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광포와 무한의 검이 부딪히자 폭음성이 터졌다.
“……?”
광포가 눈을 부릅떴다.
어린 애송이라고 얕봤는데 검에 기운을 실을 수 있는 고수라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애송이, 제법이구나!”
광포가 크게 소리치며, 재차 도를 사선으로 내려찍었다.
무한이 무명신법을 펼쳐,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치고 빠지자 광포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광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며 묻자 무한이 검을 세우며 말했다.
“통성명할 상황은 아닌 듯하군요.”
“이 자리서 죽기는 재주가 아깝지 않나? 네 나이에 검에 기운을 싣다니…….”
“놀랍군요. 마천의 무력대주가 적을 생각해주다니.”
“크흐흐. 적이라고 했나? 네가 감히 내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무한은 아직까지 검에 기운을 싣는 수준이다.
고벽후와 비무할 때 검기에 이른 적도 있었으나, 실전에서는 쓸 수 없다.
자칫 내공 운용이 끊기기라도 하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사이 조약평과 승룡대원들이 광포를 포위했다.
“흐흐흐.”
광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원한다면 모두 죽여주마.”
광포는 승룡대원들을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조약평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두르고, 승룡대원 둘이 양쪽에서 광포를 공격했다.
다른 두 명은 옆으로 돌아 광포의 뒤를 노렸다.
무한은 앞으로 나가려다 광포의 뒤를 노리는 승룡대원들과 동선이 겹쳐 일단 멈췄다.
채채챙!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광포의 도가 승룡대원 한 사람의 가슴을 스쳤다.
써억!
검이 부러지고 그대로 사람까지 베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크윽!”
승룡대원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지자 조약평이 이를 악물고 한발 내디디며 광포를 향해 검을 찔렀다.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빠르긴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
광포가 대도를 내리찍었다.
대도에 흉흉한 도기가 어렸다.
조약평은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검을 감으며 몸을 돌려 공세를 피했는데, 광포의 대도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옆으로 날아왔다.
쉭!
조약평은 뒤로 튕겨나가듯 피하며 수차례 나뒹굴고서야 간신히 몸을 세웠다.
쉬쉭!
광포는 커다란 대도를 마치 젓가락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썼다.
광포는 양 옆에서 찔러오는 검을 튕겨내고는 앞으로 나가며 조약평을 다시 한 번 내려찍었다.
조약평이 승룡대를 지휘하는 조장이니 먼저 해치우려는 것이다.
조약평이 황급히 검을 쳐올렸으나 광포의 대도를 막기는 어려웠다.
‘아!’
조약평이 죽음을 느끼고 탄식하는 순간.
검 하나가 소리 없이 광포의 뒤를 찔러 들어왔다.
무한의 검이다.
“흥! 걸려들 줄 알았다.”
광포가 조약평을 노리던 대도의 방향을 바꿔 검을 후려쳤다.
조약평을 공격하는 듯하며 무한을 유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쉬이익.
도기를 품은 대도를 내리그었는데 걸리는 게 없었다.
‘……?’
검은 여전히 찔러오고 있었다.
광포가 재빨리 비켜서며 이번에는 도를 올려쳤다.
쉭!
광포의 대도는 다시 허공을 쳤다.
소리 없는 검이 사라졌다가 옆에서 찔러왔다.
기척도 없는 검이다.
“이놈이?”
광포가 크게 발을 굴러 기파를 터뜨리며 사방으로 도를 휘둘렀다.
여덟 방위로 도기가 엄중하게 퍼져갔다.
팅!
광포의 도세에 무한의 검이 걸려 튕겨 나갔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무한의 검이 되돌아와 다시 파고들었다.
회천격.
광포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회오리를 만들 듯 도를 휘둘렀다.
텅!
기어이 무한의 검이 걸려 튕겨나갔다.
무한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방위를 바꿔가며 삼재검 찌르기를 연달아 펼쳤다.
광포의 대도와 부딪혀보니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맞받아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한은 점차 자신감이 붙었다.
어두운 밤이고 협곡의 어둠이 유난히 짙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한은 절벽의 어둠과 신법의 이점을 이용하여 빈틈을 노렸다.
광포는 선기를 빼앗기자 마구 도를 휘둘러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다.
무한은 계속 방위를 바꿔가며 고요히 찌르기를 반복했다.
광포의 도법이 동작이 크기에 빈틈을 노리려는 전략이었다.
쉽지는 않았다. 광포는 거구임에도 무척이나 빨랐다.
그러나.
쉬쉭!
조약평과 승룡대가 적절하게 광포의 뒤를 노려 주의를 끌었다.
조약평 등도 광포의 도를 직접 맞받으려 하지 않았다. 광포가 밀고 들어오면 뒤로 물러났다.
광포는 잔뜩 인상을 썼다.
승룡대를 공격하자니 무한이 놔주지 않았고, 무한을 잡자니 기묘하게도 빠른 신법으로 사라져버린다.
무한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광포는 마치 거대한 산처럼 연달아 달려드는 공세를 가볍게 쳐냈다.
타고난 신력에 내공까지 두터워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돌연 광포가 고함을 질렀다.
“여기까지다!”
광포의 도세가 갑자기 바뀌었다. 마치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채챙!
챙!
연달아 검을 쳐내고 광포가 협곡의 절벽을 뒷배 삼아 섰다.
“허허.”
광포가 헛웃음을 흘리며 조약평을 노려봤다.
“이제 보니 화산의 떨거지였군.”
조약평은 대꾸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검을 겨눴다.
광포가 무한에게 시선을 돌리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저놈은 화산파 물을 먹었고, 근데 네놈은 대체 뭐냐?”
무한이 검을 내리며 말했다.
“심무한.”
무한이 이름을 밝혔다.
조약평 등에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심무한?”
고개를 갸웃하던 광포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터졌다.
“검천부 심가냐?”
무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포는 무슨 생각인지 무한을 노려보기만 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때.
“대주!”
협곡에 울려 퍼지는 외침과 함께 수많은 이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수하들이 왔군.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마.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광포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조약평과 승룡대원들이 주춤 물러섰으나, 무한은 오히려 앞으로 나가 광포와 마주섰다.
광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키지는 않다만 죽기를 원하니 어쩔 수 없구나.”
광포가 벼락같이 대도를 쳐냈다.
어둠 속에서 도기가 번뜩였다.
무한이 맞받아치지 못하고 무명신법으로 미끄러지듯 피하며 빈틈을 노려 검을 찔렀다.
“소용없다는 걸 아직 모르나?”
광포의 도세는 이전과는 판이했다. 폭풍처럼 도를 휘두르며 무한을 몰아붙였다.
“조심하시오!”
조약평과 승룡대원이 협공했으나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도세를 뚫을 수가 없었다.
‘으윽!’
무한은 계속해서 밀렸다.
밀려드는 격렬한 도풍과 도기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난폭한 도기에 무한이 차츰차츰 밀려 절벽에 이르렀다.
피할 곳이 없자 무한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수평으로 겨눴다.
경천십이식 중반 사식의 마지막 초식, 중천격의 발초자세였다.
‘물러날 곳이 없다.’
무한은 경천승운공을 운기했다. 막바지에 이르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폭풍 같은 광포의 도세가 덮쳤다.
무한이 검을 찔러 서로 격돌하려는 순간.
광포가 움찔, 하더니 잠시 도세가 끊겼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무한에게는 더없는 기회였다.
파파팍!
무한의 검이 한 점을 찔렀다.
경천십이식 중천격.
“크윽!”
신음성이 터졌다.
무한의 검이 광포의 가슴에 꽂혔다.
광포의 도가 허공에서 멈췄다.
“비겁한 놈들, 암수를 쓰다니…….”
광포의 시선이 어둠 속 어딘가를 향했다.
무한이 뒤로 물러나며 검을 회수했다.
광포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광포가 뒤로 물러나다 쓰러져 절벽에 기대어 앉았다.
조약평이 다가가 검을 치켜드는데, 무한이 말렸다.
“그냥 가죠.”
조약평이 무한을 봤다.
“무슨 소리요?”
“이미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조약평이 절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광포를 보았다.
광포는 부릅뜬 눈으로 무한을 노려보았다.
“이자는 마천 광풍대주요.”
조약평은 무한의 진정한 신분이 천하사패 검천부주라는 걸 알자 공대했다.
“알고 있습니다.”
“죽지 않았소. 살아날 수 있소.”
“그자의 운명이겠지요.”
“종선은 죽었소.”
무한은 종선이 누군지 몰랐으나 아마도 방금 전 이 협곡에서 죽은 승룡대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
조약평이 수하의 죽음을 말하니 무한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광포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사이 광포가 고개를 떨궜다.
“…….”
조약평은 검을 내리칠 수 없었다. 표정으로 봐서는 광포를 백번이라도 죽이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광포를 쓰러뜨린 자는 무한이다. 목숨을 거두는 건 무한에게 달려 있다.
무한은 돌아서 협곡을 나갔다.
‘중요 부위를 피했으니 죽지는 않겠지.’
자신의 실력으로 광포를 꺾었다면 목숨을 취했을 것이다.
허나 무흔이 어둠속에서 암수를 썼기에 잡은 승리다.
여러 사람 목숨이 달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썼으나,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부위를 피했다.
무한이 달려가자 조약평이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돌아서서 승룡대원들에게 말했다.
“가자.”
승룡대원 두 사람은 불만에 찬 얼굴로 광포를 보고는 죽은 승룡대원의 시신을 업고 조약평의 뒤를 따랐다.
무한이 협곡을 빠져 나오며 광포가 쓰러진 협곡 쪽을 봤다.
마음이 착잡했다.
멀리서 활을 쏘는 것과 직접 사람의 가슴에 검을 꽂는 건 확연히 달랐다.
사람의 몸을 찌른 감각이 손에 남아 있었다.
협곡 쪽에서 누군가 놀라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주!”
싸움의 기척을 따라 달려온 광풍대원들이 광포를 발견한 모양이다.
“대주가 당하셨다!”
“대주를 모셔라!”
광풍대원들의 고함이 협곡에 울려 퍼졌다.
무한 일행은 조용히 협곡을 빠져나왔다.
말없이 달렸다.
“왜 말렸소?”
조약평이 다가와 물었다.
“광풍대주를 죽인다 해도 그 자리는 누군가 대신하여 바로 채워질 것입니다. 지금 쫓기는 처지에서는 그를 살려두는 게 맞습니다.”
조약평이 의아해하다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광포가 중상을 입자 광풍대원들이 그를 돌보느라 추격이 끊어졌다.
“죽였다면 나머지 대원들이 죽기 살기로 쫓아 왔을 겁니다.”
무한의 말에 조약평은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다만, 놀랍다는 눈빛으로 무한을 바라볼 뿐이다.
뒤늦게 달이 떴다.
붉은 황토고원에 비친 달빛이 시리도록 차갑게 다가왔다.
고원 평야가 나왔다.
멀리 달려가는 승룡대가 눈에 들어왔다.
무한과 조약평 등이 후미에 따라 붙자 부대주 전경목이 다가왔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적은 어디까지 오고 있나?”
전경목이 조약평에게 묻다가 동료에게 업혀 있는 승룡대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종선이 당했습니다.”
조약평이 보고했다.
매복조가 무사히 돌아오자 당연히 적이 추적을 멈춘 줄로 생각했다가 희생자가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전경목이 낯빛이 어두워졌다.
“말에 실어라.”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차마 시신을 버리고 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한이 선두로 가자 귀영이 다가와 말했다.
“지금 속도라면 새벽이나 되어야 당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꼭 거기로 가야합니까? 느낌이 좋지 않은데요.”
귀영이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자신의 육감을 믿으라는 뜻이다.
“…….”
무한은 과연 감숙지부로 가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감숙지부는 무사할 것 같으냐는 광포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전경목이 다가왔다.
“검천부 심 부주이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