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희망감: 51 / 절망감: 69]
아론의 뒤로 어제 데일을 마중 나왔던 군인 중 두 명의 모습도 보였다.
“형수님, 잘 주무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형수님!”
“아예, 형수님은 아니지만 안녕은 해요.”
나는 대충 눈 맞춰 인사하며 젖은 수건을 목에 둘렀다.
“형수님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캐드 대령님이…….”
아론은 당황한 얼굴을 지우고, 말하는 제 동료의 배를 가볍게 가격했다.
“혹시 밤사이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예, 잘 잤는걸요.”
“벨, 수건이 없어.”
아래에서 옷깃을 당기는 느낌에 내려다보니, 애런이 얼굴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수건이 없어? 새 수건 안에 있을 텐데.”
“모르겠어.”
“그래? 그럼 이걸로 닦을까?”
“응.”
쭈그려 앉아 목에 걸었던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고 있으니 아론이 급히 제 동료들에게 명했다.
“가서 새 수건 가져다 드려.”
그러자 군인 둘은 끝까지 형수님이 아니시라니, 하며 모습을 감췄다.
아이의 얼굴을 닦고 일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넌 안 가냐.
“다 닦아서 수건 필요 없는데요.”
“그게…….”
내 옆방은 데일의 방이었다. 아론이 옆방을 흘깃 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가 불편하십니까?”
“불편이요?”
아직 친해지기도 전인데 불편할 게 뭐가 있을까. 뭔가 불편함을 느낄 만큼의 교류도 없었는데.
“밤사이에도 불편한 점은 없었고,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딱히 불편한 점은 없는데요.”
“그렇다면 통조림 공장에 가서 통조림을 옮겨오는 일에 저희가 함께 가서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대령님께서 저희를 제외하고 세 분만 간다고 하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데일이 나와 레이스하고만 가겠다고 말한 것은, 내가 우리 외에는 데일이 친한 그 누구라 하더라도 내 능력이 알려지길 원치 않는다고 말해놨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아론은, 유일한 여자인 내가 자신들을 불편해해서 데일이 그리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고.
‘같이 가면 들통나는데.’
아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다 보면 금방 전체에 알려지기 십상이다.
“네, 사실 불편해요.”
“예?”
1분도 안 돼서 말을 바꾸자, 아론이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불편해요. 아직 친하지 않아서 함께 이동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 명이서도 충분히 옮길 수 있구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데일과 저는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닌데 자꾸 형수님 형수님 소리 듣는 것도 불편해요.”
“이해합니다. 제가 알아듣게 얘길 해놓겠습니다.”
“아론 중령님!”
그때, 아론의 명을 받고 새 수건을 가지러 갔던 이가 되돌아왔다.
별관 3층 계단을 뛰어오르며 그가 나를 또 형수님으로 부르는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론 중령님! 형수님이, 형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아까 말씀을 하셨는데도 또!”
온화한 표정 안에서 언뜻언뜻 놀라는 기색만을 내비쳤던 아론이 제 부하를 향해 인상을 확 구기며 크게 호통쳤다.
오, 화내야 할 땐 화낼 줄 아는 사람이다.
“저 그게 아니라…… 진짜 형수님, 새로운 형수님이 나타나셨지 말입니다. 저분 얘기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 그게…….”
“데일 지금 어디 있어요?”
나는 옆방 문을 확 열어젖혔다. 방이 비어 있었다.
“대령님께선 1층에.”
나는 난간에 몸을 대고,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뚫려 있는 나선형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익숙한 데일의 흰 정수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노란 정수리, 금발의 여자가 서 있었는데 여자가 품 안에 소중히 안아 들고 있는 저것은…….
“캐드 대령님께 2세가 생긴 것 같은데, 2세가 생겼으면 축하할 일인데 이거 축하할 일 맞습니까? 아론 중령님, 저는 많이 혼란스럽지 말입니다.”
‘2세라니, 데일의 애라고?’
금발 여자가 안고 있는 포대기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눈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포대기 속 갓난아이는 분명 데일과 똑같은 은색 머리칼에…… 오 XX.
“아, 놀라서 그만 잊어버렸지 말입니다. 수건, 수건 드려야지.”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 내게 수건을 건넸다. 지금 새 수건이 문제냐.
“아 네, 주세요. 어?”
계단 난간에 기대 있다가 수건을 받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 내 목에 걸려 있던 젖은 수건이 그만 아래로 흘러내린 것이다.
-풀썩.
‘왜 하필.’
흰 수건이 떨어진 장소는 참으로 작위적이었다.
“응애애애애!”
잠들어 있던 갓난아이의 얼굴 위로 떨어졌으니까.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별관이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데일과 금발 여자가 위를 올려다봤다.
나는 둘의 시선을 무시하고 우는 아이를 쳐다봤다. 금발 여자가 방금 아이의 얼굴에서 수건을 치웠으니까.
응애, 응애 열심히 울어대던 갓난아이가 내 무시무시한 시선을 느꼈는지 훌쩍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드디어 나를 발견하고 내게 눈동자를 맞췄는데.
‘눈이 파랗네. 아주 파래, XX.’
빛을 가득 머금으면 옅은 하늘색이 되고, 어둠 속에선 시린 파란색으로 보이는 데일의 눈동자와 똑 닮은 색이었다.
“허허.”
그러니까 네가 애가…… 있었다고?
“허허허허.”
막장 드라마를 볼 때, 너무 어이없는 전개가 펼쳐지면 터져 나오곤 하던 웃음소리가 내게서 흘러나왔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한 차례 지나가고, 이제는 내 헛웃음 소리가 별관에 울려 퍼졌다.
“어~ 데일, 애가 있었네요?”
“…….”
“축하……해요?”
데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침을 꿀떡 삼키는 남자의 목젖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시력이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었던가.
나는 건네받은 새 수건을 다시 목에 두르며 내게 수건을 가져다준 사람을 돌아봤다.
“아주 고마워요. 형수님도 아닌 사람한테 수건을 다 챙겨다 주시다니 그쪽은 도대체 얼마나 친절하신 분인지 참, 하하.”
남자는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죄송한 일이지 말입니다. 제가 그만 멋대로 착각을 해서……. 그래도 수건을 가져다드린 건 형수님이고 아니고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형수님께 언제든, 아, 아니, 아니셔도…….”
“또, 또!”
나는 화가 나서 목에 둘렀던 수건을 손에 고쳐 들었다.
수건으로 뭐라도 패고 싶었다.
나는 앞에 있는 사람이나, 저 아래 있는 은발 놈 대신 계단 난간을 수건으로 팡팡 쳤다.
“또 형수님이라고 부른다! 제가 말했죠? 저 형수님 아니라고. 이제 확실히 아셨지 않나요? 아셨죠, 제가 형수님 아닌 거? 그러니까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자기들 멋대로 형수님이네 마네 그렇게 부르고 그래요오!! 어?”
“헝 그게…….”
[‘요정인데 입이 험해요.’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칭호 능력치: 불우이웃이 아닌 대상에게 험한 말로 정신계 공격을 가할 시 데미지가 약간 상승합니다.]
시스템 창이 뜨건 말건 나는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가 한껏 움츠러든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많이 언짢으시면 오늘 통조림 가지러 다녀오는 일은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별관에서 편히 쉬시면서…….”
“내가 언짢아요?”
“예?”
“나는 언짢지 않아요.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닌데 멋대로 부르니까 그걸 정정해 달라고 말했을 뿐이고, 제가 언짢을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잘못 알고 형수님으로 불러서 기분을 언짢게…….”
“그리고! 내가 간다고 했잖아요! 내가 아까 간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잖아요. 난 내 일은 내가 해요! 아니, 근데 왜 사람 말을 두 번 하게 하나아? 어? 왜 그래요?”
“힝.”
[희망감: 41 / 절망감: 36]
남자의 머리 위 절망 수치가 곧 변화하려는 듯 깜빡거렸다.
그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흠흠, 제 일이니까 제가 가요. 그리고 수건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뒤에서 문이 열렸다. 에즈라였다.
“아, 왜 이렇게 시끄러워.”
폭주하는 나를 피해 멀리 도망가 있던 애런이 에즈라를 향해 손짓했다.
“에즈라 누나.”
“응?”
“데일 형이 아빠가 됐어.”
“어??”
그러자 에즈라는 걸어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고는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방 안으로 사라졌다.
“어…… 이거 이래도 되나.”
❅
버스에 올라타려고 보니 데일이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갑게 그를 스쳐 지나가는데 그가 덥석 내 손목을 잡았다.
“얼굴이 왜 그럴까.”
“유부남은 다른 여자 얼굴 빤히 보는 거 아니에요.”
“푸핫.”
‘웃어?’
폭소를 터트리는 남자를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웃음이 나와?
“어딜 아내 외 여자의 손목을 잡아요. 유부남이.”
나는 잡힌 손목을 거칠게 빼내 계속 큭큭거리는 데일을 지나쳐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의 어중간한 중간 자리의 창가 쪽에 자릴 잡았다.
복도 쪽에 앉으면 저 자식의 뒤통수가 잘 보인다.
‘동료들과 합류?’
그 여자랑 자기 애를 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 말은 쏙 빼고 동료들과 합류해야 한단 말로 돌려서 해? 솔직히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숨어서 구시렁대냐.”
“…….”
“숨어서 하지 말고 앞에 와서 보이는 데 앉아서 해라.”
그러거나 말거나 대꾸도 안 하고 버스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레이스는 왜 안 오는 거야?
데일은 이곳에 와서 묶어두었던 그를 풀어주었다. 완전히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고는 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통조림.”
“…….”
“앞으로 와서 앉아.”
“어디서 유부남이 앉으라 마라예요. 내가 여기 앉겠다는데. 댁 닮은 갓난아이나 앞에 앉혀요.”
좌석 너머로 빼꼼 올려다보니 그는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XX, 짜증 나.’
당연한 거다. 얼마 전에 나 좋다던 놈이, 물론 그게 현실은 아니었지만 실은 애 아빠였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기분이 더럽지 않으면 더 이상한 거지.
“통조림, 섭섭하게 이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