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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7화 (17/250)

17화

형소가 계산하는 사이 점원이 손목보호구를 닦아 주었다.

오래되어 모서리 부분들이 반질반질했는데 너무 얇아서 보호구라기보다는 장신구 같았다.

겉면의 문양을 봐도 무척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무한이 손목보호구를 차니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생각보다 가볍네.”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는데 계산을 마친 형소가 다가오며 말했다.

“보호구 하나가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고.”

등갑을 입고 있는 형소를 보니 거북이 같아 웃음이 나왔으나 억지로 참았다.

“크흐흐. 이걸 귀왕갑(龜王甲)이라고 불러야겠다.”

형소도 자신이 거북이처럼 보이는 걸 아는 모양이다.

“어디 전장이라도 나갈 거야?”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 미리미리 대비해야지.”

그날 저녁.

무한은 목욕을 하려다 그때까지 손목보호구를 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나 얇은지 착용한 느낌이 들지 않아 잊고 있었다.

‘쇠로 만든 물건인데 착용한 느낌도 없다니.’

아예 착용을 하고 욕조에 들어갔다.

“어!”

목욕물에 은빛이 어려 살펴보니 손목보호구가 은은한 은광을 발하고 있었다.

‘은이 좀 섞이긴 한 모양이네.’

점원 말대로 녹이면 은자 한 냥 값은 할 것 같았다.

***

신년 휴관이 끝났다.

천무관 하방으로 들어서는데 하기주가 불렀다.

천무관 이층 구석에 하기주의 집무실이 있다.

“앉아라.”

무한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하기주와 마주 앉았다.

하기주가 차를 내려 건네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하기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 할아버지의 기명제자라고 할 수 있다.”

하기주의 말에 무한이 놀랐다.

할아버지에게 제자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또한 천하제일인 심양조의 기명제자라면 무림에 명성이 대단할 것이다.

‘그런 이가 천무관 하방 교두라고?’

하기주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없으니 아니라고 해도 입증할 수가 없구나.”

“하 교두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하기주가 무한을 빤히 보다 말했다.

“솔직히 너를 처음 봤을 때 무척 미웠다.”

“……?”

하기주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했다.

그는 사천의 무가, 하가보 출신인데, 마천의 공격을 받아 화를 입었다.

“하가보가 마천의 진격로에 있었던 게 불운이었지.”

하가보도 천하방 문파에 속해 있었기에 구원요청을 했다.

그런데 천하방 무력대는 하가보를 미끼로 던지고, 마천의 뒤를 쳤다.

결과적으로 마천의 세력을 꺾는 대승을 거뒀으나 그 과정에서 하가보는 보주와 무사들이 전멸하고 말았다.

천하방은 하가보의 생존자인 하기주에게 포상을 하려 했다.

하기주는 심양조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왜 하가보를 미끼로 주었냐고 따졌다.”

병법으로 보자면 나쁘지 않았다. 하가보를 공략하는 마천의 뒤를 기습하여 궤멸시켰으니까.

하지만 하기주의 입장에서는 항의할 만했다. 그 때문에 아버지와 형제를 잃었다.

“지금 하가보에는 여인과 노인, 어린아이밖에 남지 않았다. 검을 들 수 있는 자는 나 하나 남았지.”

“…….”

“포상 대신 복수할 힘을 달라고 했다.”

심양조는 하기주의 요구를 듣고 기명제자로 삼아 경천심결과 심의삼재검을 가르쳤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 년이 넘도록 천의 도만 행하라고 했으니까.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점차 의욕이 떨어지고 의심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검법을 심의삼재검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으로 전수하고, 내가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결국 심의삼재검은 하는 둥 마는 둥하고 하가검법에 주력했다.

“오해할 만했군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무한이 동감하였다. 그 역시 하기주를 원망하는 마음이 약간은 있었으니까.

경천심결로 내기를 전신에 쌓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아마도 무한도 건성으로 목인형을 쳤을 것이다.

“방주는 만나기도 어려웠다. 서너 달에 한번 보는 게 다였다.”

하기주는 심양조를 사부라는 호칭 대신 방주라고 불렀다.

“그러다 네가 천하방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방주가 손자에게 경천십이식을 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인인 내게 그 차례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

“…….”

“그래서 찾아가서 수련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하기주가 항의하듯 수련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심양조가 제의했다.

손자 무한에게 심의삼재검을 전수하면, 경천십이식을 전수하겠노라고 한 것이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경천십이식과 같은 절세검법을 피붙이도 아닌 내게 준다는 걸 누가 믿겠느냐?”

“아뇨. 할아버지는 정말 전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

“알고 있잖습니까? 경천심결과 심의삼재검이 무얼 위한 건지.”

무한은 하기주 개인연무장의 철목 그물진을 떠올렸다.

철목에는 무수한 검흔이 있었다.

하기주 역시 같은 수련을 했던 것이다.

“…….”

하기주는 대답 대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심사가 복잡한 듯했다.

“그래, 이제 안다. 네가 수련하는 걸 보다 깨달았지. 정확히는 가릉산과의 비무를 봤을 때였다.”

내공도 없는 무한이 가릉산을 단박에 깨뜨리는 걸 보고 불현듯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심의삼재검과 경천심결을 수련하는 중이다.

심양조가 처음 전수했을 때 믿음을 가지고 수련했다면 하기주의 성취는 현재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기주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무한을 보고 말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믿느냐?”

“믿습니다.”

무한이 바로 대답하자 하기주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기주의 말대로라면 무한은 경천십이식을 전해줘야 한다.

하기주는 사실 경천십이식을 받을 거란 기대는 접었다.

죽은 심양조가 어찌 경천십이식을 전해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무한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누가 자신의 무공을 선뜻 건넬 수 있을까.

다만, 그간 무한을 냉대했던 이유는 설명해줘야겠다는 마음에서 심양조와의 관계를 털어놓은 것뿐이다.

“그리고…….”

무한은 혼란스러워하는 하기주를 정면으로 주시하며 분명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약속은 제가 잇겠습니다. 경천십이식을 전해드리지요.”

무한은 하기주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믿었다.

하기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는 무한이 알 수 있도록 안배를 해놓았을 것이다.

무한이 진심이라는 걸 느낀 하기주는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기주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승방 심사를 치거라.”

그러고는 나가보라고 손짓을 하였다.

집무실을 나가다 말고 무한이 돌아서더니 하기주를 향해 말했다.

“사석에서는 사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할아버지의 기명제자라면 사숙 이 된다.

하기주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잠시 후 하기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숙이라고 하기엔 너와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직접 심의삼재검을 전수 받았지요.”

“…….”

“할아버지도 제자로 생각하셨으니 경천십이식을 전수하려 하셨을 겁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숙.”

무한이 말을 마치고 나간 뒤 하기주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중얼거렸다.

“사숙……이라고?”

***

무한은 형식적인 승방 심사를 거쳐 중방에 올라갔다.

천무관 상방은 심사가 까다롭지만 중방까지는 나이가 차면 대개 올려 보내준다.

대개 열두세 살 즈음 중방에 올라가니 무한은 늦은 셈이었다.

첫날 개관식이 있었다.

그런데 중방 연무장에서 하기주를 만났다. 중방 전담교두로 올라온 것이다.

“하기주가 중방 교두라고? 으아아…….”

사정을 모르는 형소는 아예 체념한 듯했다.

“중방에 올라와도 마찬가지야. 나는 아직까지 심의삼재검만 수련하고 있어.”

형소는 누가 교두가 되더라도 별 차이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중방부터는 진검으로 수련하니까 기분은 새롭더라고.”

그러면서 형소가 자신의 검을 뽑아 보여주었다.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무한은 벌써부터 진검 수련을 하고 있었으나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형소가 자랑할 때는 그냥 들어줘야 한다.

“오, 괜찮은데?”

형소의 검은 문하생에게 지급하는 검과 달랐다.

형소의 검은 보통 검보다 검신은 좁은데 길었다.

형소가 은근 뻐기듯 말했다.

“천하방 제일 야장에게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거라고. 보기는 약해 보이지만 한철을 넣어서 엄청 단단해.”

형소가 검을 쑥 내밀어 앞을 찔렀다.

형소는 키가 작아 팔도 짧다. 근데 검이 길어서 다른 사람이 보통 검을 내민 것과 비슷했다.

형소가 왜 긴 검을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응. 괜찮아 보이는데?”

칭찬을 하니 형소가 코를 벌름거리며 흡족해했다.

그때 하기주가 불렀다.

“형소하고 무한, 너희 둘은 나를 따라와라.”

그러고는 연무장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검을 내놔라.”

하기주는 진검을 회수하고 뭉툭한 철검을 내주었다.

“수련할 때는 이걸 써라.”

철검은 무거웠다.

형소가 철검을 받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검을 자랑했는데 모양 빠진 셈이다.

“내공, 내공, 하지만 검수의 기본은 근육이다. 실전이 벌어지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얼마 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하기주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무한이 실망하는 형소에게 속삭였다.

“철검도 진검이잖아.”

“그렇긴 하지.”

형소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철검이 무겁긴 하지만 형소는 가전심법으로 내공을 수련하는 중이고, 무한은 경천심결로 단련된 근육이 있어 그나마 자세를 갖춰 휘두를 수가 있었다.

“목검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를 때까지 수련한다.”

하기주가 말하고는 가버렸다.

텅!

연무장 한쪽에 무한과 형소가 뭉툭한 철검으로 목인형을 두드리는 소리가 단조롭게 울려 퍼졌다.

터텅!

텅!

하방 삼재검수가 중방 삼재검수가 됐다는 말에 몇몇이 와서 보곤 웃고 갔다.

“너까지 오니까 다들 와서 비웃고 가네.”

형소가 투덜거렸다.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

무한은 이제 무화전 승방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연혈을 완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혈관이 타들어가는 듯 고통스러웠던 고통도 내성이 생긴 듯 참을 만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지하 연공실에서 경천십이식 동작을 따라하던 무한은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 됐다!’

경천십이식을 펼쳤는데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아!’

드디어 연혈을 이루었음을 느꼈다.

전신 기혈이 터져오를 듯 부풀어 오르며 기운이 충만했다.

무한은 차오르는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한밤중임에도 밖으로 나갔다.

우천각 뒤 연무장으로 가서 경천심결을 운용하며 눈앞의 바위를 철검으로 찔렀다.

깡!

철검이 바위와 부딪히며 바위가 조금 부스러졌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기운을 썼다면 바위를 뚫었을 것이다.

무한은 어둠속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연근, 연골, 연혈! 이로써 연신(練身)을 이뤘다. 그러면 다음 단계가 연정(鍊精)인데.’

연정화기(鍊精化氣).

호흡과 음식을 통해 몸에 축적된 정기를 기화(氣化)하는 과정으로, 모든 내공서에서 입문 과정으로 보는 단계다.

이제야말로 내공심법이 필요함을 느꼈다.

‘경천무궤에 내공심법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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