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유곡선이 말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지난 어느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심군하가 적을 패퇴시키자, 유곡선이 공명심에 사로잡혀 마천도를 쫓다가 오히려 협곡에 포위되고 말았다.
몰살을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멸마대가 나타나 마천의 뒤를 쳤다.
덕분에 마천도를 몰살하고 간신히 살아났다.
고벽후가 술잔을 유곡선 앞에 놓고 따르며 말했다.
“참으로 통쾌한 대승이었지.”
그날 마천의 무력대 삼백을 고원에 묻었다. 그 공로로 그는 본방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전화위복이 된 사건이었으니 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속사정을 아는 고벽후 앞에서는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고벽후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거 아시오? 그날 대주는 연이은 격전으로 몸이 만신창이였소. 그런데 지부장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부상 투성이였던 멸마대를 이끌고 달려갔소.”
당시 고벽후는 멸마대 선임조장이었다.
“멸마대원 모두가 불만이었지. 반대하는 이도 있었고.”
고벽후가 자신의 잔을 들어 훌쩍 마셨다.
“사람은 변하지 않지.”
“…….”
“당시 멸마대원들이 왜 반대했는지는 지부장이 더 잘 알 것이오.”
유곡선이 불쾌한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무리 직위해제 중이지만 적이 지척에 있다. 밤새 마시고 취한 것이냐? 한심하군.”
고벽후가 툴툴, 비웃었다.
“여전하군.”
“이 자식이?”
유곡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벽후가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나도 그때 반대했다.”
고벽후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려 유곡선을 보았다.
“공명심에 사로잡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간 무능한 지부장은 없는 게 나았거든.”
“이, 이놈이…….”
“그런데 대주가 그러더군.”
고벽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펼쳐졌다.
“지부의 무인들은 무슨 죄냐고.”
고벽후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양손으로 책상을 쾅, 짚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상을 입은 몸으로 달려가 네놈을 구했다!”
유곡선은 고벽후의 기세에 주춤했다.
고벽후가 눈이 훨훨 타올랐다.
“천하방에는 정의가 없더군. 네놈이 그 싸움의 공로를 가로채 본방에 들어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멸마대는 스러졌지.”
“…….”
“네놈들은 전쟁과 피를 원하는 살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고원의 맹약으로 이뤄진 휴천을 깨뜨릴 심산 아니냐!”
고벽후의 기세에 눌린 유곡선이 움찔, 물러났다가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발끈했다.
“무슨 헛소리냐! 지난날 고원의 맹약을 주창한 자가 바로 나라는 걸 모른단 말이냐?”
“고원의 맹약! 그걸 이룬 자가 누군지 내가 알고 있는데! 감히! 거짓을 입에 올려?”
고벽후가 눈을 부릅뜨고 유곡선을 노려봤다.
강렬한 눈빛에 유곡선이 움찔했다.
“맹약을 가장 반대한 게 너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맹약을 주창한 자로 둔갑하였더군.”
“이, 이놈이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유곡선이 곁에 세워둔 검을 뽑았다.
고벽후는 검을 보고도 클클, 웃었다.
“본방의 장로를 겁박하다니. 너야말로 죽고 싶은 것이냐?”
“이봐, 유곡선.”
고벽후는 비웃듯 이름을 불렀다.
“네가 무슨 개수작을 꾸미는지 대충 알 거 같아. 구린내가 풀풀 나거든. 예나 지금이나 너는 똥 싸서 뭉개는 짓을 잘했지.”
“이 새끼가?”
유곡선이 참지 못하고 검을 휘저었다.
파팍!
고벽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고벽후의 소매와 어깨 옷깃을 스쳤다.
“여전하군. 상대를 제대로 찌르지도 못해. 눈속임으로 상대를 기만하는 검으로 천하방 장로에 올랐다는 게 놀랍군.”
물론 천하방 장로의 검이 삼류 허섭스레기일 수는 없다. 진경에 이르거나 최소한 절정의 극에 달해야 장로의 직에 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곡선의 검은 고벽후의 옷깃만 스쳤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싸운 게 언제였나? 목숨을 걸고!”
“건방진 놈!”
유곡선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고벽후가 지난날 자신의 치욕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서 심정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유곡선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감히 지부장인 내게 대들었지. 그때 네놈의 명줄을 끊었어야 했는데.”
“과연 그럴 능력이 있었나?”
유곡선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때는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있지.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모르느냐?”
유곡선은 검을 내밀어 고벽후의 목에 대었다.
“네놈은 항명을 한 것도 모자라 술에 취해 본방의 장로를 겁박하였다. 이 자리에서 처단한다 해도 아무도 뭐랄 이가 없지.”
고벽후가 유곡선을 노려보았다.
“그럴 실력은 있고?”
그때 콰당, 하고 문이 벌컥 열렸다.
연추산이 도를 들고 들어왔다.
그 뒤로 멸마대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럴 놈이었으면 그때 오줌을 질질 쌌겠습니까?”
유곡선은 위기를 느끼고 질끈 검을 그었다.
순간, 고벽후는 어깨로 검을 튕겨냈다.
검은 허공을 베었다.
‘헉!’
유곡선이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고벽후가 비웃었다.
“본방 장로? 이따위 검으로 천하방의 장로 직을 맡았더냐?”
유곡선은 자신의 검을 보았다.
절정의 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남들도 그리 인정했다.
그런데 상대의 목에 검을 대고도 베어내지 못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지난 일은 묻어두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수작을 부리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고벽후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걸린 반월도에 닿았다.
유곡선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네, 네가 본방 장로를 시해하려고 하느냐?”
“고원의 맹약에 어떤 조항이 있는지 아나?”
“무슨 개소리냐?”
“고원의 맹약을 깬 자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처단하기로 되어 있다.”
고벽후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너는 승룡대를 끌어들여 고원의 맹약을 깼다.”
“그, 그건 방의 지시였다!”
“그 지시를 내린 놈도 죽을 것이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
유곡선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원래가 심약한 그였다. 집안의 배경 덕분에 감숙지부장을 거쳐 본방으로 간 뒤 승승장구하여 장로까지 올랐다.
지닌바 무공이 약하지 않았으나 겁이 많아 죽고 죽이는 격전에 약했다.
고벽후와 뒤에 선 멸마대원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주눅이 들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 이보게. 고 대주.”
유곡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고원의 맹약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네.”
“…….”
고벽후의 무심한 눈이 유곡선을 지켜보았다.
“마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네. 내가 다 설명함세.”
유곡선은 열린 문밖을 보다가 어찌하여 호위가 보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어찌됐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나는 모른다.”
고벽후가 입을 열었다.
“정말 마천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인지 아닌지. 하지만!”
고벽후의 눈에서 시퍼런 빛이 흘러나왔다.
“동료의 희생을 대가로 그 기회를 얻고 싶지 않다.”
반월도가 허공을 그었다.
“크윽!”
유곡선이 목을 부여잡았다.
천하방 오장로의 죽음이라기에는 너무나 허무하고 어이가 없었다.
“…….”
고벽후가 다시 앉아서 술병을 들어 벌컥, 마셨다.
연추산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고벽후가 정말 유곡선을 죽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오상이 피를 뿜으며 꿈틀거리는 유곡선을 보며 뇌까렸다.
“일 났군.”
고벽후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놈이 죽은 것뿐이다.”
***
갑자기 밀어닥치는 싸늘한 기운에 무한은 마천 진영을 살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말 한 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자다!’
승룡대가 기습을 받고 있을 때 멀리서 다가오던 자.
달빛을 받고 오는 사내는 서두르지 않았다.
홀로 오건만 마치 검은 먹구름을 끌고 오는 듯했다. 그가 지나온 길은 싸늘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
고지에 갇힌 승룡대는 밀려오는 불안감에 침만 삼켰다.
전경목도 다가오는 자가 심상치 않은 고수라는 걸 깨달은 듯 굳은 표정이었다.
이윽고 사내가 고지 아래 서자 마천도들이 일제히 반무릎을 꿇고 외쳤다.
“소천주를 뵙습니다.”
마교의 소천주!
소마다.
고지 위의 승룡대도 잔뜩 긴장했다.
정마대전으로 중원에서 패퇴한 마천.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로도 십여 년 전까지 감숙을 경계로 마천과 천하방은 팽팽하게 대치하며 수없이 접전을 벌였다.
그 싸움을 이끈 이가 검천부 심군하와 마천 소천주 소마였다.
그리고 고원의 맹약을 체결하여 싸움을 끝낸 이 역시 심군하와 소마 두 사람이었다.
무한이 안력을 돋워 소마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략적인 윤곽만 보였는데 왠지 웃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소마는 마상에 앉아 부복한 자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흑의인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그중 하나가 달려와 십 장 거리에 서서 외쳤다.
“소천주께서 너희를 살려주신다고 했다. 가도 좋다. 단, 검천부주 심무한은 소천주를 뵈어야 한다.”
의외의 전개에 무한과 전경목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무한이 말했다.
“기회입니다. 일단 가시죠.”
“그럴 수는 없네. 자네를 혼자 두고 어찌 간다는 말인가?”
“마천 소천주가 저를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속을 누가 안다는 말인가.”
“해칠 생각이면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서 승룡대를 둘러보고 말했다.
“저쪽이 먼저 병력을 거뒀습니다. 마천 소천주와 싸울 이유가 없지요. 본방 현무대가 감숙지부 인근에 은신하고 있습니다. 합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경목이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알겠네. 이번에 검천부의 신세를 톡톡히 졌네. 결코 잊지 않겠네.”
전경목이 승룡대와 함께 떠났다.
귀영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해치지 않을까요?”
“모르죠. 일단 여기 숨어 있어요.”
무한은 귀영을 호리병 계곡 안에 은신하라 이른 뒤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전령으로 왔던 흑의인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마 혼자 말에 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이 삼 장 거리로 다가가 섰다.
소마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네게 심무한이로군.”
소마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나직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광포와 겨뤘다지? 죽이지 않은 건 고맙군.”
“정당한 승부가 아니었으니까요.”
“…….”
소마가 훌쩍 말에서 뛰어 내렸다.
“정당한 승부라…….”
소마가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뒤쪽을 보았다.
“호위를 물려라.”
소마는 귀영은 물론 무흔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다.
무한이 손짓을 하였다. 무흔이 뒤로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소마가 머리에 쓴 모자를 벗었다.
달빛 아래 서른 중반가량의 사내 얼굴이 드러났다. 준수하면서도 억센 구석이 있는 인상이었다.
무한은 소마가 예상했던 것보다 젊은 걸 보고 내심 놀랐다.
‘아버지와 고원의 맹약을 맺었다면… 적어도 마흔은 넘었을 텐데.’
눈앞의 소마는 서른 초반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소마가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누가 너를 이리로 보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