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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89)화 (89/108)

89화

대충 짰는지 물기가 흐르는 머리를 하고 나왔길래, 수건으로 레이스의 머리를 말아서 감아줬다.

“들키면 안 되니까 조용히 가는 거예요?”

모두가 잠에 빠졌을 늦은 밤, 우리는 데일을 앞장세워 별관의 지하로 향했다.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경비를 서는 이들의 시야를 피해서 연회장까지 가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데일이 간단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아래로 가면 돼. 지하감옥으로.”

별관의 지하 1층과 연회장이 있는 본관의 지하 1층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현재는 텅 빈 지하감옥을 보며 통로를 빠져나갔다.

“데일, 저긴 뭐예요?”

별관에서 본관까지 난 일직선 통로를 걷고 있었는데, 통로 중간에 다른 방향으로 빠지는 길이 보였다.

길 끝은 문으로 막혀 있었는데,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녹슨 쇠사슬로 둘둘 감겨 있었다.

대답은 에즈라에게서 나왔다.

“저거 지하묘지인가 보다.”

“묘지?”

“수도 아래 오래된 지하묘지가 있다고 들었거든. 아주 오래전 사용하던 공간이라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아, 그렇구나. 가자.”

수도는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인가 보다. 저런 공간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여, 고생이 많아.”

“캐드 대령님!”

본관의 지하 1층으로 빠져나간 데일이, 그곳을 홀로 지키고 있던 군인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빼냈다.

두 남자의 소리가 멀리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 우리는 1층의 연회장으로 올라갔다.

텅 빈 연회장은 어둡고 깜깜했다.

“오아~”

아주 작게 소리 낸 애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적막한 연회장을 울렸다.

소리가 울리는 게 신기한지 이번에야말로 큰 목소리를 내려던 아이의 입을 내가 급하게 틀어막았다.

“쉿! 안 돼, 애런. 조용히 있기야 알겠지?”

“응, 알겠어.”

애런은 첫 임무를 부여받은 신입 병사처럼 눈을 빛냈다.

역시 내 새끼는 똑똑해. 두 번 말하게 하는 법이 없다.

연회장은 동‧서‧남쪽에 커다란 입구가 각각 나 있어 총 세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었다.

“에즈라는 저기, 레이스는 저기, 애런은 응, 거기.”

동‧서‧남쪽에 내가 일을 끝마칠 동안 망을 봐줄 경비를 각각 배치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후.”

예상을 하고 온 거지만 연회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여길 다 채울 수 있으려나.’

나는 한 개씩 종류별로 챙겨온 식량들을 가방에서 꺼내 발치에 내려놓았다.

통조림 공장을 발견했다는 핑계를 댄 덕분에 나눠줄 수 있는 건 통조림밖에 없었는데.

이젠 내가 가진 다양한 식량을 모두와 나눌 수 있었다.

[스킬 ‘자기연민(Lv.5)’이 발동합니다.]

연회장 공중으로 떠오른 종이 빛을 발했다. 발아래서 불기 시작한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였다.

종에서 하늘하늘 빛무리가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 내려앉은 빛무리는 내가 발치에 내려놓았던 식량이 되었다.

게이지의 푸른 부분이 쭉쭉 사라져 갔다.

‘아직 연회장의 반도 차질 않았는데.’

이 정도로는 신이 행한 일로 보이기에 한참 부족할 것이다.

연민의 적극적 루트를 개방했기 때문에 중간에 적극적으로 좀 만들어 달라 요청했는데 별 차이는 없었다.

이렇게 쓰는 게 아닌가.

[경고: 지금부터는 소모 자원으로 각성자의 생명력을 사용합니다.]

어김없이 경고창이 떴다. 하지만 나는 연회장을 꽉 채우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사용해.”

역시 생명력을 대가로 사용할 땐 느낌이 좀 다르다. 갑자기 훅 빠져나가는 기운에 순간 휘청했다.

그러자 누군가 나를 확 안아 들었다. 레이스였다.

“망보라니까.”

“걸리면 재울게요.”

“…….”

님이 재운다는 소리는 세상에서 삭제시킨다는 소리잖아요.

애먼 사람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구요.

어쨌거나 팔다리에 기운이 없는데 누군가가 몸을 들어주니 편안했다.

나는 훅훅 줄어드는 게이지와, 내 몸속에서 흘러나가는 금빛 물결을 바라보았다.

빛이 종아리의 반 정도 올라온 곳에서 출렁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금빛으로 흐르는 개울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게 했다.

“아름답네요.”

“네, 볼 때마다 예쁘긴 해요.”

오늘 유달리 예뻐 보이는 건 생명력을 많이 쏟아부은 탓일까.

어느새 애런도 에즈라도 보라는 망은 안 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점 잠이 몰려들었다.

[경고: 사용한 각성자의 생명력이 곧 절반에 도달합니다.]

“아직 부족해.”

연회장에 쌓여가는 식량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포인트를 얻어 게이지를 늘려놓은 덕에 만들어낸 식량의 양이 벌써 어마어마했지만, 연회장이 워낙 넓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채우자.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놀랍고 낯선 광경에 압도당하게 해주고 싶었다.

텅 비었던 연회장에 밤사이에 말도 안 되는 양의 식량이 쌓여 있어서, 이건 신의 축복이다, 우리는 신의 축복을 받았으니 문제없을 거야, 우리는 잘 해나갈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벨, 많이 피로해 보여요.”

품 안의 날 내려다보는 레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보여요? 네, 맞췄어요. 피곤해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벨은 왜 여기에 온 거예요? 여기가 어떻든 원래 세계로 넘어가면 그만 아닌가요.”

“그거야…….”

이렇게 해야 내가 돌아갈 방법이 열릴 테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리 답할 순 없었다.

“비밀이라니까요. 이건 그냥……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에요.”

게이지가 절반을 돌파했다.

조금만 더 쌓고 멈춰야지. 한 삼 분의 일 지점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쌓였다. 연회장 중간중간 작은 식량 언덕이 몇 개 생겨났으니까. 언덕 맨 위에 만들어진 사탕이, 만들어지자마자 식량 언덕을 타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 짓고 있었는데.

“비켜.”

따돌리고 있어야 할 군인은 어디다 버려두고 여기에 왔을까.

데일이 무서운 눈길로 날 내려다봤다.

레이스는 군말 없이 나를 데일에게 넘겼다.

“이제 다 한 거지? 가자, 그만하고.”

“조금만 더요.”

“나한테 시체를 들고 나가라는 소리야?”

그때, 게이지가 삼 분의 일 지점에 도달했다.

보자마자 속으로 ‘여기까지.’라고 외쳤다.

‘와, 진짜 많이 쌓였어. 이 정도면 놀라겠지.’

물에 잠긴 것처럼, 식량으로 잠겨버린 연회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너무나 졸음이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데일이 나를 안고 식량 더미 위를 걸어 나갔다.

그에게 안긴 몸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딸랑.

그래서 종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데일의 품속에서 곯아떨어졌을 때였을 것이다.

“으으.”

눈을 떴을 때 나는 당연히 다음 날 아침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어났냐?”

“얼마나 잤어요, 저?”

“하루를 꼬박. 장례식 준비할 뻔했다.”

“장례식이라니 끔찍한 소리 때려치워요. 그럼 오늘이…….”

“12월 20일.”

24시간을 넘게 자버렸구나. 눈을 뜨니 다다음 날이 되어 있었다.

“으, 많이 잤는데도 나른하네.”

어차피 많이 잔 거 조금 더 잔다고 문제될 거 있나, 이불 속으로 속으로 파고드는데 데일이 이불을 확 젖혔다.

“왜 이러세요, 유부남.”

“그 유부남 소리 좀 작작해라. 일어나기 힘들어?”

“힘들진 않은데 일어나기 싫어요, 더 잘래요.”

“그럼 일어나.”

좀 전에는 이불을 못 덮게 젖히더니 이번에는 사람을 이불로 둘둘 말았다.

나는 이불로 말리며 소릴 질렀다.

“아, 왜……!”

싫다는 사람을 데일은 기어이 안아 올렸다. 둘둘 말린 나를 안고서 데일은 별관을 나섰다. 볼에 닿는 아침의 찬 바람이 싫지 않았다.

“아니, 어디 가요, 유부남.”

“일 저질러 놨으면 봐야 할 거 아냐.”

데일에게 애벌레처럼 안겨서 길을 가는데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다.

“캐드 대령님,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하나같이 웃는 얼굴들이길래 이불에 말린 내 모습이 웃겨서 그런 줄 알았다.

꼬물꼬물 말린 이불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는데, 데일이 내 뒷목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거북이냐, 어딜 들어가.”

“하.”

“봐.”

“뭘요.”

어느새 본관 연회장 앞에 당도해있었다.

“네가 만든 활기.”

연회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활기찼다.

“내려줘요.”

이불을 칭칭 감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푹 자는 동안에도 다 정리하기엔 많은 양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만든 식량의 일부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부분은 이곳에 남아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정리가 끝난 한쪽에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제 아침 연회장에 들어온 이가 네가 만들어놓은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했고 모두에게 알렸어. 그리고 다 같이 모여서 구경한 후에 한입이 되어 말했어. 신이 기적을 행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고. 신의 은총이 내렸으니 곧 괜찮아질 거라고, 우리 모두 희망을 잃어버리지 말자고.”

“…….”

“네가 바란 게 이 모습이었던 거지?”

너무나 충만한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뜬 수치들은 하나같이 크게 변화해 있었다.

높아진 희망과 낮아진 절망.

꼭 수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들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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