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5초 안에 앞으로 와서 안 앉으면 버스를 뛰쳐나가서 너 요정이라고 다 불어버린다. 5, 4, 3…….”
나는 벌떡 일어나 운전자석의 우측 맨 앞자리에 가 앉았다.
이 새끼 아주 개치사한 유부남 새끼.
“너 어떻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믿냐?”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은 은색이고 아주 빼닮았던데.”
그걸로 이미 정황이 나왔는데 뭘 더 확인해?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빼닮았다고?”
“…….”
“너 걔 가까이서 보고 와서 나랑 다시 얘기해.”
“남의 애를 가까이서 들여다볼 일이 뭐가 있나. 그 시간에 내 새끼 얼굴이나 한 번 더 봐야지.”
“네 새끼가 있어?”
“애런 있잖아! 애런!!”
“허허.”
데일은 인생 다 산 할아버지처럼 자꾸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레이스가 버스로 올라탔다.
그는 좌석 현황을 대충 눈으로 훑더니 내 옆자리에 와 앉았다.
“아, 데일.”
“…….”
“아내분이 데일이 다치지 않고 잘 다녀올 수 있도록 저한테 지켜달라 말씀하시던데요. 잘 지켜드리겠습니다.”
데일은 대꾸도 하지 않고 버스를 출발시켰다.
❅
침침한 건물 안, 복도를 걸어오는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끼익.
어느 문 앞에 멈춰 선 그가 문을 열자, 연구실로 보이는 방이 나왔다.
“실험체를 수거해 오라고 보낸 각성자가 둘 다 연락 두절이라는 게 사실이야?”
그 물음에, 부하로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저도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험체가 속한 무리에 염력 능력자가 있다는 증언도 사실일 수 있다는 소리군.”
일을 맡겼던 물리계 각성자가 호텔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리고 그 대상이 염력을 쓰는 이였다는 호텔 누군가의 증언을 들었을 때도 남자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으니까.
다만 실험체가 속한 무리에 그 정도 각성자는 해치울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판단하에, 이번에는 확실한 자들을 골라 보낸 것이었는데, 또 실패로 돌아가다니.
“그게 말이 되나? 마나를 다 끌어다 뭉쳐놓은 물건이 지금도 우리 옆에서 돌아가고 있는데.”
“그게……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흰 가운의 남자는 자기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말하길 망설였다.
“소량의 마나가 흘러나간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남자가 딱딱거리며 바닥을 차던 구둣발을 멈췄다.
“워낙 거리가 멀어 정확한 수치나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흘러나간 건 맞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염력을 썼다는 정황과도 맞아떨어지고…….”
딱딱 소리를 내던 구둣발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흰 가운의 남자는 더 목소리를 떨었다.
“설계는 완벽합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구동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고요. 억!”
오들오들 떨며 말을 이어가는 흰 가운 남자의 정강이가 팍 걷어차였다.
“단 한 번도? 그 단 한 번의 문제도 있어서는 안 돼. 단 한 번 문제가 생기는 순간, 끝이란 걸 모르나?”
발로 차여 그만 바닥에 주저앉은 흰 가운은 정강이를 끌어안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럼요! 맞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안 되지요. 저희끼리 이 문제를 논의해 봤는데…….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동력구 자체의 문제는 아니란 겁니다. 이해하시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동력구에 문제가 있어서 마나를 소실한 게 아니라…… 그쪽에서 끌어당겼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소리에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비틀리는 입술을 보며, 또 정강이를 걷어차일까 흰 가운이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게 나쁜 소식으로만 볼 건 아닙니다! 저희가 논의를 해봤는데, 실험체가 각성 직전이라 각성하려고 마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구둣발이 다시 남자를 찼다.
“어억!”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잖아. 사실을 들고 와야지.”
양쪽 정강이를 다 까인 흰 가운은 눈을 질끈 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흰 가운을 보며 구둣발의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저쪽보다 먼저 데려와야 하는데.’
열차가 가는 방향이 수도였으니 그들의 목적지는 수도였을 것이고, 지금쯤 실험체는 수도에 들어갔을 것이다.
탁 트인 대지 위를 달리는 열차보다,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수도에서 숨어 이동할 실험체를 찾는 일이 훨씬 어렵다.
‘적임자로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그때 구둣발의 남자는 어떤 신관 한 명을 떠올렸다. 뛰어난 능력자임에도 제국의 많은 귀족들이 수도로 오는 것을 꺼려해 변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신관.
하지만 그가 낙원으로 오는 일을, 여전히 이곳의 모든 이는 꺼릴 것이 분명했다.
‘적임자긴 하지만 그자는 안 돼.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실험체를 빨리 되찾아와야만 했다.
어렵사리 빼앗아왔던 실험체가 놈들의 손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면, 놈들은 겨우 안정되어가는 현 상황을 또 들쑤시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다.
구둣발의 남자가 가볍게 흰 가운을 발로 찼다.
“그래서 다음 대책은?”
“예, 그게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흰 가운이 아픈 표정을 정리하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반드시 잡아올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엔 다수가 준비되어 있거든요.”
“다수?”
각성자를 둘 붙여도 실패하고 연락이 두절된 마당에 질보다 양을 택했단 말인가?
구둣발의 남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흰 가운은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
“성공할 겁니다.”
❅
우리는 버스를 타고 8구역의 외곽으로 가 버스에 통조림을 가득 채웠다.
중간에 다른 구역에서 총성이 들려와 놀라긴 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뜬금없이 데일의 아이라 주장하는 갓난아이와 여자가 나타나다니.’
이상하긴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바로 데일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책임지기 싫어해 쌀쌀맞게 굴지만, 일단 자기 사람이라 여기는 순간 데일은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남자였다.
‘책임감 없이 애 만들고 다닐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그래서 애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벨?”
내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는 레이스의 모습이 창문에 비쳤다.
“우리 데일한테 물어볼까요? 우리가 같이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을까요?”
“저는 안 궁금한데요.”
“그래요? 아쉽네.”
“내 애 아니라고 했다. 속닥거리지 마라. 차 밖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당당한 등짝으로 운전하는 데일을 쳐다봤다. 왜 저렇게 당당한 걸까.
책임감은 높지만 그간 저 자식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 보면 아니라고 단정 짓긴 어려웠다.
나한테 했던 그 가벼운 행동들을 다른 데서도 했다고 치면.
‘애가 몇 더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꼬마 데일은 첫사랑이니 어쩌구 그런 말을 했었지만.
‘몸과 마음이 각자 가는 놈인가 보지 뭐.’
“허허허.”
“왜 웃어요, 벨?”
“그냥요.”
“내 애 아니라고 했다.”
데일은 너무 당당하게 부정했다.
“데일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
그가 흘깃 나를 돌아봤다.
그간의 가벼운 행동과 언사로 보건대, 경험이 많을 것이고 그렇다면 뭔가 찔리는 상황들이 많을 텐데?
“확신할 만하니까 확신하지, 멍청아.”
“데일은 혹시 무정자증입니까?”
레이스의 질문에 나도 데일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그렇다면 저렇게 확신할 만하지, 음.
데일이 고개를 돌려 답을 기다리는 우리를 노려봤다.
“앞을 보고 운전해요, 무정자증. 차 사고로 죽긴 싫으니까.”
“벨도 그렇게 생각해요?”
“남의 정자 사정이야 난 잘 모르지만,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이유가 있을 테니까…… 레이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봐요. 대답을 기다려 보죠.”
“이 미X 자식들이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데일이 저렇게 욕까지 하며 화를 낼 때면 기분이 좋았다.
“정말 그렇다면 안타깝긴 하네요. 데일은 참 멋진 외모를 가졌는데 말이죠. 저런 외모가 대를 잇지 못하고 데일한테서 끊긴다는 거니까요.”
그런 말을 하는 레이스는 참 악의가 없어 보였다. 레이스야말로 감정이 아닌 필요와 목적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을 받고 애런을 납치하려 했던 것도,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도 모두.
‘사실 이런 놈이 제일 무서운 놈인 건데.’
“내가 확신하는 이유는…….”
별생각 없어 보이는 레이스의 옆얼굴을 쳐다보는데, 데일이 조심스럽게 답을 꺼내 들었다.
“그런 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됐어?”
“그런 일 자체가 없다는 게 뭐에요? 그러니까 정말 무정자증이라 애가 만들어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
운전자석에 달린 커다란 거울이, 눈을 질끈 감는 데일의 얼굴을 비췄다.
“너희 머저리들이냐.”
“왜 화를 내요. 그러니까 정말 무정자증이라서 화가 난 거예요, 아니면 무정자증이 아닌데 오해를 받아서 화가 난 거예요? 그런 일 자체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레이스는 알겠어요?”
레이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안 했다고. 그 여자랑.”
경험이 수십 번에 달할 것 같은데 사람을 헷갈리는 거 아닐까?
나는 좀 집요하고 치사하게 굴더라도 이 대화의 끝을 보고 싶었다.
“확실해요? 데일은 문란하잖아요.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순간의 실수로 생겼지만 이제부터 잘하면 만회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레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히려 끝까지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더 어른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빠앙.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를 들어서서 결국 데일은 경적을 울리고 말았다.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