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벨.”
가면을 손에 들고 날 바라보는 사람 옆에서, 보라색 토끼 가면 또한 제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그 둘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벨, 얼굴이 왜 이래요. 무슨 일이에요.”
“…….”
“남편은…… 캐드 대령님은 어디 계시고 벨 혼자…….”
손에 들려 있던 총이 툭 땅으로 떨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벨. 잘…… 잘 살아 있을 줄 알았다니까.”
플로라 할머니가 나를 품에 안았다.
내 귀 정도까지 오는 아담한 키를 가진 그녀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내 등을 토닥이다 쓸어내리다가를 반복했다.
할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자,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찔렀다.
“벨.”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른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 ‘만나서 반갑네.’ 하는 푸근한 미소만 짓고 계실 뿐이었다.
‘살아 계셨구나.’
두 분이 잘 지내고 계시길 늘 바라고 믿어왔지만, 눈앞에서 실물로 두 분의 생존을 확인하니 마음이 너무나 반갑고 벅찼다.
그리고 내가 방금 잃어버린 아이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신의 뺨으로 떨어진 눈물방울을 본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나를 살폈다.
“뭔가 쌓인 얘기가 있구나. 그래요, 많을 거야. 다 해요. 괜찮아……. 벨이 하는 얘기라면 밤새 들어줄게요.”
그녀가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
벨과 캐드 대령 커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점심.
플로라는 벨이 채워준 식료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창고 선반을 바라보았다.
‘이걸 다 먹을 수가 있으려나.’
운 좋게 약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플로라와 세바스찬 둘이서 아주 오래오래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플로라, 왜 멍하니 선반을 쳐다보고 있어?”
창고에서 사건이 있었던 직후, 플로라가 아주 가까운 곳이라 할지라도 밖을 나설 때면 늘 세바스찬이 따라붙었다.
지금도 창고에서, 혹 근처에 지나가는 이가 있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던 세바스찬이, 창고로 들어간 플로라가 한동안 말이 없자 들어와 물은 것이었다.
플로라는 손에 통조림을 한 개 쥐고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세바스찬.”
“응?”
“우리 떠날까?”
“응?”
아내에게서 흘러나온 의외의 말에 세바스찬은 그답지 않게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통조림 말이야, 차에 잔뜩 싣고 달리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갑자기 왜…….”
사실 자신들의 작은 역사가 있는 이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세바스찬보다는 플로라 쪽이었다.
“세나…… 우리 하나뿐인 손녀.”
“…….”
“너무 보고 싶지 않아?”
“그걸 말이라고 해.”
그리 대답하며 세바스찬은 가만히 서서 그리움에 잠긴 플로라에게 다가가 자기 아내의 작은 머리를 제 가슴에 품었다.
“이제까지 잘 참아왔잖아. 그랬던 거 아니었어?”
“응, 그랬는데……. 이게 다 벨 때문이야.”
“응? 벨 때문이라니.”
“…….”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지만 이내 세바스찬은 플로라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이 보고 싶구나.”
“응.”
손녀를 못 본 지 3년쯤.
아마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잊으려 노력하면서 지내왔는데 말이다.
손녀와 똑 닮은 벨을 봐서 그러한가.
벨이 떠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지금, 플로라는 손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리고 그건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괜히 서로를 더 힘들게 만들까 봐 둘은 내색하지 않고 꾹 참고 있었는데, 이상한 순간에 터져버린 것이다.
창고에서 벨이 선물로 주고 간 물건들을 물끄러미 보던 이 순간에 말이다.
“갈 수 있겠어? 어마어마하게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면서.”
세바스찬의 물음에 플로라는 ‘맞지, 나 집 엄청 좋아하지.’ 하면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플로라는 평생을 집순이로 살았다.
남들은 넓은 대륙을, 또는 바다 건너까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멋진 일, 희한한 일 겪는 걸 좋아한다고들 하던데.
플로라는 아니었다. 그녀는 대단한 집순이였다.
“세바스찬, 나는 젊었을 적부터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까.”
“근데.”
“가자…… 개고생하러.”
플로라의 대답에 이번엔 세바스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세바스찬, 미안해.”
“뭐가 미안해.”
플로라는 손안에 든 통조림을 만지작만지작했다.
“캐드 대령님이 함께 가잘 때 갔으면 오죽 좋아?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이럴 거면 뭐 하러…….”
“됐어, 지나간 일이야.”
세바스찬은 조금 시무룩해진 플로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졌다.
“나는 말이지, 이렇게 떠날 용기를 내준 것만으로도 당신이 고마워.”
플로라는 남편의 따듯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면서도 자꾸만 의기소침해지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근데 말이야, 난 그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해.”
“따로 출발하는 일이? 다행이랄 것까진 없는데?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우린 늙었고……. 벨이랑 캐드 대령님이 함께 가잘 때 따라갔으면 우린 좋았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잖아. 그 둘한테 짐이 됐을지는.”
“어휴.”
자학을 즐기는 제 아내를 향해 세바스찬은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세바스찬은 눈이 아주 세모꼴이 되어 소리쳤다.
“그런 소리 할 거면 그만하고 짐이나 싸!”
“응…….”
“월월!”
타이밍 좋게 몽돌이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와 두 사람의 다리 사이를 지나다니며 애교 부리는 자신들의 강아지를 향해 플로라가 무릎을 굽혔다.
“아이 우리 몽돌이~ 간식 먹고 기분이 좋은가 보네.”
“월월!”
사실 몽돌이는 이제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개로 치면 자신들과 동년배인 노견이었다.
플로라의 눈엔 항상 갓 태어난 새끼 때의 모습으로 보였지만.
애정으로 키워 어디 다친 곳 없이 건강하지만 그래도 노견은 노견.
늙은 개에겐 힘든 여행이 될 것이다.
“할머니는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몽돌이도 갈 수 있을까? 우리 몽돌이도 갈래?”
“월!”
우렁차게 짖는 제 말라뮤트의 등허리를 플로라는 살갑게 쓸어내렸다.
“너한테도 나한테도 마지막 여행이 되겠다.”
❅
나는 플로라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시 벽돌집으로 들어왔다.
총알 세례가 퍼부어진 집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그렇게 헤어지게 돼서 너무 아쉬웠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살아 계신 모습을 직접 눈으로 다시 보니 너무 좋고…….”
어디서 말을 끊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쉼 없이 말을 해대는 나를, 곁에 앉은 두 분은 차분히 바라봐주었다.
“정말 너무 좋은데요. 근데 지금 저는 저와 함께 있던 아이가요, 아이가…… 애런이, 걔가 애런이라는 앤데…….”
“벨.”
플로라 할머니가 내 손을 꼭 맞잡았다.
“벨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벨 편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요. 괜찮아.”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따스했다.
아이라는 말에 세바스찬 할아버지는 겉옷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벨이 말하는 아이가 혹시 이 아이인가?”
“네, 네. 그 아이요.”
“이게 어떻게 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세바스찬 할아버지는 보좌주교라 불렀던 신관을 돌아보았다.
신관이란 남자의 옆에는, 가면을 쓰고 있던 이들이 이제는 가면을 벗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서로를 들여다보는 얼굴들엔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할아버지.”
“얘기해요, 벨.”
“도대체 가면을 쓴 자들은 뭐고, 왜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여기에 가면을 쓰고 나타난 건지 얘기해 주실래요. 그리고 어디로 가야 애를 데려간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는지도요.”
“우리는…….”
나는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죄송해요. 저 급해요. 짧게요. 저 너무 급해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입을 연 할아버지의 말을 이번엔 플로라 할머니가 잘라먹었다.
“이것만 확인하면 돼, 세바스찬. 그러니까 그 애는 벨이 계속 데리고 있던 애고 악신 같은 게 아니란 소리잖아?”
“악신? 우리 애런이요? 누가 그딴 소릴 했어요?!”
나는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일순 내게 모였던 시선이 슬그머니 신관 쪽으로 이동했다.
“보좌주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 아이 안에는 악신이 들었고 그래서 아이를 넘기면 그 대가로 낙원에 데려가 준다고요. 뭐야…… 아니었던 건가.”
양 갈래머리를 한 아이의 말이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중년 남자가 ‘조용히 해.’ 하며 아이를 다그쳤다.
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보좌주교님이 잘못 아셨을 리가 없잖아요. 저 여자 말이 진짜라는 보장 있어요? 누가 뭘로 보장할 건데요.”
‘이럴 시간이 없는데. 지금 당장 일어나서 아이가 납치된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때, 내 주머니 속에 든 총이 만져졌다.
불쑥 그런 생각이 올라왔다, 해선 안 되는 생각이 말이다.
‘…죽일까.’
계속 시간만 잡아먹도록 헛소리 지껄이는 것들을 다 쏴 죽이고 여길 떠나면 빠르고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애가 뭐였든 이제 상관없지 않아요? 저쪽한테 빼앗겼으니 이제 우린 거래할 수단을 잃은 건데.”
“근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리븐 님이 주교에겐 애를 찾지 못했다고 얘길 한 것으로 아는데요.”
“의심을 사서 뒤를 밟혔거나…….”
“…….”
“우리 중에 밀고자가 있다는 소리죠.”
밀고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입을 다문 사람들 사이로 서로를 의심하는 시선들이 빠르게 오갔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와중에도 리븐이란 신관은 내내 말이 없었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까 저 새끼가 주모자인 것 같은데 왜 말이 없지.
애런을 악신이니 뭐니 팔아넘겨도 되는 존재로 거짓을 꾸며내고 이자들을 선동해 애를 납치한 게 저 새끼라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그때까지도 안심하라는 듯 내 손을 꽉 쥐고 있던 플로라 할머니의 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
‘이 일의 주모자라면 적어도 애가 어디로 끌려갔을지 알겠네.’
그럼 실토하게 만들자. 실토하지 않으면? 죽여버리자.
몹쓸 새끼니까.
총을 꺼내 레버를 밀자 원통 모양의 탄약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 개의 실탄만이 장전되어 있었다.
‘아까 다 썼구나.’
[스킬 ‘자기연민(Lv.6)’이 발동합니다.]
스킬을 쓰자마자 비었던 탄약실에 실탄이 채워졌다.
그것만으론 모자랐는지 내 손에서 만들어진 금빛 총알들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총알과 함께 흘러내린 금색 빛 조각들은 바닥에 안개처럼 깔렸다가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어!? 어어.”
놀란 사람들은 몸을 웅크리거나 벽으로 가 붙었다.
‘다 찼다.’
멋대로 많은 양이 만들어진 총알 한 줌을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고 나는 앞에 앉은 금발의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철컥.
“애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