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흰 가운을 입은 육중한 남자가 올라서자,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침대가 푹푹 꺼졌다.
“으, 저쪽 방으로 꺼져줄래요?”
“얼굴 보고 싶었다며. 보여드리러 오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그 말이냐고요.”
“애런은.”
“…….”
늘 느끼는 건데, 이 자식 자연스럽게 사람 말 씹어 넘기는 거 정말 잘한다.
나는 내 오른쪽 옆구리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버린 아이를 가리켰다.
애런을 확인한 남자가 그대로 자리에 누워 버렸다.
내가 발랐던 로션 향이 그에게서 훅 끼쳤다.
“저 방 가서 자요.”
“넌 자주 그렇게 누워 있더라. 벽에 다리 올리면 편한가?”
턱턱.
내가 누운 모양새를 따라 그가 옆에 누워 벽에 다리를 기댔다.
“다리 부었을 때 이렇게 하면 좋아요.”
“아, 그래. 확실히 넌 잘 붓더라. 아침마다 모르는 여잔 줄 알고 놀라잖냐.”
“야.”
“…….”
그 이후로 옆에 누운 놈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곤히 잠든 애런이 내는 새근대는 숨소리만이 주기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내렸다.
아이의 까만 정수리가 보였다. 그리고 작은 귀, 통통한 볼, 여린 숨이 들고 날 때마다 조금씩 들썩이는 몸.
나는 플로라 할머니가 준 파자마를 입고 있었는데, 애런은 내가 어디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지, 파자마를 작은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귀여워.’
왜 자면서도 이렇게 손에 힘을 콱 주고 있는 건데.
손끝으로 손등을 콕 찌르자, 놀라 움찔한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허리 오른쪽으로 더 파고들었다.
‘히히, 반응 재밌다. 귀여워.’
“통조림.”
“…….”
“자는 애 데리고 장난치지 마라.”
“…….”
자기는 뭐 한 번도 장난 안 친 것처럼 말하네.
그 말을 끝으로 또 말이 없다.
아니, 말도 안 하면서 장난도 치지 말라 그러냐. 난 침묵 싫은데. 그럼 옆방 가서 자든가 자지도 않으면서 말은 없고 어? 에휴, 몰라.
나는 내 발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꼬물거리는 발가락의 맨발톱이 심심하게 느껴졌다.
‘페디하고 싶다.’
애런한테도 해주면 완전 신기해하면서 좋아할 것 같은데.
그 동그랗고 새카만 눈망울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는 분명히…….
“히히.”
역시 애런을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온다.
근데 현판 아니면 페디큐어 있는 세계관이 있던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내 망할 기억력…….
기억을 더듬는데 나란히, 아니 내 발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자리한 남자의 발이 보였다.
‘크다.’
발 사이즈가 적어도 280은 되겠는데? 아니지. 280이 뭐야, 300은 되지 않을까. 우리 동네로 오면 운동화 사기 어렵겠는데.
저 정도면 페디큐어도 값 더 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건 아니구나. 발이 큰 거지 발톱은 비슷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것도 아니네.’
발 올리고 춤춘 적 있으니까. 그땐 자세히 보지 않아서 저렇게 큰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하긴, 사람 발을 딛고 올라서서 춤을 추는데 안정감이 있었으니 되게 큰 거지.
‘키 크면 발도 크다더니.’
맞구나. 이 자식 키가 한 180 후반에서 190 사이인 것 같으니, 맞지. 발도 저렇게 커야 밸런스가 맞겠다.
다리도 엄청 길던데.
키가 커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전체 키에서 다리가 차지하는 지분 자체가 많아 보였는데.
‘키 180 후반에 다리 길이는 얼마나 되는 거지?’
나도 모르게 생각을 따라 시선이 남자의 발에서 종아리로 내려갔다.
‘맨다리네? 그래 맨다리지. 근데 왜 맨다리지? 누워서 다리를 올리고 있으니 맨다리지. 잠깐만, 나도 누워서 다리를 올리고 있는데 맨다리가 아니잖아, 왜냐하면 나는 파자마를 입고 있으니까, 그럼 저놈은…….’
힉,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내려가던 시선을 급하게 거둬들였다.
깜박했다. 이 자식 노출증이었지. 어쩐지 하체가 시원해 보이더라.
데일은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저 새끼 속옷도 안 입었고 하체에 수건도 안 둘렀다에 내, 내, 내…….
‘어쨌든 노출증 환자다.’
뭘 걸지 않아도 돼, 걸 필요도 없이 노출증 맞으니까.
“큭, 크큭…… 표정 볼만하네.”
참는 기색도 없이 터트린 웃음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내게로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로 알려줄 필요 있냐?”
“내가 무슨 생각하는데요.”
“그런…… 생각?”
“…….”
얼굴까지 찡그려 웃는 노골적인 비웃음에, 나는 옆에 있던 커다란 베개를 집어 들어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아니, 강타하려 했는데 놈이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 피했다.
순발력 좋은 노출증 환자 새끼는…… 짜증이 난다.
“큭큭, 크크큭…….”
침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말아 웃어대는 데일의 등을 쳐다보며 말했다.
“웃는 건 자유인데, 베개에 파묻고 웃거나 나가서 웃거나 해줄래요? 애 깨니까?”
“우리 통조림이 애 걱정을 열심히 하네.”
“…….”
“아, 맞다. 너랑 나 전투조야. 배정은 오늘 끝났고 내일 알려줄 거라더군.”
역시 예상대로였다.
호텔에선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건 오늘 막 들어온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존자들의 주 식량원은 호텔 옆에 난 커다란 호수였다.
경계조와 낚시조 2팀으로 나눠 얼음낚시를 해 식량을 조달해 오는데, 자기 몫의 일을 하지 않으면 생선도 없다고 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를 외부의 위협에 맞서 늘 삼엄히 호텔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경계조라면, 전투조는 가장 멀리 움직이는 조였다.
가장 최전선까지 나가고 능동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예상했고 의도한 결과였다. 불독이 데일의 움직임을 잘 봤다면 유용하게 써먹으려 할 것이라 생각했지.
“데일, 그런데요. 난 전투조 말고 다른 거 시켜달라고 할게요. 데일은 그대로 전투조에 남고.”
그가 내 허리에 달라붙은 작은 생명체를 쳐다봤다.
“애런 때문에?”
“네.”
전투조에서 활약해 빠르게 불독의 신임을 살 생각만 하다가 애런을 놓친 거다.
나랑 데일 모두 호텔 밖으로 나가버리면 애런은…….
‘호텔 안에서 해야 할 일도 생겼고.’
“데일, 낙원에서 비행선을 타고 왔었고 지금은 돌아간 상태라면, 불독이 물건을 찾았을 때 낙원 측 사람들에게 어떻게 연락하죠?”
“마나 송신기가 있을 거야. 아마 불독이 지니고 있겠지.”
우리가 물건을 먼저 찾고, 그 송신기만 있으면 낙원 측과 직접 거래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불독이 우리에게 티켓을 나눠줄까? 아니, 물건을 찾는데 드는 노동력으로 쓰고 버리겠지.
만약 정말 낙원행 티켓이 있고, 불독을 포함한 소수에게 티켓이 주어질 수 있어도 그 대상이 우리는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까 물건을 먼저 찾아서 낙원 측과 직접 연락해야 한다는 건 차선책이 아니다. 유일한 방법이지.
‘데일은 밖에서 정보를 모으고 나는 안에서 할 일을 하면 돼. 송신기를 찾아보자.’
“아무튼…… 잘 부탁해요.”
“새삼스럽게 부탁은……. 어차피 네가 있었어도 전투는 나 혼자 했을 텐데, 걸리적거리기나 했겠지.”
“…….”
내가 얻은 ‘요정인데 입이 험해요.’ 칭호 능력이 불우이웃이 아닌 대상 한정이라는 게 매우 아쉬웠다.
사실 가장 타격을 입히고 싶은 놈은 내 옆에 있는데 어째서…….
“통조림.”
데일은 침대 끝에 누운 채 이쪽을 바라봤다.
“안 물어보냐, 이 시간까지 네 보호자가 뭘 하다 들어왔는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남자의 파란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이미 스칼렛한테 물어서 대충은 알고 있는데.
‘물어보기 싫어.’
그래도 물어보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는 잘 열리지 않는 입을 어렵게 뗐다.
“뭘 하다 들어왔는데요.”
빛이 적은 어두운 방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인 그가 대답했다.
“사람을 셋 죽였어.”
“…….”
“헨리가 낮에 벌인 일이 좀 꼬여서 수습해야 했거든.”
그가 감정을 배제한 담백한 톤의 목소리로 사실을 전하길래, 나도 별것 아닌 일을 얘기하듯 평이한 목소리로 응했다.
“아…… 그랬구나, 앞으로는 미리 얘기해 줄래요? 강한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데, 가운밖에 안 입었을 걸 생각하니 옆을 볼 수가 없었다.
“낮에요. 스칼렛이랑 얘길 했는데 스칼렛이 말하길, 데일이 되게 멋진 사람이랬어요. 헨리가 태양처럼 여기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천장만 뚫어져라 보며 얘길 하는데, 침대 끝에서 거대한 흰 덩어리가 데구루루 굴러 다시 옆에 와 붙었다.
“그 두 사람이요, 헨리랑 스칼렛. 그 두 사람이랑 데일은 얼마나 된 사이에요?”
“음…… 5년쯤?”
옆에서 나와 같이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데일을 흘깃 훔쳐봤다가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5년…… 적지 않은 시간이네요.”
우리는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한 달도 안 됐지.’
아주 뻔하고 멍청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마른 입술을 축이다 그만 바보처럼 질문을 뱉어버렸다.
“그 두 사람이요, 소중한 사람들인 거죠? 데일의…….”
“어.”
조금의 망설이는 틈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아…….”
방금까지 편하게 쉬어지던 숨이 갑자기 어색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무슨 대답을 바라고서 저 질문을 했을까, 정말 바보 같네.
이상해.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겠는데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뭐요? 아.”
그가 문을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치는 바람에 그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파란 눈동자가 기대에 차 날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처럼 여긴다고 했다며,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냐고.”
“나는…….”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저 기대에 찬 눈동자가 실망으로 물들겠지. 난 그게 보고 싶었다.
“아니, 무슨 사람을 태양으로 생각해요. 더군다나 그쪽 같은 이상한 사람을. 황당해서 그냥 웃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얼굴을 찡그리겠지? 표정이 볼만하겠다, 생각했는데.
“넌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대답을 들은 데일은 너무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의 장면이라, 나는 그저 멍한 얼굴로 눈만 껌벅이다 고개를 돌렸다.
“왜 네가 이쪽을 자꾸 피하는 기분이 들까.”
“왼쪽에 노출증 환자가 누워 있는데 그쪽을 보고 싶겠어요?”
“누가 노출증이야, 입었는데.”
입었다고? 나도 모르게 그만 아래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