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낮에 물류보관소 다녀오는 길에 가져온 새 속옷을 챙겨 입은 모양이었다.
‘음, 입긴 입었네. 웬일이지.’
아니, 웬일이긴.
“저기요. 당연히 속옷은 입는 거구요. 원래 속옷도 남한테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 남한테 보여주는 건 바지. 예? 이런 걸 알려줘야 하나?”
“아~ 그렇구나?”
데일의 표정은 매우 뻔해 지루한 소리를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졸려요. 그만 그쪽 방으로 가요. 자게.”
졸려서 눈을 비비적거리자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침대에서 내려가 바닥을 딛고 선 그가 짧게 탄식했다.
‘또 왜…….’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했었나.”
“뭐래. 나 사랑한다고까지 이미 다 말했으니까 중복해서 말하지 말아요. 지겨우니까.”
“우리 통조림 기억력 좋네.”
그가 한쪽 무릎을 내 머리 곁에 올리고, 뒤집힌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너도 날 사랑한다고 대답했던가? 나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
“……후.”
와, 제발 잠 좀 자자. 그만 좀 괴롭혀라.
“예. 많이 사랑합니다. 사랑해욧! 사랑합니다!!”
그러자 남자의 뒤집힌 얼굴이 씩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네. 근데 왜 우리가 아직도 안 했지?”
“에이 XX, 진짜.”
잠 못 자게 고문하냐?
“가! 좀 가라고!”
내가 휘두른 베개를 가볍게 피하며 데일은 킬킬거렸다.
“그래, 자라.”
한참이나 킬킬거리던 그가 방을 나가고 방이 다시 적막을 되찾자, 나는 자는 애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안 깬 게 용하군.’
오늘 하루가 엄청 길었지. 그만큼 피곤해서 그런가.
한 번도 깨지 않은 걸 보면 깊이 잠들었나 보다. 나는 아이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드러난 이마가 볼록하고 뽀얗다.
-쪽.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나는 애런을 꼭 끌어안았다.
“그 두 사람이요, 소중한 사람들인 거죠? 데일의…….”
“어.”
망설임 없던 그 대답이 잠들기 전까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
빨리 자야지. 잠이 보약인데. 괜히 물어봤어, XX.
❅
-똑똑.
“열렸어요. 들어와요.”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 사이로 머리부터 빼꼼 내밀자, 날 반긴 건 크리스의 브론즈색 눈동자였다.
“어, 너구나? 들어와.”
“어, 응. 애런, 들어가자.”
주뼛거리는 애런의 등을 밀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닫고 나서 크리스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방문을 열었을 때 다른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제와 헤어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너 머리가…….”
“아직 손질하기 전이라 그래. 네가 생각보다 일찍 와버렸네.”
첫 만남 때 크리스의 헤어스타일은 앞머리를 과하게 부풀린 퐁파두르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앞머리가 이마 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덮머리가 훨씬 청순하네.
“전투조에서 다른 조로 바꾸고 싶다고?”
“어.”
“나 머리 만지면서 얘기해도 될까? 음, 거기 앉을래?”
나는 옆에 보이는 스툴에 앉은 후, 무릎 위로 애런을 올렸다. 무릎에 앉은 애런이 자연스럽게 내 목에 팔을 감아왔다.
거울 앞에 선 크리스는 선반 위에서 작고 납작한 통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돌렸다.
‘헤어왁스 같은 물건인가.’
손가락에 묻혀 비비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다.
허물없이 친한 사이였다면 ‘왜 머리를 올리는 거야? 넌 앞머리를 내리는 게 훨씬 매력 있는데, 내리는 건 어때?’ 정도의 제안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크리스와 올린 머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 막 알게 된 사이에 무슨 간섭이냐 싶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
“안 어울려?”
“어?”
“머리 말이야, 올리는 거.”
‘와, 나 표정을 너무 신경 안 쓰고 있었나 봐.’
다급하게 표정을 신경 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머리가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머리잖아.”
“풉.”
“…….”
“네가 보기에 이 머리는 나한테 잘 어울리는 머리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머리 같다는 말이네?”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못 알아 들어주길 기대하기엔, 내가 너무 말을 안 돌리고 해버렸구나.
머쓱해져 목덜미를 긁었다.
“어, 사실 그래. 안 친한 사이에 너무 내 취향을 드러냈네, 미안.”
“아냐, 괜찮아. 나도 알거든.”
크리스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거울 속 제 앞머리를 부풀렸다.
“벨.”
목에 매달려 귀에다 작게 속삭이는 애런 덕분에 나도 목소리를 낮췄다.
“응?”
“저 형, 머리가 바게트 같아.”
“어, 응…….”
속삭였다지만 거리가 바로 옆이었다.
졸지에 바게트 앞머리를 가지게 된 크리스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그, 그러게. 바게트처럼 멋지다. 그 말이지, 애런? 그치?”
“내 말을 이해 못 했구나, 벨?”
“푸하하핫.”
단호하게 부정하는 애런 때문에 입술을 깨물자, 시원하게 뿜어버리는 크리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손질이 다 끝난 모양인지, 그가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신경 쓰지 마. 애들은 솔직하잖아. 나 아이들 거침없이 말하는 거에 익숙하거든.”
“어? 어,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어른인데 나도 솔직해도 될까?”
“이번만?”
“응, 이번만 봐주는 거구나. 이해했어. 고마워.”
짙은 갈색 머리 아래로, 옅은 브론즈색 눈동자를 담은 눈꼬리가 선하게 휘었다.
“제대로 다시 인사할까? 우리 어제 인사하다가 끊겼잖아.”
어제 악수하려는 도중, 데일이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못 한 걸 말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반갑게 내미는 손에 내 손을 겹쳤다.
“진짜 손목이 가느다랗네.”
그 말에 흠칫 놀라 손을 빼자, 크리스는 한껏 미안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놀리려는 뜻은 아니었어! 나도 너 같거든. 그래서 그만…….”
“너 같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약해 보이잖아, 우리.”
“…….”
내게서 바로 동의가 돌아올 줄 알았나? 내가 말없이 빤히 얼굴을 쳐다보자 크리스는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그가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머리 이렇게 만지는 것도 사실 번거로운데 굳이 하는 이유가 약해 보이기 싫어서거든. 넌 아닌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크리스는 키가 나보다 약간 컸다. 이 세계 남자들의 평균 키가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평균보다 아래일 것 같다.
그리고 선도 곱다. 사실 저런 머리가 아니라 긴 가발을 씌워놓으면 여자라고 오해받기 좋을 것 같은 외모였다.
“그래서 어제 네가 한 말에 많이 공감됐거든.”
“쟤 말 틀린 거 하나 없잖아. 곱상한 놈이나 뭣같이 생겨먹은 놈이나 총 맞고 사는 놈 있어??”
어제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흐음, 이런 캐릭터였구나.’
“어디 볼까…….”
크리스가 기록부로 보이는 장부의 페이지를 몇 장 넘겼다.
“막내 때문에 옮기려는 거지?”
“응.”
“그럼 되도록 아이와 많이 붙어 있을 수 있어야겠네.”
“응. 있어?”
“어, 마침 결원 비슷한 상태인 조가 있어서, 돌보미조라고.”
품속의 애런을 들여다보자, 아이는 어느새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잠에 빠져 있었다.
“알겠어. 뭘 하면 되는데?”
그러자 환한 표정이 된 크리스가 목발을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안내해 줄게.”
따라오라며 일어서서 방을 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 위에 뜬 돌발 퀘스트를.
[돌발 퀘스트
대상: 크리스
내용: “사라지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니, 행방불명 시켜달라는 소린가? 아이 XX. 이건 패스다.
❅
[수집된 돌발 퀘스트
대상: 불독
내용: “물건을 찾아야 해. 그래야 낙원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수집된 돌발 퀘스트
대상: 스칼렛
내용: “남편을,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어.”
기한: 퀘스트 발견 시점부터 3일.]
[수집된 돌발 퀘스트
대상: 크리스
내용: “사라지고 싶다.”]
크리스를 뒤따르며 수집된 돌발 퀘스트를 쭉 살폈다.
일단 크리스 퀘는 없는 거로 치자. 저게 뭐냐. 왜 크리스의 퀘스트 내용이 저 모양인지는 둘째 치고, 내겐 사람을 사라지게 해줄 능력도 마음도 없다.
‘그럼 불독이랑 스칼렛 퀘를 해야 한단 소린데.’
혹여 있을지 모를 다른 퀘스틀 발견하기 전까지 우선순위는 일단 저 두 개다.
스칼렛 퀘스트야 내가 하고 싶은 퀘스트였지만 문제는 불독 퀘스트였다.
만약 낙원행 티켓이란 게 정말 있다면 물건을 불독에게 넘기는 게 아니라 직접 거래할 생각이었으니까.
‘줬다 뺏어야 하나?’
XX, 복잡하네.
다른 퀘스트가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XX! X X XXX!”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서 있는데, 멀리서 화난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 유리문 너머로 호텔 입구가 보였다. 한 여자가 호텔 정문을 막아선 두 남자와 대치 중이다.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가자, 뭉개지듯 들려왔던 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왜 시켜보지도 않고 못 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룰이잖아, 몰라?”
“무슨 룰? 난 동의한 적 없는데 너희들끼리 편한 대로 정한 룰?”
‘엄청난 곱슬머리네.’
그게 여자의 첫인상이었다. 엄청난 분홍색 곱슬머리는 길이도 길어서 부피감이 엄청났다.
여자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서로 얽히고설킨 탱글탱글한 곱슬머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위로 떠 있는 돌발 퀘스트 창.
[돌발 퀘스트
대상: ???
내용: “말려줘.”]
“시켜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잖아? 내가 더 잘할 수도 있잖아!”
여자가 뭘 시켜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막아서는 두 남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여자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근데 뭘 말려달라는 거지? 이 불친절한 종놈은 말이 너무 짧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못하면? 왜 없는 총알을 네 연습용으로 우리가 내어줘야 하는데. 소중한 총알을 낭비할 만큼 네가 중요한 사람이야?”
어, 이거 어디서 들어본 대사가 아니던가. XX, ptsd가 올 것 같다.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쪽을 노려봤다.
잘하면 이 자리에서 돌발 퀘 하나를 해결할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