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우리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던 이들이 정원에 나와 있었다.
제일 먼저 내린 데일이 군인들에게 버스를 가득 채운 통조림을 창고로 실어 나를 것을 명했다.
“저렇게나 많이…….”
군인들이 통조림이 꽉꽉 들어찬 상자를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어 날랐다.
[희망감: 45 / 절망감: 57
⇒ 희망감: 45 / 절망감: 55]
‘하지만 절망감 2가 감소한 것 외엔 변동이 없군.’
절망감을 많이 감소시키기엔 오늘도 부족한 양인가?
그러나 조금씩 내려가는 절망감보다 더 큰 문제는 희망감이었다.
어제부터 희망감은 45라는 수치에서 움직이질 않고 있었으니까.
‘딱 한 번 움직였지. 데일이 살아 돌아왔다는 걸 이들이 알았을 때.’
또 그런 이벤트를 벌여야 하나?
하지만 통조림을 계속 만들어 채워주는 것과 지금 이곳에 없는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만드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희망…….’
“통조림 안 와?”
가만히 서서 사람들 머리 위에 뜬 수치들을 보고 있자, 앞서 나가던 데일이 돌아서서 날 불렀다.
“가요, 유부남.”
“유부남한테 혼나 볼래?”
“유부남이 싫으면 무정자남 어때요.”
“좋아, 좋다고.”
뭐가 좋다는 거지. 데일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앞서 나갔다.
그리고 쭉 중앙정원을 가로질러 별관으로 향했는데, 3층에 도착했을 때 아침에 본 금발 여성이 데일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캐드 대령님.”
서글픈 목소리로 여자가 데일을 불렀다.
어쩐지 난 긴장이 돼서, 데일의 방 앞에서 조금 떨어진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서 그쪽을 구경했다.
“벨은 데일이 유부남이길 바라나요. 아니면 무정자남이길 바라나요.”
밸런스 게임인가.
옆에 서서 같이 구경하는 레이스가 내게 선택지를 줬다.
내 세계로 오기도 전에 벌써 밸런스 게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레이스는 저쪽으로 넘어가서도 분명 적응을 잘 할 것 같았다.
“음, 둘 다 아니길 원하지만 골라야 한다면…….”
“네, 골라야 한다면.”
“무정자남이요.”
“왜요?”
“책임감 없는 씨앗을 자주 뿌리는 사람은 무정자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레이스는 내 대답만 쏙 듣고 자신은 말을 아꼈다.
“레이스는요? 그쪽 대답도 궁금한데 말해줄래요?”
“저는 유부남이 되길 바라죠.”
“왜죠?”
“왜냐하면…….”
레이스는 방문 앞에서 여자를 치우려는 데일과 치워지지 않으려 애쓰는 여자의 실랑이를 보며 대답했다.
“만약 벨이 데일을 좋아한다면 그쪽 세계로 넘어가지 않을 확률이 생겨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럴 경우를 대비해 데일이 유부남이 되어준다면 좋은 일이죠.”
“오…….”
레이스는 무슨 상황이든 자기 목적을 대입해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혹시 그렇다면 레이스는 이런 식으로도 생각해 봤을까?
“그럼 레이스는 내가 그쪽을 좋아하게 되길 바라나요?”
“그거야말로 더 바랄 것 없는 상황이죠. 좋아하는 사람과는 누구든 함께하고 싶어 하니까요.”
이분 좀 뻔뻔한 게, 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저런 소릴 하니까…….
“벨!”
그때, 데일이 나를 찾았다.
“와, 빨리!”
나는 데일 쪽으로 발을 옮기며 레이스를 돌아봤다.
“레이스는 어떨 때 행복해요?”
그러자 오늘 내내 무표정하던 그가 눈썹을 조금 치켜올렸다.
“글쎄요.”
“…….”
딱히 명쾌한 대답을 주리란 기대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발을 돌렸다.
데일은 다시 그 여자와 옥신각신 중이었다.
“모라, 이 아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캐드 대령님, 이 아이는 대령님의…….”
“모라는 제가 만만합니까? 내가 화가 났을 때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요? 그렇게 만들지 말아요.”
“…….”
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분위기인데.
오래서 가긴 갔지만 둘 사이에 낄 생각은 들지 않아 멀찍이 떨어져 있었더니.
“오라니까, 좀.”
데일이 다가와 날 사건의 방문 앞으로 끌고 갔다.
“봐.”
“무엇을?”
“모라, 아이 얼굴 좀 보여줄래요.”
금발 여자의 이름이 모라인가 보다. 모라는 데일의 눈치를 보더니,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안아 든 아기 포대기를 내 쪽으로 열어주었다.
‘아기 얼굴을 내가 본다고 뭐, 헉!’
“…….”
“네가 아까 빼닮았다고 했지?”
왜 그렇게 데일이 당당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데일과 같은 은발에 파란 눈이었지만 아이는…….
‘신의 미움을 사고 만 것이다.’
갓난아이에게 이런 말 하기 미안했지만 정말 못생긴 얼굴이었다. 데일더러 애 아빠라고 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나는 발끝을 올려 남자의 귀를 끌어당겨 속삭였다.
“의심해서 미안해요.”
“이제라도 알면 됐어.”
❅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가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데일이 워낙 강경하게 부인해서 그런가.
여자가 여전히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음에도 다들 관심이 없었다.
왜 아이의 아빠로 데일을 주장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긴 했지만 내 관심도 곧 식고 말았다.
진전이 없는 세 번째 메인 퀘스트 때문이었다.
[희망감: 45 / 절망감: 50]
이제까지 했던 퀘스트 중 가장 빨리 끝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허공에 뜬 수치를 보다 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에즈라에게 물었다.
“에즈라.”
“엉.”
“절망에 빠졌다면 거기서 어떻게 나와?”
“절망으로 빠트린 문제가 해결되면 나올 수 있겠지.”
그야 여기 있는 모두를 최후의 낙원으로 보내줄 수 있다면 이 퀘스트는 그 자리에서 클리어되겠지만, 그건 당장은 불가능한 일인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린다……. 그럼 해결될 때까지 버틸 힘이 있어야겠네.”
“힘?”
힘은 잘 먹으면 생기는 거 아냐? 나는 여태껏 그 힘이 먹으면 생기는 힘인 줄 알았는데 정답을 비켜나간 것 같다.
“글쎄, 자력으론 잘 안 되고 누가 손 내밀어줘야 하던데.”
에즈라는 카펫 위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니까 절망이겠지? 혼자 쑥쑥 빠져나올 수 있으면 약간의 상심 정도일 거야.”
“응, 그런가 봐.”
나는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내 방 창가에 앉아 삭막한 타운하우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녁 집회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간 중앙정원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낮이라고 해서 삼삼오오 모여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사람들은 식량문제를 겪고 있던 탓에 매우 굶주린 상태였는데, 그날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을 비교해 보면 많이 다르지 않았다.
폭력적인 사람은 없었고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는 분위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인상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찾나 봐. 누군가 손 내밀어 줬으면 하는데 옆을 돌아보면 나한테 손을 내밀어줄 만큼 여유 있어 보이는 사람을 찾기 힘드니까. 신한테는 뭐 많이 빌고 부탁해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신…….”
에즈라의 말에 번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곳은 신과 신전을 믿는 세계관이야.’
물론 내 세계에도 신과 종교가 있고 그 신을 섬기는 장소가 있지만, 이곳의 신과는 느낌이 아주 다르다.
‘신의 보살핌이 보다 현시적으로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지.’
나는 창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그리고 애런도 벌떡 일어났다.
“왜 일어났어? 애런 악몽 꿨어?”
아이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제 인중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니, 악몽 안 꿨는데 그냥 깼어.”
“잘 깼어. 나가자.”
“응?”
“어차피 애런 혼자 두고 나갈 수도 없어서 깨울 생각이었거든.”
나는 일어나 침대에 앉은 애런에게 겉옷을 입혔다.
“에즈라, 너도 나 좀 도와줘.”
“때가 왔구나.”
에즈라는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외투에 넣어두었던 총을 빼 들었다.
“드디어……. 나 잘 할 수 있겠지?”
“가져가긴 하는데 누구 쏘러 가는 건 아니야.”
“그래?”
그녀는 아쉽단 표정으로 총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좌우 방으로 가 데일과 레이스도 불러냈다.
“아직 안 자죠? 나와봐요, 유부남.”
“레이스, 나 도와줘요.”
둘은 지체 없이 방에서 나왔는데, 데일은 못 보던 새 옷을 입고 있었고 레이스는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 좀 이따 가야 하나.”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흰 가운에 머리는 다 젖은 상태의 레이스를 보며 중얼거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도와달라면서요. 옷만 갈아입고 나올 테니 나도 데려가줘요. 도움을 드릴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요.”
“느끼한 새끼.”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레이스를 보며 데일이 뇌까렸다.
“도움을 드릴 기회는 무슨.”
“근데 데일은 못 보던 옷이네요?”
내 물음에 데일은 제 셔츠 깃을 한번 들었다 놓았다.
“여기 살던 이들이 입던 옷. 근데 뭘 할 생각이길래 이 인원이 다 가는 거야. 뭐든 나만 있으면 될 텐데.”
“데일이라도 넓은 연회장을 망보는 일을 혼자 하기는 어렵잖아요?”
“망?”
“네, 이곳에 신의 축복을 내릴 거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