니 툭, 바닥을 차고 올랐다.

“오!”

무한의 신법에 누군가 탄성을 흘렸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새가 날아오르는 듯했다.

무한은 순식간에 왼쪽 절벽 날개로 올라가 신호탄에 불을 붙였다.

피유유웅.

퍼엉!

하늘 높이 불꽃이 터졌다.

전경목이 외쳤다.

“모두 준비하라. 적이 올 것이다.”

무한은 신호탄을 터뜨린 뒤 내려와서 마천 진영을 살폈다.

진영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잠시 뒤 마천 궁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전경목이 손짓을 하였다.

“모두 바위 뒤로 은신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쉬쉭!

퍼퍽!

비처럼 화살이 쏟아졌다.

바위가 많아 화살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천도들도 화살이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곧바로 올라올 준비를 했다.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전경목이 나지막이 말하곤 무한에게 말했다.

“자네는 뒤로 빠져 있게.”

무한이 고개를 젓는데 귀영이 슬그머니 무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죠?”

“앞장설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귀영이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무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앞서 전경목과 나란히 섰다.

‘에이 씨. 왜 자꾸 죽을 구덩이를 파는 거야.’

귀영이 투덜거리며 무한의 뒤에 섰다.

마천도들은 거침없이 달려왔다.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쏴라.”

전경목이 외치자 절벽 양쪽 날개에 매복하고 있던 승룡대원들이 단궁과 쇠뇌를 쐈다.

마천도들이 일제히 작은 방패를 들어 막았다.

퍽!

퍼퍽!

단궁과 쇠뇌 대부분이 방패에 박혔다.

고원 무력대 간의 싸움은 군의 전투와 비슷했다.

다만 개개인이 제대로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는 점이 달랐다.

마천도들은 순식간에 호리병 입구까지 들이닥쳤다.

그사이 승룡대 일조 열 명이 호리병 입구에 도열했다.

마천도들의 날선 기운이 먼저 들이닥쳤다.

순간, 도열한 승룡대 뒤쪽에 있던 전경목이 몸을 솟구쳐 날아오르더니 검을 휘저었다.

파파팟.

예리한 검풍이 몰아치며 마천도들의 예기가 주춤했다.

“나는 천하방 승룡대 전경목이다. 마천의 대장은 나와라.”

전경목이 수장끼리 일대일 싸움을 제안했으나 마천도들은 대꾸도 없이 달려들었다.

전경목이 검을 후려쳤다.

샤샤삭!

적의 선봉을 꺾어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있는 힘을 다해 펼친 일격이었다.

마천도들이 양쪽으로 피하더니 순식간에 전경목을 좌우에서 협공하려 하였다.

전경목이 좌측의 무리를 향하여 검을 찔러갔다.

쉬이익!

쩌적!

“크윽!”

마천도들은 방패를 세워 막았으나 전경목의 검은 방패를 깨뜨리고 뒤에 있는 사람을 베었다. 검에 기를 실어 내리친 것이다.

뒤이어 무한이 뒤따라 날아와 검을 뿌렸다.

샤샤샥!

귀영도 홀연 나타나 도를 쳤다.

무한은 귀영의 무공을 처음 봤는데 소리도 없고, 칼도 보이지 않는 도법을 구사했다.

귀영이 눈앞의 마천도를 베자 두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카가강!

좁은 호리병 입구 앞에는 검광이 번뜩이고 날카로운 검풍이 비산했다.

“쳐라!”

승룡대원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와 검을 찔렀다.

채챙!

챙!

좁은 호리병 입구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쉬쉭!

쉭!

양쪽 절벽 날개에서 단궁과 쇠뇌가 날았다.

피융.

핑!

마천의 궁수들이 일제히 절벽 날개 쪽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절벽 위 승룡대원들은 바위 뒤에 은신하며 틈틈이 단궁과 쇠뇌를 날려 호리병 입구에서 싸우는 동료를 지원했다.

잘 훈련된 무력대 무인들은 말없이 싸웠다.

채챙!

“컥!”

“윽!”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간간이 터지는 나직한 비명소리만 어두운 고원에 울려 퍼졌다.

“이조!”

전경목이 외치자 마천도들과 싸우던 승룡대원들이 뒤로 빠지고,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십여 명의 승룡대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마천도들의 공격은 맹렬했으나 승룡대 역시 섬서 제일의 무력대다웠다.

“퇴각하라.”

마천도들이 좀처럼 입구를 뚫지 못하고 희생이 늘어나자 뒤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마천도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상황 보고하라.”

전경목의 명에 좌우 절벽 승룡대원들이 보고했다.

“좌익 이상 없습니다.”

“우익 무사합니다.”

좌우 절벽 위에 있는 대원들은 무사했으나 적과 교전을 한 본진은 두 사람이 죽고 네 명이 부상을 입었다.

죽은 승룡대원의 시신을 들어 뒤쪽으로 안치하는 승룡대 분위기는 무거웠다.

마천도는 십 수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은 듯했다. 퇴각하면서 시신과 부상자를 데리고 가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광풍대보다 전력이 약하다.’

대충 봐도 마천도 개개인의 무력이 광풍대에 비해 떨어짐을 알아챘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승룡대가 이득을 봤다. 지리의 이점에 가져온 결과다.

“지금은 가볍게 서로의 실력을 살펴본 것이다. 다음번 공격이 진짜배기일 것이다.”

전경목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

먼 하늘에 오른 신호탄을 본 장초가 고벽후에게 달려갔다.

“대형, 신호탄이 올라왔습니다. 한 시진 거리입니다.”

“대원들을 대기시켜라.”

고벽후가 마시던 술병을 들고 유곡선을 찾아갔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유곡선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고벽후가 술병을 흔들었다.

“술 한 잔 드리겠소. 옛 전우로서.”

“전우? 흥! 가소롭군. 감히 본방 장로에게 얄팍한 인연을 들이대다니.”

유곡선의 목소리를 차갑기 그지없었다.

“항명을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전우라고? 그런다고 너희를 용서할 거라 생각했나?”

“유 장로, 아니 유 지부장.”

고벽후가 유곡선의 옛 직책을 불렀다.

옛 직책으로 자신을 부르자 유곡선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네가 정말 안하무인이구나. 본방 장로를 농락하려들다니.”

고벽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곡선의 앞에 앉아 술병을 탁, 내려놓았다.

“그날을 아직 기억하시오? 지부장이 적에게 고립되어 죽을 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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