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31. 두삼을 원하는(?) 사람들
인천공항.
새하얀 개량 중국식 복장을 입은 노인이 이국적으로 생긴 미녀와 다정하게 입국장을 나오자 공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백발의 머리와 수염을 기른 신선처럼 보이는 노인의 모습에 신기해하다가 곧 서양과 동양의 매력이 섞인 미인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공항 밖으로 향했다.
자세히 본 사람들은 그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아빠! 근데 한국에 온 김에 공개 방송 가면 안 돼?”
미녀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다소 그와 맞지 않는 어린애 같은 톤으로 말했다.
“허허허! 왜 안 되겠니? 아빠 일 끝나고 네 마음대로 놀다가 가자꾸나.”
“아싸!”
“그렇게 좋으냐?”
“물론이죠!”
“녀석하곤. 허허허!”
조손 지간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은 부녀 지간이었다.
흐뭇하게 자신의 딸을 바라보던 노인은 낯선 사내가 다가오자 표정이 순간 싸늘해졌다.
사내는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춘 후 고개를 숙이며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중국의 천정명 회장님께서 어르신을 불편함 없이 모시라고 해서 온 조한영입니다.”
“천 회장이 보냈다고? 쯧! 이럴 것 같아서 말없이 왔는데…….”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모실 차량은 준비해 뒀습니다.”
여러 대의 고급 승용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감사합니다!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내 딸은 호텔로 데려다주고 난 따로 가야 할 곳이 있네.”
“말씀만 하십시오. 어디로 모실까요?”
“악양!”
정확한 한국 발음이었지만 사내는 일순 말을 하지 못했다.
악양이라는 지명을 머릿속에서 검색해 봤지만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으로 찍으면 되는 일이었기에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오르시죠.”
“잠깐만. 려령아, 아빠는 갈 곳이 있으니 호텔에 가 있으려무나.”
“앗! 아빠가 말하던 그 사람 만나러 가는구나. 같이 가면 안 돼? 아빠를 이겼다는 그 사람, 나도 보고 싶어.”
“차로 5시간은 걸릴 텐데?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서 며칠 자야 할지도 몰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묘한 표정을 짓던 장려령은 시골에서 자야 한다는 말에 마음을 바꿨다. 그녀는 벌레를 싫어했다.
“그럼 그냥 쇼핑하고 있을래요.”
“허허! 늦게 되면 연락하마. 그리고 저기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말하려무나.”
“그럴게요. 꼭! 이기고 오세요, 아빠.”
쪽! 볼에 뽀뽀를 하자 노인은 허허롭게 웃곤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24시간 철저히 경호하라는 뜻의 손짓을 보낸 후 차에 올랐다.
“악양이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입니까?”
“그렇네.”
“혹시 정확한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요?”
“일단 면사무소까지 가면 내가 알려주겠네.”
“알겠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거기까지……?
“쯧! 천 회장이 꽤 말 많은 친구를 붙였군.”
노인은 혀를 찬 후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사내는 천 회장이 최선을 다해 모시라는 노인과 친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말을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자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두 번 다시…….”
“시끄럽군. 천 회장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 조용하게.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이나 지시하는 일이 아니면 입 닫고 있어.”
“…알겠습니다.”
기사와 사내는 숨 쉬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그 덕에 노인은 방해받지 않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한언수! 살아 있겠지? 아니, 살아 있어야 해. 당신을 이기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나!’
중의학에 관해선 적이 없다고 자만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 치료차 한국에 왔다가 그를 만나 패배를 하고 자그마치 40년간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온 것이다.
‘과거의 나라고 생각하면 안 될 거야. 과거 당시의 실력을 뛰어넘은 건 15년 전이야!’
그때 찾아갈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언수라고 놀고먹진 않았을 터. 그에게 중의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픈 마음에 15년을 더 노력했고 결국 기가 기만이 아님을 알아냈다.
물론 다시 패배하게 되면 일어설 수 없겠다는 두려움에 15년을 더 연마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언제부턴가 부인하고 있던 생각, ‘살아 있을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언수가 살아 있다면 여든. 사실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아냐! 그 건강하던 사람이 벌써 죽었을 리가. 나 역시 아직 팔팔하지 않는가.’
중국에 있을 땐 이 정도면 마음이 진정이 됐는데 곧 만난다고 생각하니 자꾸 불안했다.
결혼도 늦게 하면서까지 노력했는데 그 대상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만일 당신이 죽었다면…….’
악양 한언수의 집에서 봤던 그의 아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한의학을 배우던 청년이었으니 분명 가업을 잇고 있을 터였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서야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악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대로라면 과거의 한언수에게도 질지 몰랐다. 그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내부를 관조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기운을 바라보자 머리를 어지럽히던 상념은 점점 사라졌다.
“도착했습니다, 어르신.”
“저기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그다음 삼거리가 나오면 다시 우회전하게.”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책상에 앉아 세상 구석구석을 볼 수 있게 됐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엔 한언수의 집까지 나와 있었다. 그에 몇 년 전부터 이곳 악양 지도를 보며 승부를 꿈꿔왔다.
한언수의 집이 가까워지자 익숙한 길이 보였다.
“허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 저기서 왼쪽으로 올라가게.”
좁은 길을 따라 5분쯤 더 가자 산 아래 위치한 한언수의 집이 보였다.
“그래! 저기 보이는 기와집이 바로 목적지네.”
40년 만에 마침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기다려라.”
그는 기사와 사내를 두고 차에서 내렸다. 대문 앞은 바뀌어 있었지만 대문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품속에 있는 침통을 살짝 만진 후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무 조용하군.”
과거 그의 집엔 손님이 끊이질 않았었다. 한데 지금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차에서 느끼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어 성큼 다가왔다.
바닥을 살펴봤다.
깨끗하게 정리된 걸로 보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지내던 본채로 올라갔다.
“…….”
본채를 본 노인의 입 끝이 가늘게 떨렸다.
빛바랜 슬리퍼와 낡은 운동화가 마루 아래에 있었지만 본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원을 옮긴 거냐? 아님 도망간 거냐, 한언수!”
한언수라는 말을 외칠 때 노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슬프게 들렸다.
멍하니 자신이 지냈던 방의 낡은 문을 봤다. 그땐 저렇게 낡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한데 그때 뒤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뉘쇼? 누굴 찾아왔소?”
돌아봤다. 자신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농부 옷 차림의 노인이었다. 근데 어째 낯이 좀 익다.
농부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인지 눈을 좁히며 자세히 봤다. 그러다 먼저 소리친 건 농부였다.
“아! 한동안 본채에서 머물렀던 그 중국 청년! 맞죠? 그분 맞죠? 이름이 장… 뭐였는데.”
“장강룡이요. 혹시 날 아시오?”
“맞다! 장강룡 의원님! 접니다, 저. 아래채에서 일을 하던 이봉래입니다. 의원님이 절 마당쇠라고 부르다가 한 의원님께 혼나지 않으셨습니까.”
“아! 마당쇠!”
장강룡은 반가운 표정으로 소리치다가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상기하곤 정색하며 물었다.
“한 의원은?”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아니, 정확하게는 13년 전이네요.”
“…그 건강하던 사람이… 어, 어떻게?”
장강룡은 어린 시절부터 건강을 위해 무술을 배워 상당히 강했었다. 웬만한 건달 십여 명을 처리하는 건 우스웠다.
한데 체력 단련을 빙자한 대결에서 한언수에겐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인사를 할 수 있겠나?”
“물론이죠. 이쪽입니다. 의원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오른쪽 끝에 있는 방의 문이 열리자 살짝 미소 띤 얼굴을 한 한언수의 영정 사진이 보였다.
“…….”
장강룡은 그를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앞에 서서 사진 속 한언수에게 말했다.
‘…자신이 더 젊어 보인다고 놀리던 당신도 많이 늙었군.’
과거의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가끔 농담처럼 전쟁통에 너무 원기를 많이 소모해서 자긴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되실 줄은 몰랐네요. 돌아가시는 걸 아는 것처럼 한동안 정리를 하셨죠. 그러다 어느 날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
멍했다.
복수를 할 상대가 사라진 것에 대한 허탈감보다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고작 두려움 때문에…….’
15년 전에 왔으면 만났을 텐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가끔 장 의원님 얘길 하면서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했었죠. 아! 맞다. 정리를 하실 때 혹시 장 의원님 오면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거 나이를 먹어서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하셨나?”
“얼마나 오래 공부를 하던 자기의 상대가 안 될 거라고요. 그냥 편하게 살라고요.”
“흥! 그런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게 끝인가?”
“아니요. 뭐라 하셨더라? 그 뒤에 분명 뭔가를 물어보라고 했는데 음…….”
“뭘 물어보라고 했는데?”
이봉래는 대답 대신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다 생각이 났는지 짝! 하고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생각났습니다. 어떤 색까지 봤냐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했는가? 허허허!”
유언을 말하는 이봉래는 모르겠지만 듣는 장강룡은 알았다.
죽은 한언수의 경지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자신보다 낮지 않음을.
‘파란색이 끝이 아니란 말인가? 또, 뭐가 있는데? 한언수! 당신이 본 끝은 뭔데? …당신이란 사람은 유언으로도 날 무력화시키는군.’
직접 만나지도 못했는데 패배감이 들었다. 한데 패배감에 젖어들자 40년간 그를 지탱해 줬던 자존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은 일화가 생각났다.
‘흥! 죽기 직전에 작은 깨달음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당신이 만약 진정 나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었다면 당신 아들에게 잘 가르쳤을 테지.’
한언수의 아들과 대결을 해볼 생각이었다.
“한 의원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글쎄요,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어디 시골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한 곳은 모르겠네요.”
“응? 의원이 아니란 말인가?”
“노력도 하고 실력도 웬만한 한의사 수준은 됐는데 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는 바람에 접었죠.”
“…허허허. 그런가? 허허허허.”
마지막 걸고 있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온몸의 맥이 빠진 듯 허탈했다.
그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허탈하게 웃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롱코트 차림의 사내가 올라왔다. 그걸 본 이봉래가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또 왔어? 이미 말했잖아, 두삼이가 서울에 있다는 건 알지만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닙니다. 귀찮아서 물어본 거지 찾는 건 심부름센터에 부탁해도 됩니다.”
“그럼?”
“떠나기 전에 한번 들러보고 싶어 왔을 뿐입니다.”
“한의원 망한 거냐?”
“…망한 게 아니라 서울로 옮기는 겁니다.”
“그게 그거지. 아무튼 서울에 가서 두삼이 괴롭힐 생각 말고 잘 살아. 부모들의 일은 부모 대에서 끝내는 게 좋아. 그리고 별거 없잖아.”
“…….”
이봉래의 말에 김장혁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시골 노인네와 싸우고 싶진 않아 입을 닫았다.
사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한언수에게 당신이 과거에 했던 짓 때문에 당신 손자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라고 말하기 위해 온 것이다.
“…두삼이 누군가?”
중국 무협 드라마에 나오는 복장을 한 노인이 물었다. 물론 그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기에 신경을 껐다.
이봉래가 말했다.
“한 의원님 손자죠.”
“직업은?”
“무슨 사정이 있는지 자기 입으론 마사지사라고 하는데 실은 한의사입니다. 이곳에서 한동안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곤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이봉래는 신이 나서 두삼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느라 멍해보이던 장강룡의 눈빛이 점점 살아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하여간 이놈의 집구석은 정이 안 간다니까.’
김장혁은 두 노인이 하는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마음속으로 경고를 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한데 그가 대문에 거의 이르렀을 때 뒤에서 이상한 노인네가 불렀다.
“이봐, 거기 잠깐 얘기 좀 하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화가 났지만 대문 밖에 서 있는 두 대의 차를 봤을 때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 나름 공손하게 말했다.
“…절 부르셨습니까?”
“그래. 거기 자네 말고 누가 있나. 듣자하니 한언수의 손자 한두삼에게 뭔가 원한이 있나 보더군?”
“…노인장이 그걸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난 한언수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거든. 어떤가? 같이하지 않겠나?”
“하아~ 이봐요, 노인장. 내 일은…….”
장강룡은 말을 끊고 말했다.
“후후! 알아서 못 할 것 같은데? 현재 솜씨론 어림도 없지. 내가 중의학이 뭔지 가르쳐 주지.”
“…….”
그렇게 복수심에 불타는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