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이건…….”
그는 제게 총이 겨눠진 것을 봤으면서도 바닥에 깔렸다 사라지는 빛무리를 쥐려는지 팔을 허우적거리기에 급급해 보였다.
“네놈들이 내 애를 뭐라고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냐.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고, 나한테 당신의 가치는 내 애가 끌려간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 말고는 없어. 그러니까 말 안 하면 죽일 거야. 말해.”
그때, 그제야 제게 총구를 겨눈 날 올려다보는 금발의 녹색 눈동자 위로 시스템 창이 떴다.
[‘탐색(Lv.6)’으로 특정 대상의 수치심과 죄의식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탐색 결과를 바탕으로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탐색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내가 원하는 바?’
“해.”
[‘종의 요정’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탐색 완료.]
그러자 사람들의 머리 위로 방금까지 없던 수치가 생겨났다.
신관의 머리 위에 뜬 수치는 79.
나는 좁은 벽돌집 내부를 한 바퀴 빙 둘러봤다.
플로라 할머니 35, 세바스찬 할아버지는 28.
양 갈래머리를 한 아이는 22…….
그중 가장 높은 수치를 가진 자와 가장 낮은 수치를 가진 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자는 리븐이란 신관, 후자는 아까 전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놈을 쐈던, 뱀 가면을 쓰고 있던 자였다.
수치는 79와 17.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지?’
모르면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지. 바로 앞에 있는데.
“이봐, 금발.”
“…….”
“당신 신관이라지 않았어? 근데 무슨 수치심이 이렇게 그득해? 죄를 많이 지었어? 아무 죄 없는 남의 애를 납치한 것처럼?”
“그걸 어떻게…….”
아, 이 자식 걸렸다.
“보여, 나한텐.”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보인……다고요.”
내내 조용하던 리븐이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들에게 아이를 넘기는 대가로 저 대신 이들을 낙원에 보내달라, 그리 청했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당신의 말이 맞다면…….”
“…….”
“저는 마지막 순간에도 짓는 건 죄뿐이겠군요.”
창문이 다 부서진 벽돌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찼다. 시린 바람에 남자의 핏기 없는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제게로 겨눠진 총구는 보이지도 않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말을 마친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수치 79의 반응만으로는 이 수치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 아직 파악이 덜 됐다.
그래서 나는 가장 최하 수치인 17과 비교해 보기로 했다.
천천히 금발에게서 뗀 총구를 뱀 가면을 옆에 두고 앉아 있는 놈을 향해 겨누자, 그가 움찔 몸을 떨며 도망칠 곳도 없는 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네가 밀고자야?”
“무, 무슨……!”
“동료들의 계획이 틀어지도록 저쪽에 밀고해 놓고도 수치심을 그 정도밖에 안 가진다는 건, 그냥 그렇게 썩은 채 태어났다는 건가?”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을 지켜보던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나선 건 그때였다.
내 앞을 막고 나선 할아버지가 이를 중재하며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정말 악신인지 이 중에 본 사람 있습니까?”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 아이 곁을 지켰던 이 여자분이 그 애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분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
“예전에 우연히 도움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자신을 희생해서 제 아내를 구해줬던 사람입니다. 그래 봤자 그녀에겐 아무 이득도 없었는데 말이죠.”
할아버지는 멍한 얼굴로 서 있는 나를 쓱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이 여자분과 함께 아이를 되찾으러 갈 생각입니다. 함께 가실 분이 계십니까?”
‘할아버지…….’
“난 거길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 그리 외쳤고.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제가 벌인 일이니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조용히 일어난 신관은 그리 말했다.
할아버지 등 뒤에서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그의 눈동자는, 할 말이 많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간 시선을 마주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내빼려는 듯 슬금슬금 몸을 문 쪽으로 움직이는 뱀 가면의 남자가 있었다.
‘만약 밀고자라면 도망치게 두면 안 돼. 방해할지도 몰라.’
그 행동을 보며 손에 쥔 총에 힘을 주는데, 창이 떴다.
[‘종의 요정’을 위한 안내
개방한 루트와 획득한 스킬의 사용 빈도가 낮아, 원활한 스킬 사용을 위한 안내를 드립니다.]
[연민의 적극적 활용 X 탐색 = ‘연민–삭제’
당신은 요정으로서 가련한 대상이 일말의 수치심을 지킬 수 있도록, 대상이 수치심을 더 잃기 전에 ‘삭제’시켜 줄 수 있습니다.]
[수치심과 죄의식이 일정 수준 아래인 대상을 타깃으로 당신의 살상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삭제시킨 이들의 생명력을 바로 저장합니다.]
시스템의 설명을 읽어 내려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순간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뱀 가면의 남자가 벽돌집을 빠져나갔다.
-탕!
위협 사격의 주인은 세바스찬 할아버지였다.
제 근처로 날아든 총알에 달려가던 놈이 넘어져 바닥을 굴렸다.
“으아아아악!!”
그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자네가 정말 밀고자였던 건가?”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총을 겨눈 채 그에게로 가까워졌다.
“확실하지가 않잖아요!!”
벽돌집의 모두가 악을 써대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확실해요?! 리븐 보좌주교가 자기 대신 우리를 낙원으로 보내준다는데 그건 그냥 저자의 희망 사항일 뿐이잖아요!! 그쪽하고 협의된 것 하나 없이!! 근데 뭘 믿고 내가 가만히 있겠냐구요!!!”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천천히 바닥에 엎어진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가 여기 있다고 밀고한 거야?”
“그래!!”
“당신의 낙원행이 확실해진다면 그 애가 죽든 말든 아무 상관 없는 거야?”
“그런 쓸데없는 질문 좀 하지 마~아! 정의로운 척하지 말라고!! 역겨우니까!”
‘아, 그래.’
어쩌면 이게 내가 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게 가장 빠른 수단이다.
아이를 구하는 가장 빠른 수단, 그리고 그게 내가 원하는 일이야.
[대상을 연민하십니까?]
“응.”
[스킬 ‘연민(Lv.6)’이 발동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구나.
‘연민-삭제’ 스킬을 사용하고 나자 총을 쥔 느낌이 남달랐다.
바닥에 넘어져 있는 저 남자가 벌떡 일어나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피해도, 얼마든지 원하는 곳을 다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나는 서서히 손에 쥔 총을 남자를 향해 들어 올렸다.
“벨.”
세바스찬 할아버지였다.
이번에도 나를 막아선 할아버지가 내게 인자하게 눈을 맞추며 손에 든 총을 거둬갔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자는 여기 묶어두고 함께 아이를 찾으러 가자꾸나.”
“할아버지…….”
하지만 전 자꾸 화가 나는데요.
하면 안 돼요?
[대상의 수치는 시간이 지나도 증가하지 않을 겁니다. 대상에게 인정을 베푸십시오.]
꼭 시스템이 나를 독촉하는 것 같았다.
‘웃기네.’
할아버지가 총을 가져가고 남은 내 빈손에 어느새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총이 들려 있었으니까.
단 한 발로 급소를 맞춰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울렁임과 함께 말이다.
‘내가 저 남자를 죽였으면 좋겠어?’
맞아, 그러고 싶어.
-탕!
“으아아아!!”
왼쪽 발에 총을 맞은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 기껏 총까지 가져가셨는데 죄송해요. 무슨 마음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
“이 정도는 할래요. 너무 얄밉잖아요?”
다시 속으로 시스템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 저 남자를 죽이길 바라?’
나도 저 남자를 죽이고 싶어.
근데 누가 시켜서는 하지 않을 거야.
“가요.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요.”
❅
“벨!!”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여자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데일의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의 몸을 끌어당기던 모르는 손을 봤다.
거울을 통해 열린 길이 닫히기 전에, 데일은 그 자신도 거울 저편으로 넘어가 보려 했으나, 이미 열렸던 통로는 평범한 전신 거울로 되돌아와 있었다.
‘어쩌면 거울에 답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특수 능력자의 소행이라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데일은, 거울을 살펴보는 손길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그저 평범한 거울일 뿐이었다.
그가 거울을 향해 주먹질했다.
-쾅.
와장창 깨져버린 거울 주변에서, 사라진 여자와 아이, 그리고 혼이 빠진 캐드 대령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났다.
데일의 주먹질에 전신 거울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이었다.
“대, 대령님 괜찮으세요?”
“손에 피가…….”
“…….”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는 능력이 내겐 없나?
잃어버린 그 아이는 시체도 찾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자신을 의지하던 동료의 마음도 지켜주질 못했다.
그리고 이젠 남은 두 사람마저.
사냥꾼들에게 끌려가 외롭게 죽었을 그 아이가, 어쩌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며 제게 보내준 선물 같은 이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벨을 만난 것도, 그 아이와 비슷한 애런을 만난 것도.
그런데 이렇게 또 허무하게 잃는다고.
데일은 찢어진 제 주먹에서 흘러내린 피가 깨진 유리 파편 아래로 스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리 파편 아래로 숨어 들어간 혈흔이, 카펫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는 모습이 방금 막 사라진 여자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사라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자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데일은 휑하니 열린 창틀을 짚고 서서 등을 벽에 기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대로 멈춰 있다간 정말 잃고 만다.
‘벨…….’
데일은 누군가 내미는 천을 받아 찢어진 주먹을 둘둘 감싸며 생각했다.
둘을 누가 데려갔을까, 어디로 데려갔을까.
이제까지 여자가 노려진 적은 없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도 애런을 노리는 자들의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그때,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몰려 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방으로 들어온 이는 레이스였다.
그 역시 당황한 눈빛인 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벨과 1층에서 말을 주고받던 레이스는 갑자기 몸이 옆으로 기울어 사라지는 여자의 모습에 놀라 뛰어 올라온 참이었다.
레이스의 금안이 깨진 유리로 너저분해진 방의 모습을 훑는 사이.
“이봐.”
데일이 차분함을 되찾은 파란 눈동자로 그를 불렀다.
“전에 너랑 같이 움직였던 떨거지들한테 연락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