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00)화 (100/108)

100화

“난 다친 데도 없고! 안전하고! 곁에는 플로라 할머니랑 세바스찬 할아버지 계세요!”

-어르신?

영문을 모르는 데일이 되물었다.

-하…… 어쨌든 그럼, 일단…… 하, 그래.

무전기가 된다는 것은 그와 내가 송수신 가능 거리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탄 차량이 수도의 1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그렇다면 데일은…….

-……알겠으니까, 어디야? 갈 테니까 위치 불러. 혹시 몰라 미리 말하는데 난 네가 있는 곳으로 가서 널 다시 여기다 데려다 놓을 거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안 받아. 잘못된 생각 품었던 인간들 정문에서 후문까지 머리 박아서 줄 세워놨으니까 위치 불러.

“데일 지금 어디예요?”

-18구역으로 막 들어왔어. 혹시 여기가 아닐까 싶어서 주변을 살피던 중이었어.

“항구 옆에 있는 신전으로 와요. 그리로 가는 중이니까. 우린 거의 다 왔고 시간 없어서 얼마 못 기다려요.”

데일에게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와 애런이 납치되어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애런이 재납치된 일과 그사이 일어난 주요 정황들까지 모두 다.

신전의 구조를 설명해 줘야 할 때, 그곳을 가장 잘 아는 리븐에게 무전기를 넘겼다.

“무전기 넘겨받았습니다. 리븐입니다.”

-어, 네가 납치범이라고.

“……예, 제가 두 분을 납치했습니다.”

데일에 이어 그와 친한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납치범이 타락한 성직자라지 않았습니까? 대령님, 성수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위 성직자가 없는데 성수 제조가 되는 부분입니까?

-형수님이 계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데일은 타운하우스에 있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간 그들이 신의 은총으로 여긴 일들이 내가 벌인 일들임을 얘기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화 내용이 저런 것이다.

타락한 성직자인 자신에게 성수를 제조해서 뿌리겠다는 그들의 대화를, 제법 차분한 얼굴로 듣고 있던 리븐이 말을 뱉었다.

“성수는 저도 많이 만들어 팔았는데 심적인 부분을 채우는 용도일 뿐, 악한 이를 물리치는 일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어, 말해 납치범.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한다고?

리븐은 친절한 목소리로 신전의 구조를 데일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애런이 혼자 있다는 거잖아. 우리 애 심심하겠네. 빨리 갈게. 먼저 들어가지 말고 기다려.”

“가능하면요.”

그리고 화를 내는 데일의 목소리 뒤로 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어. 안 줘.

-벨.

“네.”

-저와의 약속 잊지 않았죠? 무사하셔야 합니다. 빨리 가겠습니다.

그렇게 무전이 끊겼다.

신전 근처에 차를 세웠다.

차 안에서 신관복을 벗고 일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리븐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새 차 있던 게이지로 집에서 경량패딩을 소환했다.

[방탄 효과를 부여합니다.]

[기본 방어력을 높입니다.]

[무력에 대한 저항력을 높입니다.]

[마력에 대한 저항력을 높입니다.]

“다들 이거 안에 입어요.”

옵션창에서 설정할 수 있는 모든 옵션을 싹 부여한 후 사람들에게 돌렸다.

내가 입고 있던 기존 패딩은 훨씬 따듯하지만 겉옷으로밖에 입을 수 없는 두께라서, 지금 상황에선 입을 수 없었다.

죄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이상하게 볼 테니까.

“전에 벨이 줬던 옷이랑 비슷하면서 다르네요.”

플로라 할머니가 경량패딩을 걸치며 그리 말했다.

나는 다가가 할머니의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지퍼를 목까지 쭉 올려드렸다.

“지금은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 여길 나가면 할머니께 잘 어울리는 색으로 바꿔드릴게요. 그 전 같은 복숭아색으로요.”

할머니는 옷을 잠그느라 흘러내린 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셨다.

“다치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세바스찬이 있으니까 난 괜찮아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봐주기로 한 장소는 종탑이었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부녀에게도 옷을 건넸다.

두 사람이 가주기로 한 곳은 지하였다.

“잘 부탁드려요.”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에게 고개 숙여 옷을 건네자, 그는 제 어린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큰 실수를 할 뻔한 건 저흰데요.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모로서 지금 심정이 어떠실지 아주 조금은 상상이 됩니다.”

부모는 아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꾸벅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쨌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다는 이들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리븐이 있는 차로 다가갔다. 차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똑똑.

천으로 가려진 창문을 두드리자.

“여셔도 됩니다.”

라길래 문을 열었는데.

“이거 옷인데…….”

그는 아직 옷을 덜 입은 상태였다.

겨우 막 바지만 입고서 대답한 건지. 어두운 차내에서, 남자는 두 손으로 바지를 여미며 나를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거기 놔두시면 입을게요.”

핏기 없이 하얀 상체 위로 여기저기 멍든 자국이 보였다.

“아, 미안해요.”

급하게 돌아섰다.

“뭘 사과를 하세요. 괜찮습니다.”

“범죄자의 인권도 무지 생각해 주는 곳에서 컸거든요.”

그가 가볍게 소리 내 웃었다.

“마저 입어요. 차 문 닫을게요.”

“벨.”

막 차 문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당신이 아까 나를 쏴 죽였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정말 미안해요. 꼭 데려오죠.”

나는 대답하며 차 문을 닫았다.

“범죄자의 인권 따위 챙기는 거 세상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예외로 빼둘게요. 입어요.”

-탁.

이제 내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차에 등을 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빛나는 별들이 얼마나 크고 밝게 빛이 나는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할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벨, 그 아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겠네요.”

“네.”

“짧은 새에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에요.”

“꼭 처음 본 대상이 어미인 줄 아는 새끼 오리처럼 굴거든요.”

“애들은 쉽게 정을 주니까…….”

생각해 보니 말을 잘못했다.

이제 와 되짚어보니 꼭 나는 꼬맹이가 부담스러운데 애가 따라서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읽혔을 수도 있겠는데.

-탁.

그때 차 문이 열리고 리븐이 내렸다.

“이거요.”

그가 내게 내민 건 동물 가면이었다.

“신전을 돌아다니려면 이게 필요할 거예요. 둘 중 원하는 것으로 골라요.”

리븐이 내게 내민 것은 노란 바탕에 까만 눈코입이 돋보이는 동물 가면과 갈색 바탕에 긴 송곳니가 눈에 띄는 동물 가면이었다.

이곳의 신도들은 자신의 방이 아닌 곳에서는 동물 가면을 쓰고 생활한다고 했다.

둘 다 무슨 동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무슨 동물이죠?”

“노란 건 곰이고 갈색은 바다코끼리요. 하나 선택해요.”

노란 곰 가면은 정상 곰이 황달 걸린 것 같아서 별로였고 갈색 바다코끼리 가면은 송곳니가 거추장스러웠다.

가면을 양손에 쥐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자, 내 선택에 도움을 주고 싶었나 보다.

리븐이 말을 덧붙였다.

“곰은 수가 많아서 색이라도 달리하다 보니 노란색이 된 거고 바다코끼리는 겹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노란 곰 가면으로 할게요. 그게 눈에 덜 띄겠어요.”

그의 손에서 가면을 가져가려는데 그가 내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돌아볼래요. 이거 뒤에서 누가 묶어줘야 하는 거라.”

돌아서 있자, 그가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뒤로 가져갔다.

“머리 풀고 가면 쓰면 머리카락이 안에서 엉켜서 불편할 수 있는데 머리 묶을래요?”

“잘 묶어줄 수 있으면요. 아니면 내가 묶고요.”

“잘할 수 있어요. 어린 신도들 머리를 묶어준 적이 조금 있거든요.”

리븐은 머리 손질이 익숙한 것 같았다. 아니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긴 손가락을 이용해 내 머리를 빗는 것 같았는데,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가는 시간이 천년만년 걸렸다.

“우리가요.”

“네?”

“우리가 지금 일행의 합류를 기다리는 중이긴 하지만 그렇게 느리게 머리를 빗을 이유가 있을까요.”

“아.”

남자의 손질이 빨라졌다.

쓱쓱 머리카락을 대충 빗은 후, 리븐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끈으로 머리를 묶어줬다.

그리고 머리에 가면을 씌우고 뒤를 끈으로 조였다.

“혹시 갑갑해요? 이 정도는 묶어야 흘러내리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몇 년간 마스크에 단련되어 그런가. 시야가 좁아진 건 불편했지만 가면이 갑갑한 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그때 가면을 쓴 자가 차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심하라는 듯 그가 두 팔을 올렸다.

“세바스찬일세.”

“아…… 할아버지, 할머니랑 다른 사람들은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폐건물 하나를 봐뒀어. 다들 거기 있네. 그리고…….”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조금 전 내가 만들어둔 총이었다.

“리븐 신관님도 하나쯤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일세.”

가면 안에서 좋다는 눈빛을 보내자 할아버지가 그에게 총을 건넸다.

리븐은 제게 건네진 총을 받을 생각이 없는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받아요. 맨손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그때였다.

-바스락.

담벼락 너머에서 누군가 길가에 떨어진 종이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보다 먼저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리븐이 총이 들린 할아버지의 손을 제 가슴께로 가져갔다.

“세바스찬.”

그가 우리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절 끌고 온 척해요.”

“거기 누구야.”

점점 가까워지는 이들의 숫자가 꽤 됐다. 어림잡아도 열댓 명은 넘어 보였다.

“리븐 신관님?”

“무슨 일이야, 리븐 신관님께 왜 총을…….”

“그 소문이 진짜였어?”

그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오늘 리븐 신관님이 내내 안 보였던 이유 말이야.”

정확히 상황을 몰라 어리둥절한 이들을 향해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거칠게 얘기했다.

“보좌주교 리븐이 주교님을 배신하고 떠나려던 걸 잡아 온 거네.”

“에?”

“맞네.”

“경비를 서는 중인가? 그럼 고생들 하게.”

할아버지가 움직이자는 듯 나를 쿡 찔렀다.

신전으로 향하는 척하면서 이대로 셋이서 자리를 벗어나자는 말 같았다.

“오늘 신관님께서 어째 안 보인다 했더니만.”

그들은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듯한 리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이런 일에 둘이서 되겠나? 우리가 같이 가겠네. 어차피 이 근처엔 쥐새끼 한 마리도 없어.”

경비를 설 한두 명만 남기고 그들은 우리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하…….’

데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나랑 할아버지랑 둘이? 리븐은 포로가 되고?

‘아, 이거 꼬이는 거 같은데.’

나는 가면 속에서 인상을 쓰며 가까워지는 신전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신전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동물 가면을 쓴 자들을 따라 하얀 복도를 걸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낯선 이들이 가끔 리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무리 한가운데서 걸어가는 리븐을 반가운 얼굴로, 또는 혐오 섞인 눈길로 쳐다봤다.

“아니, 보좌주교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배신을.”

그들은 그런 소릴 해대며 이따금 뒤를 돌아 리븐을 쳐다봤다.

‘진짜 모르는구나.’

밀고자가 말한 건, 리븐이 아이를 빼돌리려 한다는 것과 그 장소라 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이들 중, 리븐의 배신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도 그와 함께했던 신도들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소리였다.

즉, 나와 세바스찬 할아버지는 지금 그냥 평범한 신도1과 2일뿐이었다.

리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친 건 그때였다.

“전 주교님을 뵈러 주교실로 갈 겁니다.”

‘주교실,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

“예, 신관님. 그렇지 않아도 저희가 배신자를 주교실로 친히 호송 중이지 않습니까.”

앞선 남자의 대답에 리븐이 다시 외쳤다.

“전 주교실로 갈 건데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입니까? 전 혼자 가면 됩니다. 할 일이 그렇게 없습니까?”

가면 둘이서 리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이에게는 리븐의 말이 미친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따라오다뇨, 신관님. 배신하신 분을 호송 중이지 않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님께 조용히 갑시다.”

그리 대답한 제일 앞서가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이 늦었으니 신도님들께서는 각자 돌아가 일 보십쇼. 배신자 신관님께서 우리를 할 일 없는 사람들 취급하지 않습니까? 주교님께 호송하는 일은 저와 이 사람이 하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양팔을 잡힌 리븐이 나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세요.’

다른 동물 가면들이 쳐다보지 않는 틈을 타, 리븐은 입 모양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저는 주교실로 갈 테니 이따 야간 예배 시간에들 봅시다. 아, 그 총은 이리 주시고요. 제가 무기 보관소에 잘 가져다 두겠습니다.”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권총을 넘기자, 남자는 리븐을 끌고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길게 뻗은 복도로 사라지는 리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