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 전신의 기운이 단전으로 흘러들고 경락주천을 한 모양이다.
고벽후가 술병을 건네주자 벌컥, 벌컥 마셨다.
“많이 먹지 마라. 기가 허한데 풍 들어온다.”
고벽후가 술병을 낚아채 갔다.
“어떻게 된 거죠?”
“뭐가?”
“제가 왜 정신을 잃은 건지…….”
“기진맥진한 거지.”
고벽후가 웃으며 술을 마셨다.
“역시나 회복이 빠르군. 어제 입은 상처도 거의 아물었고. 기연이라도 있었던 거냐?”
화정노의 지화령석으로 환골탈태 한 덕분일까? 고벽후의 말대로 멍든 곳이나 도기에 베인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닷새 만에 이 정도면 괜찮은 셈이지.”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 시작이다.”
“예?”
“비무는 이제부터라고.”
“그럼 그동안 한 건 뭔데요?”
“그걸 비무라고 할 수 있냐? 일방적으로 네가 맞은 거지.”
그렇긴 하다.
“내가 보기에 네 몸에 있는 기운은 깊다. 단순한 내공 이상의 뭔가가 있어.”
“…….”
“게다가 뇌기라니. 솔직히 그건 좀 놀랍더군. 무림에서 뇌기를 쓸 수 있는 자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들었는데 내 눈으로 볼 줄은 몰랐다.”
정신을 잃은 사이 고벽후가 몸을 뒤져본 걸까?
“초짜치고 검식의 배합도 그런대로 쓸 만하고. 문제는…….”
“…….”
“너는 네가 지닌 걸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검 따로 몸 따로 기 따로 놀더군. 생각이란 걸 해야지. 무공은 몸만 쓰는 게 아니야.”
무한이 생각했다.
심의삼재검을 익히며 검과 일체되어 온몸의 근육이 움직이고 거기에 기운이 더해졌는데.
왜 따로따로라는 거지?
“봐라!”
고벽후가 술병을 바위에 놓고는 별빛이 내리는 곳으로 갔다.
그러더니 반월도를 들어 도무를 추었다.
“……!”
처음 공동으로 들어온 날 고벽후의 도무를 본 적이 있다.
지금은 그때와 또 달랐다.
반월도는 고벽후의 주위를 유영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반월도가 기운을 끌고 다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가 점차 빨라지며 고벽후의 전신은 반월도에서 흘러나온 기운으로 뒤덮였다.
‘달?’
보이지는 않지만 기운이 완벽한 구체를 이룬 것이 달처럼 느껴졌다.
팍!
고벽후가 멈추자 무형의 달이 사라졌다.
마치 꿈을 꾼 듯했다.
자신의 도법을 선보인 고벽후가 말했다.
“오늘은 먼저 가마.”
고벽후가 가고 난 뒤 무한은 공동에 홀로 앉아 운기조식을 하였다.
고벽후가 보여준 기운의 흐름을 잠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관반청의 호흡을 하며 머릿속에서 고벽후의 도무를 되새겼다.
기운을 가르고 타고 끌고 밀고.
짤막한 반월도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월도가 예리한 빛을 발했다.
그때는 세상을 가를 도가 되었다.
기운과 도.
그걸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벽후.
호흡이 깊어지고.
점차 생각이 끊어지며 고벽후의 모습은 사라지고 기운의 움직임만 느껴졌다.
‘……?’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감고 섰다.
단전에서 한 줄기 기운이 뻗어 나오더니 머릿속 기운의 움직임을 따라 유영했다.
몸속에서 도는 듯하기도 하고 몸 밖인 것도 같았다.
기운의 유영을 무심히 관조하다 문득 검에 실었다.
기운이 검을 끌고, 검이 다시 기운을 끌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걸 지켜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운이 크게 부푼 느낌이 들었다.
‘아…….’
부푼 기운에 취해 있다가 문득 눈을 떴다.
공동이 어슴푸레 밝았다.
‘이런, 또 밤샜네.’
서둘러 공동을 빠져나왔다.
“넌 왜 맨날 늦잠 자는 거냐?”
새벽에 들어와 잠깐 자고 나오다 모우극과 마주쳤다.
“내가 원래 잠이 많아.”
“무인은 하루 한두 시진이면 충분해. 잠잘 시간 있으면 운기조식을 하라고.”
모우극이 주위를 보더니 슬며시 다가왔다.
이 녀석이 왜 이러지?
“어제는 내가…… 내가 상인이하고 비무가 끝난 뒤 바로 비무를 하다 보니 실수를 했거든?”
“그래?”
“어디 가서 나하고 비무했단 말 하지 마라.”
이제 보니 어제 비무에서 진 걸 수습하러 온 모양이다.
“삼재검수에게 패했다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
“뭐? 패하긴 누가 패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걱정 마라. 내 입 무겁다.”
“그래. 그래야지.”
모우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모양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상인이하고 비무를 한 직후잖아.”
“그러고 보니 상인이에게도 졌네?”
“이 자식이? 누가 졌다는 거야?”
“네가.”
“그게 아니라니까!”
모우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그것도 잊어버릴게.”
“그래. 다 잊어버려.”
“육포가 있으면 잊는데 도움이 될 텐데.”
“뭐?”
모우극이 난주에서 최고급 육포를 사서 감춰놓고 혼자 먹는 걸 알고 있다.
감숙지부의 식사가 부실한 건 아니지만 한창때다. 새벽까지 비무하다 보니 허기가 지기 일쑤였다.
갑자기 모우극의 육포가 생각나서 한마디 했는데 모우극은 대번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알았다. 내가 이따 한 포 줄게.”
“나한테? 왜?”
“잊는 데 도움 된다며?”
“그렇긴 하지.”
“잊어. 잊어버리라고.”
모우극이 눈을 부릅뜨고는 윽박지르더니 돌아서 갔다.
“두 포면 더 빨리 잊을 수 있다.”
모우극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돌아갔다.
‘녀석, 재밌네.’
천하방에 들어와 형소 외에는 말을 섞을 사람이 없었다. 천무행을 나오며 또래와 어울리는 게 좋았다.
무한은 그 길로 아침밥을 먹고 흙집으로 갔다.
‘검 따로, 몸 따로, 기운 따로…….’
고벽후가 한 말이다.
일검을 지를 때 전신 근육을 쓴다. 경천승운공을 익힌 뒤에는 단전 내공까지 연결하고 있다.
그런데 고벽후가 보기에는 따로 따로 논다는 것이다.
고벽후가 반월도로 펼쳤던 기운의 흐름을 다시 떠올렸다.
‘조화지도…….’
할아버지가 마지막 사부로 목령산인을 배치한 이유를 깨달았다.
조화의 도는 자연의 이치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기운의 조화.
온종일 기운의 조화에 매달렸다.
자신이 지닌 힘을 제대로 쓰는 것.
그게 급선무였다.
어둠이 내릴 무렵 기운의 조화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몇 달 동안 정원을 가꾸며 조화지도를 터득한 바 있다. 미처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 의지를 갖고 조화를 꾀하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운기를 하니 단전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가 다시 단전으로 흘러들어왔다.
검을 들었다.
‘오늘은 맥없이 밀리지 않는다!’
바로 공동으로 올라갔다.
고벽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희미한 빛이 내리는 공동 위 구멍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보였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도 여기서 수련을 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때도 공동이 있었을 테고 아버지는 대주이자 지부장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경천십이식을 펼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
천천히 검을 들었다.
천의격, 지천격, 회천격, 운중격…….
전반 사식은 무리 없이 이어나갈 수 있었다.
용연격, 파천격, 뇌연격, 중천격.
중반 사식은 자세는 취할 수 있지만 기의 운용이 순탄치 않다.
팔황격, 무극격, 공공격, 경천격.
후반 사식은 아직 자세만 취할 수 있는 상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확인하듯 천천히 경천십이식을 펼쳤다.
“기가 부족한 게 아니다. 기를 다루는 운기법이 서툰 것이지.”
고벽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고벽후가 지켜보고 있었다.
“운기는 의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
“운기조식할 때는 마음의 눈으로 운기하지. 심안이라 한다. 심안은 의식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싸움을 할 때는 몸의 눈으로 운기해야 한다.”
“몸의 눈?”
“육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고벽후가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반월도을 도집째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피했으나 어깨를 얻어맞고 말았다.
“무슨 짓입니까?”
고벽후가 씨익, 웃었다.
“방금 의식을 하고 피하려 했냐?”
“……?”
“의식보다 앞서 기운이 움직이고 기운보다 앞서 검이 움직여야 한다.”
고벽후가 마주 섰다.
“오늘은 얼마나 버티는지 볼까?”
“오늘은 좀 다를 겁니다.”
“과연 그럴까?”
고벽후가 비릿하게 웃었다.
무한이 검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맞았다.
이제 보니 고벽후는 무한이 한 단계 올라가면 그만큼 수위를 높이는 것 같았다.
“헉! 헉!”
오늘도 내력이 바닥을 쳤다.
깡!
정면으로 짓쳐드는 반월도를 쳐낸 걸 끝으로 큰 대자로 뻗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고벽후가 바위로 가서 걸터앉고는 술병을 꺼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술을 참 좋아하네.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술은 기를 흐트러뜨린다면서요? 그런데 왜 그리 술을 마십니까?”
“나는 술이 있어야 기운이 솟는다.”
“취공이라도 익히신 겁니까?”
“싸움도 기분이 좋아야 잘 되거든.”
무한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궁금했다.
상인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실은 무인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궁금했다.
“그걸 왜 내게 묻지?”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으니까요?”
고벽후는 무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같이 싸웠으니까.
고벽후가 이상한 시선으로 무한을 봤다.
“뭘 듣고 싶으냐?”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이요.”
“다 말하자면 길다.”
“시간은 많습니다.”
“…….”
고벽후가 술을 벌컥, 마시고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주는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
정의?
“대주는 아군은 물론 적의 목숨도 중하게 여겼다. 힘과 야만이 지배하던 이 고원에 모두가 공생하는 길을 연 자가 바로 대주다.”
고벽후가 눈을 감았다.
지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대주가 실종됐을 때 고원의 모든 부족이 한탄했지.”
“실종이라고요?”
고벽후가 눈을 뜨더니 무한을 응시했다.
“나는 대주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아……!”
고벽후의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 말이 고마웠다.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라고 말해 준 사람은 어머니에 이어 두 번 째다.
고벽후가 다시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 대주의 귀환 동선을 마천 측에 흘렸다고 본다.”
“……!”
“대주와 소마(笑魔)가 맺은 고원의 맹약에 대해 천하방과 마천 모두 내부에서 반발이 적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의 농간이 있었을 것이야.”
‘소마? 고원의 맹약?’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으나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고벽후의 말이 끊길까 숨조차 죽였다.
“대주는 내게 멸마대를 물려주었지.”
아버지는 고벽후에게 대주 자리를 물려주고 중원으로 돌아가다가 불망객을 만났다.
고벽후가 소문을 듣고 멸마대를 이끌고 두 사람이 생사결을 벌인 곳을 찾아냈으나 산이 깎이고 대지가 패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동귀어진이라면 시신이 있어야 했지.”
‘누가 안장했을지도 모르죠.’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싫었다.
“그리고…….”
고벽후가 말하다 말고 멈췄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다.
고벽후의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 쾌활했던 그와 다른 모습에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
“…….”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