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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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과 연락이 닿기 위해서는, 무전기의 송수신이 가능할 만큼 거리를 좁혀야 했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아이를 납치한 신전에서 언제 애런을 저들에게 넘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밀고자였던 이를 벽돌집에 잘 묶은 후, 나는 곧바로 신전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9인승 승용차 안엔 운전자인 나를 필두로 그 옆에 신관 리븐, 뒷좌석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 뒤로 양 갈래머리 아이와 중년 남자가 탔다.
납치 장소였던 벽돌집은 수도의 2시 방향에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그 벽돌집에서 출발해, 절벽에 난 해안 길을 따라 1시 방향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1시 방향, 즉 18구역과 19구역의 경계선에 신전이 자리해 있었다.
리븐의 말에 따르면 아이는 신전에 있을 거라 했다.
낮에 눈을 떠서 그 소동을 벌이고 지금은 주황빛 노을이 짙게 깔린 저녁이었다.
밖은 낙조에 물든 붉은 바다가 절벽 아래로 절경을 이루었고, 창밖을 바라보는 리븐의 볼도 지는 햇빛에 상기되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리븐. 24세. 금발에 녹안.
우는 모습이 유달리 예쁘다. 누구보다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성직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아주 오랫동안 신을 찾아 헤맸는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신을 믿고 의지하고 싶었으나 신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버린 신관.
사라진 신을 대신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한다.」
“이봐요.”
“…….”
“자기소개 좀 해볼래요? 1차 납치범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그렇거든요.”
이름도 맞고 외형 정보도 일치하고 직업도 맞지만, 혹시 몰라 물었다.
“이름은 리븐이고 제국의 최동단 지역인 동부 제3교구에서 보좌주교로 있었습니다.”
‘탐색해.’
[당신은 종의 요정, 이제 당신이 도울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불우이웃으로 지정할 수 있는 대상이 없음.]
이럴 줄 알았다.
이러면 리븐에게 기부해 그의 능력을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
“저기요 1차 납치범씨. 이미 다 아는 정보 나열하지 마시구요.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제가 이 화를 누를 수 있을 만한 정보 없어요? 너무 배고파서 훔쳤다, 열흘을 굶었더니 눈앞에 빵 말고는 보이지가 않더라, 이런 거 있잖아요. 동정심을 자극하는 최대한 불쌍한 얘기 좀 해줘요.”
그래야 네 능력을 쓰니까.
“저는.”
그가 막 제 얘기를 하려는 찰나, 갈림길이 나왔다.
“저 앞에서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길을 모르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에 조수석에서 리븐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저 앞이 바로 이 앞이요, 아니면 저어기 앞이요?”
“저어기 앞이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차를 좌측으로 꺾었다.
뒤에서 세바스찬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내가 한대도.”
“총기류를 제일 잘 다루는 사람의 손을 운전대에 묶어둘 순 없어서요.”
새로 생긴 내 스킬은 뭔가가 찜찜해서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 큰길이었기에 길을 모르는 내가 운전대를 잡아도 별로 어려울 일은 없었다.
간만의 내비게이션 역할이 끝나자 그가 좀 전에 못다 한 말을 꺼냈다.
“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으면 제가 죽고 남은 자리에는 그동안 쌓아 올린 죄밖엔 남지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 괜찮으니 몇 명이라도 낙원에 보내주고 싶었어요. 잘못된 선택이었지만요.”
내 새끼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시한부인 그의 상황이 안타까워 무슨 말이라도 건넸을 텐데.
그는 매우 죄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당연히 저래야 할 일이지.
“고개 들고 앞을 봐요. 길 안내할 거면.”
“네.”
“리븐.”
“네.”
나는 잠시 말을 망설였는데, 말을 하려던 그 순간에 지금 혼자 떨고 있을 어린아이가 상상됐기 때문이었다.
“더 죄를 짓고 싶지 않다고 했고 속죄하고 싶어서 이 일을 벌였다고 했잖아요.”
“네.”
“그럼 나를 도와서 반드시 아이를 구해요.”
“…….”
“속죄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마지막까지 죄짓고 가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꼭 그러고 싶어요.”
“잘됐네요.”
차는 미끄러지듯 해안절벽 위를 달렸다.
“신관이면서 신은 없다고 생각하죠, 당신.”
“그걸 어떻게…….”
리븐이 행동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말했잖아요. 보인다니까.”
그는 내가 자신의 수치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신을 믿지 않는 사실에 관해서도 말하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혹시 그쪽이 제가 찾던 신인 걸까요.”
“개소리 말아요.”
“……네.”
나는 하려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도 신 안 믿어요. 안 보이는 건 잘 못 믿겠더라구요. 대신…….”
“…….”
“인간을 믿어요.”
믿긴 개뿔. 아니다, 사실 안 믿는다. 인간은 배신의 동물이지! 인간을 믿는 순간 펼쳐지는 건 불지옥뿐이다.
그러나 나는 옆에 앉은 남자가 이번만은 제대로 행동해 주길 원했다.
그래서 말로 살살 구슬렸다.
“나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싶다는 당신의 말을 믿을 테니까 당신은 나를 믿어요. 그럼 속죄는 몰라도 용서는 꼭 해줄게요.”
주홍빛 바다를 배경으로 리븐의 녹색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바라보았다.
“꼭 받아내야겠네요. 당신이 해준다는 용서요.”
쟤는 말을 뭐 저렇게 빚쟁이처럼 한담.
어쨌거나 그가 성직자이긴 한 모양이다.
남자는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요. 또 말해서 좀 그런데…….”
아직도 네가 불우이웃으로 탐색이 안 된단 말이다.
아주 작은 일에도 연민의 마음을 품던 내 선하고 선량한 마음 다 어디 갔어, XX!
이 X같은 세상이 내 선한 마음을 탈탈 털어갔어! 그래서 이래!
“내가 그쪽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을 만한 정보 좀 더 줄래요?”
“그게 절 용서해 주시는 데 도움이 되나요?”
“없는 것보단 낫겠죠.”
“저는 지금 그 애런이란 아이가 무척 부럽습니다. 제 생엔 당신 같은 어른이 없었거든요.”
“…….”
앞을 보고 말하는 그의 옆모습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해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얼굴을 비추는 저녁 노을빛이 남자의 미세한 감정들을 다 들춰내 버렸다.
입을 한 번 꾹 닫았다 뗀 그가 말을 이었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당신처럼 아무 이유 없이 달려가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도 지금과는 뭔가가 달랐을까요.”
“…….”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그의 말을 듣고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건 조금 쓸 만한 정보였어요.”
그는 쓸 만했다니 기쁘군요, 작게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탐색해.’
[당신은 종의 요정, 이제 당신이 도울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불우이웃을 발견하였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불우이웃에게 희망의 종소리를 울려주세요.
탐색된 불우이웃: 리븐]
리븐은 능력을 일시적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구슬 같은 물건을 나와 애런을 거울을 통해 데려올 때 다 써버렸다고 했다.
“이게 무엇이죠.”
아마 그의 앞에 떴을, 자선냄비 기부 창을 보고 묻는 것 같았다.
“수락하면 3분 동안 능력을 쓸 수 있는데, 능력치가 완전히 활성화되는 건 아니라 거울을 통해 사람이나 물건을 넘겨오는 건 안 될 거예요. 신전 안을 탐색해요.”
“이해했어요.”
[대상이 기부를 받았습니다. 기부 대상의 능력치를 일정 시간, 일부분 활성화합니다.]
[기부 대상: 리븐
활성화 정도: 20%
지속 시간: 00:03:00]
리븐이 조수석 창문에 나타난 영상을 핸드폰 화면을 넘기듯 밀어 넘겼다.
낯선 장소, 낯선 풍경, 동물 가면을 쓴 이들의 섬찟한 모습들이 휙휙 지나갔다.
나는 곧 도착할 곳이었기에, 빠르게 지나가는 장소들을 조금이라도 눈에 익히려 애썼다.
“대예배당.”
“…….”
“주교실.”
리븐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장소들을 소리 내 뱉었다.
왜 애는 한 명인데 말하는 장소가 한 곳이 아니지?
그리고 마지막, 지속 시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창문에 아주 어두컴컴한 장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곳은…… 지하예요.”
“왜 세 곳이나 되는 건데요?”
“전 이미 그들이 준 물건을 다 소모해서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태였는데, 저쪽은 아니라고 생각해 대비한 것 같아요. 복면을 쓴 아이 형상이 세 장소에서 보여요.”
대예배당, 주교실, 지하?
“만약 내가 저쪽이라면 거울이나 유리가 없는 곳에 애를 두겠어요.”
“…….”
“리븐, 저 세 곳이 아닌 아이를 숨기기 좋은 장소를 생각해 봐요.”
어느덧 저녁에서 밤으로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가 있었다.
고민하는 남자의 얼굴 뒤로 얼음 덩어리가 둥둥 떠 있는 짙은 보랏빛의 바다가 보였다.
“그렇다면 종탑…… 종탑일지도 몰라요.”
“그럼 그곳도 포함하죠.”
총 네 곳. 그 네 곳이 아닐 확률도 있는데 우선 봐야 할 장소가 네 곳이나 되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리를 도와주기로 한 부녀까지 포함하면 기용할 수 있는 인원은 총 6명.
하지만 부녀가 떨어지진 않을 테고 전투 능력이 없는 할머니를 할아버지 곁에서 떨어트릴 수도 없으니.
‘나랑 리븐이 혼자 가야 해.’
“근데 벨.”
“네?”
플로라 할머니였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남편은.”
“아, 제 남편이요.”
백미러로 내 표정을 살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였다.
지금 내 옆에 데일이 없는 이유로 남편 사망설 정도를 예측하고 계신 듯했다.
아주 걱정스러운 눈빛들이셨다.
그놈이 어디 가서 쉽게 죽을 놈입니까, 할머니. 아닙니다.
“그게 데일은…….”
“벨.”
남편 사망설을 부인하려는데 리븐이 내 옆을 가리켰다.
“불 들어왔어요.”
혹시 몰라 옆에 놔둔 무전기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재빨리 무전기를 입에 가져대 댔다.
-치직.
“데일?”
-치지직.
“데일!”
-하…….
처음 들려온 것은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 소리였다.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어갔다.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나 괜찮아요. 다친 데도 없고.”
마치 전쟁터에서 사망한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 돌아온 소식을 접한 부인처럼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쪽 상황을 모르는 데일이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있는 곳 특정할 수 있겠어? 지금 무전 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해? 주변에 누가 있는 건 아니지?
“난 안전해요, 지금.”
안심되니까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뭐란 말인가. 괜히 듣는 사람 불안하게 울먹이며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울먹거림을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고 대답하려는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말 좀 더 해줘, 제발. 지금 안전하게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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