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카페.’
호텔로 이용될 때, 귀족들이 사용하던 카페였나 보다. 공간 입구엔 화려하게 디자인된 간판이 달려 있었다.
“물류보관소는 여기서 멀지 않답니다. 잠깐만 쉬어 가요.”
“…….”
카페 창밖에서 휘오오오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스칼렛은 정말 지친 모양인지 의자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든 침묵에 나는 손바닥을 무릎에 문질렀다. 바리스타가 있었다면 “전 아아인데, 뭐 드실래요? 라떼? 아메?”라고 물었을 텐데, 여긴 이제 바리스타 따위는 없는 공간이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임신 몇 개월이신지 여쭤도 될까요?”
머리를 굴렸을 때, 이 상황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주제였다.
스칼렛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답했다.
“실례는요. 음, 의사에게 보인 건 아니라 정확하진 않은데. 7개월에서 8개월쯤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
7개월이나 8개월이면…… 뭘까? 무슨 특징이 있는 시기지?
답을 듣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내가 잘 아는 주제를 꺼냈어야 말을 이어가지! 임‧출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무지렁이면서 왜 임신 얘길 꺼냈을까, 나!
하지만 스칼렛은 상대의 기분을 잘 파악하는 빠른 눈치를 가진 데다, 그 기분을 보살펴 줄 아량도 가진 멋진 여자였다.
내가 자꾸 초점을 잃고 말없이 땀 찬 손바닥을 비비자,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벨 잘 모르죠? 호호. 지금 태동이 활발한데, 만져볼래요?”
“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손이 아니라 귀를 가져다 댔다.
“느껴져요? 방금 움직였는데.”
“…….”
느껴지냐구요? 그냥 꾸룩꾸룩하는 사람 소화기관 소리밖에 안 들리는데요.
그러나 곧.
“오? 오!”
뭔가가 꼼지락댔다. 몸을 비트는 건가?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 얼굴을 살짝 더 밀착시켰을 때였다.
나는 볼을 감싸 쥐고 벌떡 일어섰다.
“저 광대 맞았어요!”
무슨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발차기가 이리 힘차지?
스칼렛은 멍청한 표정을 한 나를 보더니 깔깔거리다가 배를 잡고 힘든 표정을 했다.
“아하하, 얘 발차기 잘해요. 얼마나 센데요. 저도 갈비뼈 차일 때면 욕이 나올 정도라니까요.”
“아…….”
난 또 아기가 본능적으로 낯선 사람임을 느끼고 엄마한테서 떨어지라고 찬 줄 알았지 뭐냐.
미워서 맞은 건 아니구나.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발차기가 어마어마하네요. 엄청 건강한 아기인가 봐요.”
“그러게요.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말이죠.”
스칼렛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불안을 감추려 했다.
“사실 두 번째 아이거든요. 처음 와준 아이는 얼굴도 안 보여주고 떠나서 매우 섭섭했답니다. 그래서 더…… 건강하게 태어나주길 바라고 있어요.”
“…….”
그만 숙연해져 천천히 자리에 앉자, 스칼렛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에이, 너무 얼어붙는다, 벨. 다 지난 이야기라 먼저 꺼낸 거예요. 그렇게 굳어버리면 내가 뭐가 돼요.”
“네, 하하.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저도 광대 차인 걸 꼭 갚아줄 수 있으면 좋겠거든요.”
“어머 들었니? 너 벨한테 복수 당하고도 멀쩡하려면 진짜 튼튼하게 나와줘야겠다.”
“하하…….”
눈을 천천히 몇 번 깜빡인 그녀가 한층 차분해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까 기분이 사실 복합적이었어요.”
“예? 언제요?”
“대령님이 여전히 부하의 아내를 어려워하고, 부관의 개인적인 불행도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구는, 변치 않고 계속 그런 사람일 것 같다는 사실이…….”
“…….”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위로가 되더라구요. 세상이 이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변해버리면 제 아이가 태어날 세상이 너무 삭막하지 않겠어요? 엄마는 걱정이 많답니다.”
스칼렛이 제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자신의 아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따듯해서, 어쩐지 내가 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남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니. 그럼 예전에도 이상한 사람이었단 말인데, 너무 무섭게 들리네요.”
스칼렛은 배를 쓰다듬다 말고 빙긋 웃었다.
“그분 꽤 멋진 분이랍니다. 헨리는 늘 캐드 대령님을 태양 같은 분이라고 말했는걸요. 제 남편이 열혈 추종자인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하하…… 하.”
동의할 수 있겠냐구요. 내가 할 말 않고 웃음으로 때운단 표정을 지어 보이자, 스칼렛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의자 팔걸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어버렸네요. 갈까요?”
“네.”
나는 옆으로 가 부축이 필요한 그녀에게 팔을 내밀며 속으로 생각했다.
‘뱃속의 태아가 변수일 수 있겠어.’
하지만 그건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 이 퀘스트가 잘 클리어됐으면 좋겠는데.
❅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엔 애런 혼자 남아 있었다.
“애런? 왜 너 혼자야? 데일은?”
“형은 방금 녹색 머리가 와서 데려갔어. 벨이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방에 꼼짝 말고 있으라면서.”
녹색 머리면 헨리인가.
“애런, 다른 말은 뭐 들은 거 없어?”
“음…… 불독이 부른댔어.”
불독이라, 위험한 일은 없겠지.
데일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가 아둔하게 처음부터 정보를 뽑아내야 할 상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달까.
그 남자라면 뭐,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짠.”
“와!”
등 뒤에 감췄던 아몬드 초콜릿을 내밀자 애런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거, 새 칫솔. 초콜릿 먹고 나서 양치질하는 거다?”
“응, 응.”
“이 초콜릿 스칼렛이 찾아준 거야. 고맙다 그치?”
“…….”
초콜릿을 내밀었을 때 환호성을 질러 놓고서 왜 저런 표정을 짓는담.
쭉 내민 입을 보니 애런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벨, 나랑 약속한 거 안 지키네.”
“약속?”
애런이 필요하다고 말한 물건은 초콜릿뿐이었는데, 내가 못 들은 게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이가 말을 이었다.
“나 말고 개새끼다, 그랬잖아.”
아, 그걸?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
“맞지? 벨, 그 사람 벌써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심장이 두근거렸다.
‘와, 여러분! 여기 내 새끼 똑똑한 것 좀 보고들 가세요!’
지나가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부모들의 심정이 이런 거구나.
이제 이해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애들이 원래 이렇게 똑똑한가? 아니면 내 새끼가 유난히 똑똑한 걸까.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새끼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새끼라 우기고 싶고 그러네.
내가 했던 말을 찰떡같이 이해하고 기억해서 오히려 나를 꾸짖는 애런을 보고 있자니, 입을 가로로 다물고 있으려 해도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자꾸만 슬금슬금 웃음이 기어 나왔다.
“웃어?”
“아니, 안 웃어.”
“…….”
“미안.”
애런은 분명 크면 만만치 않은 어른이 될 것이다. 확신한다.
“후…….”
애런은 아몬드 초콜릿을 쓱 보더니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벨, 초콜릿을 찾아준다고 좋은 사람은 아니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똑똑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동의를 표했다.
“그렇지, 맞아.”
애런이 제 작은 손을 내 손등 위에 올렸다.
“다치면 안 돼.”
‘똑똑하고 마음씨 따듯한 내 새끼!’
“응, 알겠어. 그럴게. 안 다칠게.”
“응.”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실소가 흘러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일단 개새끼라고 생각하라고, 그래야 한다고 말했던 게 누구도 아닌 나인데…….
‘내가 너무 어려운 걸 부탁했던 거구나. 나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을.’
어렵구나, 어려워.
❅
데일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두 개의 방 중, 큰 방에 있는 침대는 네 사람이 굴러다녀도 될 만큼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나는 그 침대 헤드에 다리를 세운 채 누워, 호텔 방으로 들어오는 남자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호텔 방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 쥐 죽은 듯 부드럽게 열리는 문소리, 그리고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다가 내가 있는 열린 방 앞을 그냥 지나쳐 가버리는 소리.
“이봐요.”
내 부름에 발소리가 우뚝 섰다가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
“말도 없이 나갔다가 이제 들어왔으면, 당신이 내가 아는 그 남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게 얼굴은 비치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쏠 뻔했다구요.”
남자는 눈에 띄게 피곤한 기색이었다.
잔뜩 지친 눈길로 그가 내 손에 들린 권총을 보다 입을 열었다.
“맞췄어. 네가 아는 그 남자 아니야, 나. 쏴.”
“…….”
세상에 다양한 농담이 있을 텐데, 지금 최고로 피곤에 쩔은 농담을 만난 것 같다.
“샤워하고 올게.”
데일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매가리가 없는 저음이었다.
나는 스칼렛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헨리와 밖을 나갔다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아, 느낌이 이상해 스칼렛을 찾아갔었다.
“헨리의 실수를 덮으러 함께 가신 것 같아요.”
낮에 헨리가 죽였던 호텔의 일원.
그 뒤처리를 제대로 해두기 위해 둘이 함께 움직인 모양이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왜 헨리가 싸지른 똥을 수습하러 데일이 가야 하는 거지.
뭐…… 마음에 안 든다 해도 내가 어쩌겠는가, 그들이 훨씬 더 오래된 관계인 것을.
“에이 씨, 짜증 나네.”
나는 누워서 괜한 벽이나 발로 찼다.
“너 왜 벽에 성질이야. 벽 불쌍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자 데일이 침대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