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고강후가 흠칫, 놀랐으나 아무런 내색을 안 했다.
“숙부께서 조카의 안위를 위해 그간 암중호위를 붙여주셨음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분께서 오늘 아침 찾아와 정식 호위로 발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 숙부의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무한이 말을 하고 다시 예를 취했다.
고강후가 어리둥절하여 귀영을 쳐다봤다.
‘이게 뭔 소리지?’
귀영이 눈을 깜박깜박했다.
‘아! 다른 수가 있다더니…… 아예 호위로 들어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구나. 제법 머리를 썼군.’
고강후가 지레짐작했다.
“아…… 네가 부담을 가질까봐 그간 말을 하지 않았지. 이제 너도 다 컸으니 네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가까이 두고 쓸 만한 자다.”
고강후의 말에 무한은 정말 감복한 듯 연신 예를 취했다.
이를 본 귀영은 속으로 오싹했다.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다니. 저놈이야말로 고강후보다 백배는 음흉한 놈이다!’
고강후는 무한이 공손하게 구니 기분이 좋았다.
“하하하. 천하사패는 가족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너무 예를 차리지 말거라.”
고강후가 화제를 돌렸다.
“조만간 경천무궤를 받을 것이다.”
무한은 고강후가 경천무궤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다.
고강후가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경천십이식은 천하제일의 검법이다.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강후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 수련하다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든든하군요.”
무한이 순순히 대답하자 고강후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한이 물러나오자 귀영이 뒤를 따랐다.
고강후가 따라 나와 배웅하며 귀영에게 엄포를 놓았다.
“이제 네 주인은 검천부주다. 잘 모셔야 한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네게 죄를 묻겠다.”
“목숨을 바쳐 호위하겠습니다.”
귀영이 고개를 숙였다.
‘이 병신아. 이 어린놈이 네 머리 꼭대기서 놀고 있단 말이다.’
두 사람이 나가자 고강후가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흠. 제 아비와 달리 아주 순둥이로군.”
***
귀영이 무한에게 물었다.
“이제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열흘에 하루씩 쉬는 날을 줄 테니 하던 대로 고 숙부에게 보고하세요.”
“예?”
귀영이 반문하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중첩자가 되라는 뜻이군요.”
“가서 검천부 무복을 지급 받아 갈아입으세요. 이제부터 정식 호위이니 복장을 갖춰야죠.”
“저 사람은 무복을 입지 않고 있던데요?”
귀영이 어딘가 있을 무흔을 찾았다.
‘나만 이 바보 같은 무복을 입으라는 거야.’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한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데 마치 그와 네가 같냐는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귀영이 순순히 대답하고 나갔다.
귀영이 가자 무흔이 나타났다.
“저놈을 믿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저자를 쓰십니까?”
무흔은 무한이 왜 귀찮은 짓까지 벌여가며 귀영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한이 무심한 얼굴로 귀영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자가 도주하면 고 숙부가 다른 사람을 붙이겠지요? 새로 어떤 이를 붙일지 모르죠. 그보다는 어수룩한 자가 나을 겁니다.”
***
형소가 찾아왔다.
“내일 천병각(千兵閣)에 가지 않을래?”
“천병각?”
“병기점이야.”
형소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듯 말했다.
“천하의 모든 병기가 있는 곳이지.”
무한이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처음 철목을 칠 때 부러뜨린 후 대장간에서 구입한 진검인데 손에 익어 아쉬움이 없었다.
“검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한 번쯤 가볼만 한 곳이야.”
아무래도 형소가 혼자 가기가 주저되는 모양이다. 형소는 여전히 내성적이다.
“좋아.”
다음 날.
무한은 형소와 같이 천하방을 나섰다.
천병각은 성 밖 마을에 있는 병기점이다. 천하방에서 운영하며 무서나 병기, 요상약이나 호신갑 등 온갖 것을 판다.
무한은 천병각의 규모를 보고 내심 놀랐다.
“이게 각(閣)이야?”
삼층 누각에 천병각이라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옆으로 담이 쭉 이어진 걸 보면 엄청나게 큰 장원이다. 담 너머로 전각의 지붕이 즐비하게 늘어선 걸 볼 수 있었다.
형소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청 크지. 중원 제일의 병기점이잖아. 세상의 온갖 병기가 여기 다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야.”
형소가 먼저 천병각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죠.”
젊은 점원이 싹싹하게 맞아주었다.
“신수가 훤한 공자들이시네요. 뭘 보여드릴까요?”
“호신갑을 보러 왔는데…….”
형소가 말했다.
“호신갑이요?”
점원이 의외라는 듯 형소를 봤다.
무림인들이 호신갑을 착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래도 운신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구나 손목보호구, 무릎보호대 등을 부분 착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있기야 합니다만…….”
점원은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형소의 차림으로 보아 제법 돈이 있어 보였기에 보검이나 보도를 팔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호신갑이라는 말에 기운이 빠진 모양이다.
“값은 얼마든 낼 수 있어.”
형소가 대뜸 두둑한 전낭을 흔들자 점원의 눈빛이 싹, 변했다.
“하하하. 호신갑은 뒤쪽 전각에 따라 보관하고 있지요. 물건이 커서 앞에 진열하기 어렵거든요. 따라오시죠.”
무한과 형소는 점원을 따라 뒤쪽으로 갔다.
거의 창고 수준의 전각이었다.
삼단으로 짠 진열대에 호신갑을 비롯한 비교적 큰 무구(武具)들이 놓여 있었다.
젊은 점원이 호신갑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하더니 가장 앞에 있는 은린갑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 은린갑이 아주 괜찮은 물건입니다. 화살도 뚫지 못하죠.”
물고기 비늘 같은 작은 철판을 엮은 은린갑은 꽤 커서 보기만 해도 묵직해 보였다.
“무거워 보이는데…….”
형소가 말하자 점원이 은린갑을 다시 진열대에 올려놓고 말했다.
“사용하실 분 체구가 어느 정도신지요? 원하시는 재질과 크기를 말씀해주시면 추천해드리겠습니다.”
“…….”
형소는 대답하지 않고 진열대 사이로 가며 물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무한도 뒤따라가며 호신갑을 살펴보았다.
‘종류도 다양하네.’
가죽으로 만든 것, 천으로 짠 것, 철판이나 나무로 덧댄 것 등 다양한 호신갑이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이 높지는 않았다.
내가고수를 만나면 호신갑의 효용성이 떨어진다. 일류무사만 해도 호신갑을 찾지 않으니 가격이 낮을 수밖에 없다.
호신갑을 찾는다는 말에 점원이 실망스러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신갑은 아무래도 불편하지요. 전장에 나가는 게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호신구를 착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이쪽에 호신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점원이 옆 진열대를 가리켰다.
무한은 구경삼아 호신구가 진열된 곳을 살폈다.
호신구가 오히려 크기나 재질에 비해 호신갑보다 가격대가 높았다. 찾는 이가 많다는 뜻이다.
‘하나 살까?’
은빛이 나는 한 쌍의 손목보호구를 보자 무한의 마음이 동했다.
점원이 무한이 마음에 들어 하는 걸 눈치채고 말했다.
“이걸 차시면 여협들의 시선이 달라질 겁니다.”
점원의 말에 손목보호구를 슬쩍 눌러보니 쑤욱 들어갔다. 손목을 보호하기보다는 장신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가격은 금자 열 냥이라고 적혀 있었다.
“절대 가격이 비싼 게 아닙니다. 이 문양을 보십시오. 얼마나 고급스럽습니까?”
무한이 관심을 보이자 점원이 입에 거품을 품으며 설명했다.
‘금자 열 냥이라니. 유아가 난리치겠지?’
장신구에 금자 열 냥이나 쓸 수 없었다.
은빛 손목보호구를 내려놓은 무한의 시선에 진열대와 벽 사이 틈에 끼어 있는 물건이 들어왔다.
역시 손목보호구였는데 칙칙한 빛이 무척 오래된 고물(古物) 같았다.
진열하다 틈 사이로 떨어진 모양인데 먼지가 수북했다.
무한이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손목보호구를 꺼냈다.
왼손에 차는 한 짝뿐이었다.
“그건…….”
점원도 이런 게 있었는지 몰랐기에 잠시 당황했다가 말했다.
“그건 은자 한 냥입니다.”
“이런 고물이?”
“하하하. 잘 보시죠. 변색이 돼서 그렇지 은이 섞인 겁니다. 이대로 녹여도 은자 한 냥은 나올 겁니다. 사실 거저나 마찬가지죠.”
아무리 봐도 쇠 같았다.
“순은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요? 공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입니다. 이게 딱 이죠.”
점원이 금자 열 냥짜리를 들어보였다.
그때 형소가 점원을 불렀다.
“이거, 이거 줘요!”
점원이 형소에게 가자 무한도 따라갔다.
형소가 고른 호신갑은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나무로 앞 뒤판을 대고 양 옆을 가죽 끈으로 묶은 호신갑은 크기가 작아 형소의 체구에 맞을 듯했다.
“아! 정말 좋은 물건을 고르셨군요. 이게 바로 등나무 호신갑입니다. 등갑군 아시지요? 삼국지에서 제갈량에게 애를 먹였던 남만의 군대였죠.”
점원의 말처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등갑군의 호신갑처럼 보였다.
기름을 잔뜩 먹은 등갑은 묵빛이었다.
“등갑군은 제갈량이 다 불태워 죽였는데…….”
점원은 아는지 모르는지 등갑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질기고 탄력성이 있어 쇠보다 낫습니다. 도검불침이죠.”
무한이 보기에 형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호신갑은 형소에게 맞지 않았다.
“한번 입어볼까?”
형소가 겉옷을 벗고 등갑을 걸쳤다.
등갑은 형소에게 딱 맞았다.
“나중에 작지 않을까?”
형소가 걱정하자 점원이 등갑을 엮은 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양쪽에 엮은 줄을 풀면 어른도 착용할 수 있지요.”
“그러네.”
등갑을 걸치고 겉옷을 입으니 형소의 몸이 두툼해 보였다.
마치 거북이 같았는데 형소는 만족스러운 듯 콧김을 흥흥, 거리며 자신의 가슴을 쳐봤다.
“생각보다 가벼워. 이건 나무니까 물에도 뜨겠지?”
“그렇죠!”
점원이 맞장구쳐줬다.
“불에는 약할 텐데?”
무한이 말하자 점원이 화를 냈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이건 제갈량의 화공에 당한 후 개량한 등갑이란 말입니다. 불에 붙지 않도록 특수한 약품을 발랐다고요.”
점원이 형소의 겉옷을 펼치고 등갑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말이 진짜야, 거짓이야.’
무한이 천목투심술로 점원을 봤는데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미심쩍다고 등갑에 불을 붙여볼 수는 없었다.
점원이 옆에 있는 같은 재질의 손목보호구와 정강이 보호구를 집어 들었다.
“이것까지 포함하여 금자 열 냥입니다.”
나뭇조각 붙인 걸 금자 열 냥이나 부르다니.
형소도 가격을 듣고 망설였다.
“좀 비싸긴 한데…….”
형소가 등갑을 툭툭, 치며 고민하다 무한의 손에 들린 손목보호구를 봤다.
“그건 뭐야? 고물 같아 보이는데?”
“응. 한 짝뿐이라 살까 말까 생각중이야.”
“내가 사줄까. 얼마야?”
점원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은자 한 냥입니다만 등갑을 사시면 사은품으로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