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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5화 (35/250)

35화

운기조식을 마치고 일어나자 고벽후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봤다.

“회복력 하나는 놀랍군.”

금창약을 꺼내 바르려 하자 고벽후가 말했다.

“도기에 살짝 베인 것뿐이다. 금창약이 아까우니 아껴둬라. 내일부터 쓸 일이 많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진짜 베겠다는 뜻이로군.’

무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실전 같은 비무라더니 피를 봐야 할 모양이다.

고벽후가 술병을 들어 꿀꺽, 마시고는 말했다.

“왜? 겁나냐?”

“죽기야 하겠어요?”

무한은 내심 오기가 나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죽이지는 않으마.”

고벽후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베이기 싫으면 머리를 써야 하지 않겠냐? 너처럼 정직하게 검로를 운용하면 적은 눈 감고도 너를 벨 것이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수오검은 원래 단순하고, 경천십이식 역시 아직 부족하니 검로를 정직하게 따라간다.

“경천십이식이 제아무리 신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도와 힘으로는 삼류 정도나 상대할 것이다.”

나름 적절하게 배합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경천십이식을 천하제일검법이라 하지. 하지만 그 또한 식이고 형일 뿐이다.”

체와 용.

그 이치는 안다.

“지금 네 검법은 상대가 없이 너 혼자 휘두르는 검식일 뿐이다.”

무한은 한마디 한마디 귀담아 들었다.

“상대를 베는 검이 아니라 네가 익힌 검식을 보여주는 건데 내게 위협이 될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 피 보기 싫으면 내일은 제대로 준비해야 할 거야.”

무한은 온종일 고벽후와의 비무를 복기했다.

‘고벽후는 경천십이식을 알고 있어.’

무림 문파들은 절기가 유출되는 걸 철저히 단속한다.

무림인들도 구명절초는 물론 자신의 성명절기도 어지간해서는 드러내지 않는다.

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파훼법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고벽후 같은 고수가 경천십이식을 알고 있다면 무한이 펼치는 것쯤은 쉽게 막아낼 것이고, 실제로 그랬다.

‘상대를 공격하는 검이 아니라고?’

무한은 답답해서 흙집을 나왔다.

챙! 채챙!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가 들려온 곳을 가보니 모우극과 백상인이 비무를 하고 있었다.

쉭, 쉬쉭!

파팟!

두 사람 모두 검을 썼는데 검풍이 거셌다.

순간순간 검광이 번뜩였다.

‘역시…….’

모우극이나 백상인 모두 천하방 장로의 후인들이다. 지닌 바 검법이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두 사람이 흔히 말하는 일류의 경지는 넘어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장로가 출신이라고 자부할 만하군.’

유심히 보니 백상인이 한 수 위였다.

의외였다.

모우극에게 늘 양보하던 백상인이 한 수 위라니.

파팟!

두 사람이 맞붙었다가 위치를 바꾸는 걸로 비무가 끝났다.

“오늘은 내가 이긴 거다.”

“무슨 소리!”

백상인이 검을 거두며 말하자 모우극이 발끈했다.

“네 소매를 봐.”

모우극이 소매를 쳐드니 두 치가량 베여 있었다.

“이게…… 언제 이렇게 됐지?”

모우극의 얼굴이 벌게졌다.

“좋다. 이제 일흔두 번 대 예순 아홉 번이다. 아직은 내가 위야.”

모우극이 말했다.

두 사람은 자주 비무를 했던 모양이다.

“부조장, 왔구나.”

백상인이 한쪽에 선 무한을 보고 말을 건네는데 모우극이 쏘아붙였다.

“넌 남의 무공을 훔쳐보는 건 금기라는 거 몰라?”

“미안하게 됐어. 두 사람 굉장하네.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상방에서는 그래도 하수에 속해.”

백상인이 말했다.

“무슨 소리. 너나 하수지.”

모우극이 반발했다.

백상인은 말없이 웃기만할 뿐이다.

참 무던한 성격이다.

모우극이 무한의 검을 보더니 말했다.

“삼재검수, 너도 한 번 해볼 테냐?”

백상인에게 진 게 분했던지 분을 풀 셈인 듯 눈빛까지 번뜩였다.

“그럴까?”

모우극과의 비무는 어떨까?

고벽후는 멸마대주다. 수위를 짐작도 못할 정도로 고수다.

‘모우극과 비무하면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모우극이 검을 뽑았다.

“한 수 지도해줄 테니 덤벼봐라. 부조장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하잖아?”

“좋아. 해보자.”

무한이 모우극과 마주하고 검을 뽑았다.

“들어와.”

모우극이 오른손으로 검을 세우고 왼손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조심해라.”

검에는 눈이 없으니까.

무한이 한 발 내디디며 일수오검을 펼쳤다.

“어엇.”

빠르고 맹렬한 기세에 모우극이 숨을 들이켜며 한 발 물러나더니 검을 휘저었다.

챙! 채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한은 곧바로 방위를 바꿔 재차 공격했다.

모우극은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보다 무한의 검세가 빠르자 일단 물러나며 보법을 밟아 자세를 전환했다.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무한의 검을 피했다.

‘역시 만만치는 않구나!’

빠르기만으로는 모우극조차 쓰러뜨리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이얍!”

모우극이 반격을 해왔다.

무한은 무명신법으로 미끄러지듯 옆으로 비꼈다.

그러자 모우극의 신형이 회전하며 검이 옆구리를 노렸다.

비스듬히 검을 쳐올려 모우극의 검을 걷어내며 방위를 바꿔 연달아 일수오검을 펼쳤다.

“어림없지.”

모우극이 툭, 내뱉더니 갑자기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다가왔다. 그 짧은 사이 뒤로 돌아서 공격한 것이다.

검에 앞서 예기가 먼저 덮쳤다.

소름이 쭉, 끼쳤다.

‘……!’

본능적으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갔다가 바로 돌아서며 검을 찔렀다.

일직선으로 뻗은 검에 내공이 실렸다.

챙!

모우극이 검을 걷어내려 했으나 자세가 좋지 않아 오히려 밀렸다.

‘찌르기!’

수천수만 번 찔렀던 찌르기다. 눈을 감고도 내지를 수 있다.

거기에 내공까지 담았다.

모우극이 황급히 검을 내리쳤으나.

텅!

무한의 검이 모우극의 검을 밀고 나아갔다.

“헉!”

모우극이 뒤로 물러났으나 무한의 검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만!”

백상인이 뛰어들어 무한의 검을 쳐냈다.

무한이 조금만 더 검을 밀었다면 그대로 모우극의 목이 뚫릴 뻔했다.

“……이, 이.”

모우극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백상인에 이어 무한에게도 패할 줄 몰랐던 것이다.

“비무 중간에 뛰어들어 미안하다. 아직 서로의 실력을 모르는데 실수를 할까봐 그런 거니 이해해 줘.”

백상인이 비무에 개입한 데 대해 양해를 구하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상인이 무한의 검을 보며 말했다.

“삼재검법으로 이 정도 성취를 보이다니. 대단하네.”

모우극은 망연자실하여 서 있었다. 비웃던 삼재검에 패한 게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백상인이 물었다.

“그거 삼재검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삼재검법이라고 할 수 없긴 해.”

심의삼재검이라고 말해줄 수 없었다. 명칭을 들으면 바로 할아버지 심양조의 오의가 담긴 수련법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뭔지 몰라도 아주 빠르고 강한 검법이다.”

백상인이 감탄했다.

무한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벽후와의 비무와 달랐다.

‘뭐가 다른 거지?’

무한은 멍하니 서 있는 모우극과 놀라워하는 백상인을 둔 채 흙집으로 돌아왔다.

모우극과의 비무는 짧았다.

비무를 복기하니 마지막 찌르기 한 수가 달랐다는 걸 깨달았다.

의도한 게 아니라 위협을 느낀 몸이 알아서 뻗은 것이다.

“……!”

벌떡 일어났다.

“이런 바보!”

고벽후가 혼자 검무를 추고 있다고 한 말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고 하지만 실은 제자가 스승에게 검법을 선보이듯 검무를 춘 셈이었다.

거기에 고벽후의 기에 눌려 제힘조차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고벽후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대응하고 있었어.’

고벽후가 반월도로 때리고 도기로 베어도 무의식적으로 죽이지는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모우극과 비무할 때는 정말 위협을 느꼈다.

뭐가 문제였는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리자 공동으로 향했다.

“일찍도 오는구나.”

고벽후는 벌써 와 있었다.

“싫으면 언제든 그만 둬도 좋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무한이 고벽후 앞으로 가서 검을 세웠다.

“들어와라!”

고벽후가 반월도를 까닥거렸다.

선공을 하는 대신 옆으로 보를 옮겼다.

삼재보법.

방위가 바뀌자 고벽후의 시선과 반월도를 늘어뜨린 자세도 바뀌었다.

‘빈틈이 없다!’

반월도를 늘어뜨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공격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를 보는 듯했다.

‘철벽이네. 저런 데다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니.’

일전의 비무에서 얼마나 무모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무한이 다시 방위를 바꿨다.

일수오검으로 삼십육방을 칠 수 있으니 순간적으로 방위를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오. 이제 뭔가 생각이란 걸 하는 모양이군.”

고벽후가 씨익, 웃었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고벽후가 한 발 내디뎠다.

순간, 싸늘한 도기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

무한은 무명신법을 펼쳐 반월도의 영역을 빠져나왔다.

“신법 하나는 제대로네? 어이없이 죽지는 않겠어.”

고벽후가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바로 몸을 돌리며 반월도를 뿌렸다.

도세가 확연히 바뀌었다.

‘헉!’

피할 곳이 없었다.

도기가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운중격!’

자신도 모르게 경천십이식 제사식 운중격을 펼쳤다.

제대로 된 운중격은 검기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가운데 치명적인 일격을 찌르는 검식이다.

경천십이식이 공격일변도라고 하나 방어로도 쓸 수 있는 초식이 운중격이다.

따다당!

검과 반월도가 연달아 부딪혔다.

그사이 무한은 무명신법으로 옆으로 비켜났다.

고벽후의 기세에 밀린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 기운을 받아 자연스레 물러난 것이다.

‘이래서 보법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구나.’

무명신법은 애초에 땅의 기운을 이용한 신법으로, 그 형식이 자유로워 보법과 구별할 이유가 없다. 신법이라는 형식 이전에 몸을 쓰는 법이니 굳이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번 요령을 깨달으니 그 다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한은 고벽후의 반월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밀리며 공격 기회를 노렸다.

‘찌르기 한 번이면…….’

그러나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고벽후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스거거걱!

음산한 바람과 함께 싸늘한 도기가 무한을 에워쌌다.

수세에 밀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결국 등짝을 얻어맞았다.

퍼억!

내공이 바닥난 데다 전신의 기운도 소진한 상태에서 얻어맞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으…….”

억지로 일어났다.

“왜 가진 것도 제대로 못 쓰는 거냐!”

고벽후가 호통을 쳤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뇌전!’

뇌전의 기운을 떠올리자 전신에 배인 기운이 충돌했다.

동시에 화끈한 뇌전의 기운이 검을 타고 뻗어나갔다.

고벽후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반월도를 휘감아 도기를 형성했다.

치치직!

뇌전의 기운이 도기에 막혀 사라졌다.

“크윽!”

내공이 바닥난 상태에서 억지로 뇌전의 기운을 쓰는 바람에 정신이 핑 돌았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무한은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고벽후는 늘 그렇듯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깨어났냐? 이리 와라.”

‘응?’

일어나는데 몸이 예상외로 가벼웠다.

‘어찌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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