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침.
여느 때처럼 천무관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천부에서 사람이 왔어요.”
“곧 간다고 전해.”
빈청으로 가니 기천부의 무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포권을 했다.
“무슨 일이죠?”
기천부 무인이 서신을 건넸다.
강유가 보낸 서신이었다.
「사흘 후 검천전에서 경천무궤를 전달할 것이다.」
경천무궤를 전하는 자리에 도왕과 권왕도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고 전해주세요.”
기천부 무인이 예를 취하고 갔다.
유아가 들어와 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경천무궤를 받나봐.”
“드디어 천하제일인의 무공을 이어받는 거네요?”
유아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무한은 귀영을 불러 문향전 강학에 빠진다고 전하게 하고 검천전 서재로 갔다.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무한은 할아버지 심양조의 집무실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는 강유에게 경천무궤를 맡기고, 자신이 열여섯이 되는 해 건네주라고 유언을 남겼다.
은밀하게 전해도 될 일을 공개적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천무궤에는 천하제일인의 신공이 담겨 있으니 이를 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경천무궤를 돌려받고 할아버지의 진전을 익힐 때 비로소 검천부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무한은 오전 내내 검천전 서재에 있다가 우천각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수련은 해야지.’
무화전으로 가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검천부 정문에 소란이 일었다.
유아가 황급히 달려왔다.
“공자! 신검대가 돌아왔어요.”
신검대?
나가보니 이미 신검대가 검천전 광장 앞까지 들어왔다.
선두에 선 담철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천하방으로 데려온 신검대주, 담철조가 무한을 보고 포권을 하였다.
“소주! 신검대가 돌아왔습니다.”
“소주를 뵙습니다!”
신검대원들이 일제히 포권하였다.
담철조나 신검대의 행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복은 닳았고 무기도 낡은 태가 역력했다.
무엇보다 인원이 마흔 명도 되지 않았다.
신검대의 편제는 일백 명이었는데 절반도 남지 않은 것이다.
무한은 귀밑머리가 희끗한 담철조의 행색을 보고는 내심 울컥했다.
자신을 데리러 서안에 왔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날은 거짓말처럼 무적대가 돌아왔다.
무한이 천하방에 오기도 전에 남만행을 떠났다는 무적대.
무려 육 년여 만에 돌아온 것이다.
공곤은 약간 머리가 벗겨지고 짧은 턱수염이 무성하여 위맹한 인상을 주었다.
공곤과 무적대는 오자마자 심 씨 사당으로 가서 할아버지의 위패 앞에 부복했다.
반시진이나 말없이 침묵으로 조의를 표하고 나서야 옆에서 기다리던 무한을 향해 포권을 하였다.
“소주를 뵙습니다!”
무적대의 행색은 신검대보다 더욱 남루했다.
남은 인원도 서른여 명에 불과했다.
일백의 무인이 가서 서른 명이 귀환했다는 건 일흔 명 가까이 죽었다는 뜻이다.
‘대체 무슨 임무였기에…….’
무적대원들 역시 낡은 무복을 입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
사흘 후 검천전.
대청이 활짝 열렸다.
검천전 앞 널따란 광장 양편에 신검대와 무적대가 도열했다.
새로 무복을 갈아입은 신검무적대는 맹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무한은 대청으로 향하다 신검대와 무적대를 보고 잠시 멈췄다.
눈이 마주치차 신검대와 무적대가 동시에 외쳤다.
“소주를 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무한은 신검대와 무적대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예를 취했다.
그러자 신검대와 무적대 무사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신검대주 담철조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외쳤다.
“소주께서 어찌 수하들에게 고개를 숙이신다는 말입니까.”
“예를 거두어주십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무적대주 공곤도 외쳤다.
무한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무한은 말없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다시 검천전 돌계단을 올랐다.
이백 계단을 오르자 검천전 대청이다.
대청 중앙 단상에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둘만 주인이 앉아 있다.
무한은 할아버지 심양조와 천기자의 빈자리를 잠시 보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도왕 고진.
권왕 복호명.
천하사패 중 남아 있는 두 명이 무한을 내려다보았다.
“왔구나. 오늘로써 너는 명실상부한 검천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는 앞으로 검천부의 행보와 네 행동에 대한 책임도 져야함을 의미한다.”
도왕이 엄숙히 말하고는 강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가 손짓하자 십여 명의 기천부 무사들이 들것을 메고 들어왔다.
들것 위에는 기다란 철궤가 놓여 있었다.
기천부 무사들이 들것 위의 철궤를 단 아래 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경천무궤!’
모두의 시선이 대청 바닥에 놓인 철궤를 향했다.
천하제일인의 유전이 철궤에 담겨 있으니 바라보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잠시 후.
도왕이 앉은 자세 그대로 오른손을 내쳤다.
쉬익, 철컥!
도왕의 손에서 철시(鐵施)가 날아가 철궤의 한쪽에 꽂혔다.
이어 권왕이 손을 내지르자 역시 똑같은 모양의 철시가 날아가 철궤의 다른 한쪽 면에 있는 열쇠구멍에 꽂혔다.
철궤는 사방에 열쇠구멍이 있었다.
강유가 다가가 나머지 한 면에 열쇠를 꽂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
무한은 내심 당황했다.
‘내가 철시를 받았던가?’
기억에 없다.
강유가 무한에게 말했다.
“철시를 꽂아 철궤를 열어라.”
“제게는 철시가 없습니다.”
무한이 대답하자 모두 어리둥절해하였다.
강유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도왕과 권왕도 의아한 눈빛으로 무한을 내려다보았다.
“철시가 없으면 철궤를 열 수 없습니다. 철궤는 강제로 열면 폭발하여 그 안에 있는 게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강유가 말했다.
이 철궤는 할아버지가 의제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잠갔다.
그리고 철시를 의제들에게 하나씩 주고 마지막 하나는 할아버지가 챙겼단다.
도왕이 물었다.
“정녕 네 할아버지가 철시를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냐?”
“철시 같은 건 받지 않았습니다.”
모두 난처해하는데 바깥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클클!”
무척 노쇠한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대청 문 앞에 백발노인이 서 있었다.
도왕과 권왕의 안색이 굳었다.
광장에 신검대와 무적대가 있는데, 그 수많은 이들의 눈을 피해 올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백발노인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여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
“……!”
도왕과 권왕이 일어나서 백발노인을 향해 포권하였다.
“산도(散道)께서 어인 일이시오?”
“선배께서 이 자리에 오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도왕, 권왕, 오랜만이로군. 다시 볼 줄은 몰랐네.”
산도라 불린 백발노인이 연신 클클 웃으며 품속을 뒤졌다.
“검신이 내게 열쇠를 하나 보냈거든.”
산도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철시였다.
산도의 손에 들린 철시에 모든 이의 시선이 꽂혔다.
“검신 그 친구가 참 짓궂지. 저세상에서도 늙은이를 귀찮게 한단 말이지.”
산도가 투덜거리며 손에 든 철시를 철궤의 마지막 면 열쇠구멍에 꽂았다.
덜컥.
철궤에서 기관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산도가 무한을 힐끗 쳐다보곤 말했다.
“뭐하느냐? 네가 주인이니 열어봐야 할 게 아니냐?”
무한은 정신을 가다듬고 철궤의 윗부분을 들어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경천무궤 속을 향했다.
기다란 철궤에 한 자루의 검이 놓여 있었다.
묵빛 검집에는 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와 평생을 함께한 애검, 경천(驚天)이었다.
‘아!’
경천신검과 함께 두 권의 무서가 놓여 있었다.
경천십이식.
경천승운공.
천하제일인의 성명절기였다.
“……!”
무한이 검을 들고 머리 위로 올린 후 도왕 등에게 예를 표했다.
도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을 열었다.
“경천신검이 돌아왔으니 검천부에 새로운 주인이 섰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나직하나 웅혼한 목소리는 대청 밖 광장에 있는 신검대와 무적대 무사들의 귀에까지 울렸다.
촤라라락!
수십 자루의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검대와 무적대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거꾸로 세워 바닥에 꽂고 무릎을 꿇었다.
“신검대! 검천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무적대! 검천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이리 와서 앉아라.”
도왕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무한은 천천히 걸어 단상으로 올라가 도왕의 옆에 앉았다.
강유는 단상에 오르지 못했다. 천기자 강조가 살아 있으니 아직은 단상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도왕이 무한에게 말했다.
“천하방은 천하 정도의 보루다. 너는 검천부의 주인으로 천하방의 이상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도왕이 당부의 말을 하고는 산도를 향해 말했다.
“의형께서 선배께 철시를 맡긴 줄은 미처 몰랐소. 검천부를 대신하여 감사드리오. 이왕 왕림하셨으니 며칠 쉬었다 가시지요.”
“그가 열쇠만 맡겼으면 내가 이리 왔겠나. 사람 시켜 전하고 말았지. 염려 말게나.”
산도가 돌연 한숨을 푹 쉬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무한을 흘깃 쳐다보았다.
“검신에게 진 빚이 좀 있거든. 그걸 갚으려면 며칠이 아니라 한동안 머물러야 할 게야.”
***
도천부 삼형제는 매화분이 놓인 정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첫째 고강후의 집무실 뒤편에 있는 은밀한 공간이다.
도천부 둘째 고성후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음미하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놀랍지 않습니까? 신검대와 무적대가 동시에 돌아오더니, 산도가 검천부에 나타났지요. 검신의 안배는 정말 치밀합니다.”
“흥! 경천무궤를 누가 탐한다고……. 강유가 보관하는 동안 누가 관심이나 가졌습니까?”
셋째 고동후가 인상을 썼다.
“관심이 없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경천무궤에 무엇이 담겼는지 보고 싶은 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동안 기천부에 있었으니 기관진식을 뚫고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이지.”
“나는 눈꼽만치도 궁금하지 않았소. 검신이 있어 경천십이식이 위력을 발휘했던 것 아닙니까? 다른 누군가 경천십이식을 익힌다 해도 검신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거란 말이오.”
“경천십이식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무공이 아니다. 천하제일인의 무공이니만큼 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야.”
둘째와 셋째가 하는 말을 듣던 고강후가 찻잔이 놓인 탁자를 손가락으로 탁탁, 쳤다. 그러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쓸데없이 말 돌리지 말고, 너희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봐라. 갑작스레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게 아니냐?”
고강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자 성질 급한 고동후가 자기 뜻을 드러냈다.
“경천십이식 비급은 검신의 유전이자 천하방의 자산입니다. 당연히 만현각에 비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