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어느 순간 공동이 환해졌다.
‘아!’
천정 뚫린 구멍으로 달빛이 내렸다.
별빛과는 달리 확연히 밝아 공동이 환해진 느낌이었다.
고벽후가 술병을 들어 벌컥, 마시고는 일어났다.
원형으로 내리는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반월도를 잡고 도무를 췄다.
환상적이었다.
어제도 감탄했지만 오늘은 도무지 사람의 움직임 같지 않았다.
월하선인이 도무를 추는 듯했다.
무한은 가만 바라보다 조용히 물러났다.
다음 날부터 공동을 찾지 않았다. 대신 흙집에서 경천승운공과 경천심결을 반복하여 수련했다.
‘기운을 쌓아두면 뭐해. 제대로 쓸 수 있어야지.’
비무도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벽후와 상대하려면 내공을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했다.
경천심결로 기운을 축기하고 경천승운공으로 단전 축기와 경락주천을 하였다.
오후에는 경천십이식을 수련했다. 검을 펼칠 때는 기운의 흐름에 집중했다.
몸으로 운기하라는 고벽후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심의삼재검을 수련하며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듯 기운이 흘러가는 걸 느끼고자 했다.
한 번 갔던 길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틀 만에 기가 흘러가는 걸 관조하고 사흘째 되던 날은 기운에 맞춰 검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
기운의 흐름에 맞춰 검세를 펼치자 놀랍게도 경천십이식 중반사식까지 막힘없이 펼칠 수가 있었다.
기가 절로 흐르는 것 같지만 실은 몸이 의식한 만큼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후반사식까지는 통하지 않았다.
내공이 부족했다.
중반사식까지 원활하게 쓸 수 있게 되자 무한은 공동을 찾았다.
“왔냐?”
고벽후는 예의 쾌활한 얼굴로 말했다.
“포기한 줄 알았다. 오늘은 어디를 두들겨 줄까?”
“그냥 맞지는 않을 겁니다.”
무한이 장난스레 되받아쳤다.
“건방진 애송이.”
두 사람은 도와 검을 앞세워 부딪쳤다.
차차창!
채챙!
달빛이 내린 공동에서 벌어진 비무는 격렬했다. 누가 봤으면 생사결이라도 벌이는 줄 알았을 것이다.
콰쾅!
급기야 기와 기가 부딪히고.
두 사람이 잠시 떨어졌다.
고벽후가 자신의 반월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거의 사기 수준인데?”
며칠 만에 무한의 검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무한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전신에 잠자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제법이군. 하지만 이 고원에서 살아남기에는 부족하지.”
“그래도 첫 싸움에 죽을 정도는 아니겠죠?”
“흐흐. 네가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말야. 내가 지금까지 삼 성 정도의 공력으로 상대해줬거든? 한 단계 올려주지.”
‘뭐? 고작 삼 성의 공력이었다고?’
고벽후의 말은 사실이었다.
재차 비무에 들어가자 바로 후달렸다. 반월도에 실린 묵직한 기운을 받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결국 두들겨 맞고 뻗었다.
무한은 대자로 누워 달빛이 비치는 공동의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다시는 쓰러지지 말자.’
고벽후가 바위로 가서 술병을 들고 왔다.
오늘은 잔까지 준비했다.
고벽후가 잔에 가득 따라 술을 건네고 자신의 잔에도 부었다.
“마시고 한 번 더 붙자. 오늘은 특별히 기어서 내려가도록 만들어주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차라리 여기서 쓰러지고 말지.’
속으로 다짐하고는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가슴에 찌르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소마는 누굽니까?”
“소마? 마천의 소천주도 모르나?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아주 지독한 놈이지.”
“아버지가 그런 자와 맹약을 맺었다고요?”
“고원의 맹약을 말하는 거냐?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벽후가 다시 한 잔을 따라 마시고는 입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천하방과 마천은 수십 년간 감숙의 패권을 두고 다퉈왔지. 그 와중에 마적떼가 창궐하고 상로가 끊겨갔다. 대주가 소마와 맹약을 맺고 나서야 이 고원에 비로소 평화가 왔지.”
“그랬군요. 고원의 맹약이 일종의 휴전협정이었나 보군요.”
“그렇지. 이후 천하방과 마천은 서로의 공유지역을 정하고, 접전을 금했다. 각기 일백 무력대를 둘 수 있는데 이는 마적떼를 상대하자는 뜻이었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천하방 내부에서 반발이 있었던 거죠?”
“싸워야 자신들의 이익이 커지는 놈들이 있다. 명분은 마천을 궤멸시켜야 한다고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승냥이 같은 놈들이지.”
으음. 사리사욕만 챙기는 놈들이 있다는 거구나.
“천하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놈들이 대주를 마천과 결탁했다고 모함하기도 했지. 수많은 목숨을 구한 건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지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놈들이야.”
“…….”
“그런 놈들은 천하방에도 있고 마천에도 있다. 고원의 맹약이 체결되었을 때 마천주가 불같이 화를 냈다는 소문도 있었지. 그 때문에 소마는 후계자의 자리가 흔들리기까지 했다더군.”
“소마란 자도 특이하군요. 왜 그런 협정을 했을까요?”
“그놈의 속마음이나 마천의 속사정을 어찌 알겠냐. 뜬소문일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까지 경계를 넘지 않는 걸 보면 소마가 확실히 고원의 맹약을 존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아버지의 귀환 동선을 누가 흘렸을까요?”
“본방의 수뇌부 외에 대주의 귀환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나도 출발하는 당일 알았으니까. 그런데 새외를 떠도는 불망객이 어떻게 알고 감숙까지 와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을까? 생각하면 답은 자명하지.”
“……”
고벽후의 의심은 일리가 있었다.
이 넓은 감숙에서 고수와 고수가 우연히 마주친다?
무한도 믿기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한이 벌떡, 일어나서 검을 쥐었다.
“하시죠?”
고벽후가 일어나며 흐흐, 웃었다.
“기어 내려가게 만들 거란 말을 허투루 들은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은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비무는 더욱 격렬해졌다.
무한은 고벽후를 불망객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검세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까강!
불꽃이 튀기고,
쉬쉬쉭!
도풍과 검풍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검과 도가 어지럽게 부딪히다가.
“……!”
빈틈이 보였다.
무한은 주저하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순간 고벽후의 신형이 사라지고 어깨에 화끈한 통증이 스쳤다.
“크흑!”
예리한 도기에 어깨를 베인 무한은 뒤로 일 장이나 물러났다.
“흐흐. 빈틈을 보여준다고 덥석 물어? 순진하기 짝이 없군.”
고벽후가 반월도를 흔들며 놀렸다.
“치잇.”
허초에 어이없이 당했다.
“네가 정직하게 싸운다고 남들도 그러리라 생각하는 거냐? 세상에 그런 놈 없다. 명문대파의 고수라는 놈들도 암기는 물론이고 온갖 음험한 수를 쓴다.”
할 말이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부터 실전이 뭔지 가르쳐주마.”
실전?
그럼 이제까지 한 건 뭐지?
“낼 보자.”
고벽후가 먼저 갔다.
무한은 베인 어깨에 금창약을 바르고 터덜터덜 내려갔다.
기어 내려가지 않았으니 오늘은 성공한 걸까?
아니다. 고벽후는 자신을 오 성 공력으로 상대했다. 무한이 성장한 만큼 수위를 맞춰 상대해준 거다.
그러니 기어 내려가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고 대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솔직히 소름이 끼친다.
첫 실전의 상대가 누굴지 모르지만 아마도 십중팔구 죽거나 중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 고벽후는 또 하나의 사부나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비무를 복기했다.
‘고 대주의 도법을 깨뜨리려면 적어도 중반 사식을 제대로 펼쳐야 해.’
그러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다.
환골탈태를 이룬 이후 빠르게 축기를 하고 있지만 경천십이식은 적어도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비슷하게나마 펼칠 수 있는 신공이다.
제대로 펼치려면 얼마나 깊은 내공이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가진 바 내공이라도 제대로 써야 해.’
내공이 부족한 만큼 무수한 반복수련으로 몸과 마음과 기가 일체를 이뤄야 했다.
그건 깨달음이고 뭐고 필요가 없는, 그저 지루한 반복의 과정이었다.
온종일 경천십이식을 펼치고 밤이 되자 절벽 공동을 찾았다.
‘저건 또 뭐지?’
고벽후는 반월도 대신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기파가 팡, 팡, 터졌다.
“편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 몰랐네요.”
“내가 못 다루는 병기가 없지. 야전에서는 나무토막도 병기로 쓸 수 있어야 한다.”
파앙!
말을 마치자마자 채찍이 날아왔다.
채찍에 실린 경기가 매서웠다.
“헉!”
무한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았다.
“무슨 짓입니까?”
고벽후가 피식, 웃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적이 공격한다고 예고한다더냐?”
파파팡!
채찍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피하긴 했으나 선수를 놓쳐 계속 몰렸다.
채찍은 원거리 병기인데다 대처하기가 까다로웠다.
‘……!’
계속 몰리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왼손을 내밀어 채찍이 감도록 놔두었다.
“크크. 팔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건가?”
고벽후가 채찍을 당겨 조였다.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 검으로 채찍을 내리쳐 잘라냈다.
“흐음. 손목에 보호구라도 찬 모양이군.”
고벽후는 무한이 손쉽게 채찍을 잘라내자 왼손목을 보았다.
왼손목에는 형소가 사준 보호구가 있었다.
“이제 제대로 해보죠!”
검을 뻗었다.
“제대로? 제대로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지.”
고벽후는 반월도를 뽑더니 그대로 달려들었다.
“엇!”
기습에 놀라서 몸을 빼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고벽후가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더니 발을 걸어 던졌다.
무한은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도를 들었다고 도만 쓰라는 규칙이 있는 게 아니라고.”
‘으…… 실전이라더니. 이걸 말한 모양이구나.’
채찍에 이어 체술까지 쓸 줄은 몰랐다.
“해보자고요.”
무한이 검을 가로 그으며 달려들었다
막싸움에는 막싸움으로.
검이 위아래로 춤췄다.
파파팟!
까강!
도검이 부딪히고,
쾅!
퍽!
기파를 실은 주먹이 격돌했다.
고벽후는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심지어 바닥의 흙을 집어 던지거나 시정잡배처럼 머리채와 옷을 붙들고 늘어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실전의 달인이었다.
퍼퍼퍽!
당연히 무한은 무수히도 두들겨 맞았다.
양쪽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물들었다. 게다가 입술도 터졌다.
고벽후의 체술은 기묘했다. 방비를 한다고 하는데도 검세를 뚫고 순식간에 다가와 집어 던졌다.
쿵!
“크윽!”
벌써 몇 번째 패대기쳐졌는지 셀 수도 없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무한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근성 하나는 살 만하군.”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맞았지만 차츰 차츰 반격을 할 수 있었다.체술도 피하는 요령이 생겼다.
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벽후가 훌쩍 뒤로 몸을 뺐다.
“아이고. 힘들다. 때리다 지치기는 처음이네.”
‘으으…….’
무한은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온몸이 욱신거렸는데 그보다 분한 마음이 컸다.
‘생사결이었다면 벌써 열 번은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고벽후가 바위로 가더니 술을 벌컥 마시고는 말했다.
“사실 네가 이런 체술이나 변초, 암수를 익힐 필요는 없다. 경천십이식을 대성한다면 그 누구도 네 앞에서 이런 잔재주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다.”
“…….”
고벽후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일은 정말 다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